2026년 5월호

“한강의 기적은 곧 150년 ‘부산항의 기적’이죠!”

[대담 | 부산항 개항 150주년] 사학자 강석환·전성현의 부산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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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입력2026-05-03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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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상 물류 거점 부산항,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

    •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올해 150주년 맞아

    • 부산항 빼놓고 근현대사 이야기 불가능…대한민국 혈맥

    • 개항이 치욕의 역사? “타율적이지만 주체적이었다”

    • 6·25 때 물자 대량 유입, 韓 지탱하는 기업 토양

    • 근대 노동 출발지 항만, 산업·자본주의 성장 뒷받침

    • 물류는 여전히 바다로 통해…세계 최고 물류 플랫폼 되길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강석환 부산역사문화포럼 회장이 부산 중구의 한 카페에서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최진렬 기자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왼쪽)와 강석환 부산역사문화포럼 회장이 부산 중구의 한 카페에서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최진렬 기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부산항의 기적’으로도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중국 중심 질서에 머물러 있던 한반도가 세계를 무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부산항의 개항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1876년 부산항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순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강석환 부산역사문화포럼(옛 부산초량왜관연구회) 회장은 최근 ‘신동아’ 인터뷰에서 “부산항은 대한민국을 세계와 연결한 관문이자 근대국가로 전환을 이끈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부산관광협회 부회장과 부산관세물류협회 보세창고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조선시대 일본인 거류지이자 무역 거점이었던 왜관을 중심으로 한 부산의 역사를 연구해 온 향토사학자다. 한반도의 대외 교류 창구였던 부산은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세계적인 항구로 도약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해상 물류 거점 부산항,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

    동북아를 대표하는 해상 물류 거점으로 자리 잡은 부산항은 지난해만 2488만2000TEU에 달하는 컨테이너 물량을 처리했다. 전 세계 컨테이너 항만 순위 7위로 국내 물동량의 75%가 부산항을 통한다. 150여 개국 500여 개 항만이 부산항과 연결돼 있으며, 정기 컨테이너 항로만 약 300개가 운영되고 있다. ‘신동아’는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기념해 강석환 회장과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를 만나 부산항 개항의 의미를 짚어봤다.

    부산항 개항 150주년을 맞이했다. 부산항은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강석환(강): 오늘날 부산항은 아시아의 물류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부산항을 통해 한국은 글로벌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근현대가 1876년부터 본격화됐다고 본다. 강화도조약으로 친숙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시기다. 이를 통해 한국은 중국 중심의 사대 교류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성현(전): 그렇다. 부산 고유의 특이성을 적극 발현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876년 이뤄진 부산항 개항이다. 개항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으나, 부산과 부산항을 빼놓고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20세기 한국사를 논할 때 부산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역사에 대해 연구할수록 ‘부산이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개항 이전의 부산은 어떤 곳이었나.

    전: 조선시대 부산 지역에는 동래부나 좌수영 같은 행정·군사 조직이 있었다. 왜관을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일본과 무역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면 당시 부산은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가까웠다. 과거의 부산은 주로 일본, 특히 대마도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가 규정되는 곳이었다.

    조선 정부는 1609년 일본(대마도)과 기유약조를 맺어 부산항에 왜관을 정비하며 무역 체계를 구축했다. 부산 동구 수정동 일대의 두모포왜관(1609~1678)과 중구 일대의 초량왜관(1678~1876)은 무역항 역할을 수행했다. 

    강: 오늘날 부산 원도심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초량왜관은 대마도 사람에 한해 개방했던 지극히 폐쇄적 공간이었다. 성인 남성의 출입만을 허용했으며 제한된 상거래만 허가됐다. 조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역관이 교류 업무를 담당하며 엄격히 통제했다. 개항은 이러한 종래의 틀을 깨뜨렸다. 세계만방과 소통하는 거점이 되면서 부산의 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개항이 치욕의 역사? “타율적이지만 주체적이었다”

    개항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텐데.

    전: 물론 수많은 부침과 위기의 순간이 있었으나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한반도로 유입되는 근대 문물의 과반이 부산항을 거쳤다. 이후 하늘길(항공)이 열렸고,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으로 교류의 영역이 확장됐다지만, 대규모 물자 통로인 부산항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최소 100년 이상 부산항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질적 인적·지적 교류가 불가능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부산항은 대한민국의 혈맥과도 같은 곳이다.

    1954년 부산항 전경(위)과 항구에 정박한 무역선. 강석환

    1954년 부산항 전경(위)과 항구에 정박한 무역선. 강석환

    강: 부산항 개항 이전까지 한반도는 중국이 주관하는 동아시아 질서 아래 놓여 있었다. 조선의 국왕조차 중국의 승인 없이는 권위를 온전히 세우기 어려운 구조였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이러한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걷기 시작한 역사적 분기점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1875년 운요호사건을 언급하며 일제의 총칼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을 연 ‘치욕의 역사’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을 냉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강: 운요호사건 당시 전사한 조선군은 30여 명 수준이었다. 이보다 앞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과의 교전으로 300여 명이 죽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두고서는 크게 분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강화도조약에 불평등조약으로 볼만한 내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패배주의적 시각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전: 개항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강제 병합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역사 인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 결과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일본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 과정에서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어수룩한 조선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시각이 거부감 없이 수용됐다. 사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일본이 가장 원하던 바였다. 

    왜 일본은 ‘어수룩한 조선이 이용당했다’는 시각을 좋아하는가.

    전: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을 개항과 병합을 통해 근대 세계로 이끌었다고 합리화할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생산하며 관련 주장을 공고히 해왔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당시 조선의 문헌과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인지하고 있었고, 그나름의 방식으로 주체적으로 대응하려 노력했다. 

    일본 상인에게 무관세를 적용한 것은 불평등조약의 근거로 사용된다.

    강: 강화도조약 이전에도 조선은 왜관을 통해 일본과 무역했다. 당장 상평통보 주조에 필요한 구리를 일본을 통해 수입했다. 이 과정에서 수세관(收稅官)이 세금을 징수하기는 했으나 오늘날의 관세 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을 새로운 국제무역의 시작이라기보다 기존 왜관 무역의 연장선으로 인식했다. 그러다 보니 관세의 필요성도 절감하지 못했다. 

    전: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은 결코 일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곡(米穀) 등을 무역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하는 등 국익을 지키기 위한 협상 전략을 구사했다. 조선이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는 통념 역시 사실과 다르다. 초기에 일본 측은 조약 체결이라는 본(本)목적을 숨긴 채 “운요호사건에 대해 항의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 측 전권대신 신헌은 “왜 그런 사소한 일로 왔다고 하느냐, 조약을 체결하러 온 것이 아니냐”라며 반박했다. 조선은 일본이 새로운 조약 체결을 원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앞서 열강과 조약을 맺고 있는 중국의 상황까지 인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인정한 부분은 어떤가.

    강: 영사재판권 문제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거 왜관에서 일본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대마도주가 임명한 관리 책임자인 관수(館守)가 처벌하거나 대마도로 압송했다. 또한 왜관을 통한 무역은 대부분 공무역(公貿易) 형태로 이뤄졌기에 현대적 의미의 관세 개념이 없었다. 조선 정부의 관점에서는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이 요구한 조건은 왜관 무역의 관행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유리해 보였다. 현대의 잣대를 들이대며 “왜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느냐” “왜 영사재판권을 허용했느냐”고 지적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을 간과한 접근이다.

    전: 요컨대 강화도조약은 ‘타율적이었으나 주체적이었던 조약’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관세나 영사재판권 등을 거론하며 불평등성을 강조하지만, 현실 외교에서 완벽하게 평등한 조약이란 없다. 앞서 언급했듯 당시 조선 정부는 무관세를 자국에 크게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판단했다. 오히려 조정 내부에서는 “무관세가 우리에게 유리한데 일본 측은 왜 이를 문제 삼지 않는가”라며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신항 전경. 부산항만공사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신항 전경. 부산항만공사

    6·25전쟁 때 물자 대량 유입…韓 지탱하는 기업 토양 돼

    부산항은 흔히 일제강점기 수탈의 교두보로 평가되기도 한다.

    강: 대한민국은 더는 과거의 열패감에 매몰될 국가가 아니다. 일본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할 때가 됐다. 단적인 예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징용됐던 나의 부친은 ‘일본에 돈을 벌러 간다’고 생각했다. 비록 현지에서 고초를 겪으셨으나, 그분들을 단순히 ‘주체성이 말살된 피해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들은 해외의 선진 문물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이들이었으며, 귀국 후에는 모국에 신문물을 전파한 주역이었다.

    광복 이후 부산항은 어떤 역할을 했나.

    전: 일제는 자국과의 연결망 확충을 위해 부산항에 항만 개발 역량을 집중했다. 전체 항만 개발사업의 3분의 2가 부산항에서 이뤄졌을 정도다. 6·25전쟁 발발 당시 한반도에서 1만t급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만 시설을 갖춘 곳은 부산항이 유일했다. 

    강: 6·25전쟁 당시 부산항을 통해 막대한 물자가 유입됐고, 이는 훗날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는 수많은 기업이 탄생하는 토양이 됐다. 부산항은 단순히 수탈의 통로가 아니었다. 물론 국력이 부족해 식민지라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명민한 한국인은 오히려 그 경험을 세계의 중심에 서기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부산항은 근현대사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재정의돼야 한다.

    전: 그렇다.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났던 수많은 동포가 부산항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중국 등 대륙으로 떠났던 이들이 서울로 집결했다면, 일본 등으로 나간 이들은 부산에 모였다. 식민지 시기 부산의 인구는 일본인을 포함해 30만 명 수준이었다. 광복 후에는 일본인이 떠났음에도 40만~50만 명 혹은 그 이상이 부산에 거주했다. 이는 부산이 대한민국의 태동기에 실질적 거점이었음을 방증한다. 

    부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북항 2단계 항만재개발사업 조감도. 부산시

    부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북항 2단계 항만재개발사업 조감도. 부산시

    근대 노동의 출발지 항만…산업·자본주의 성장 뒷받침

    이후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강: 역사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보면 ‘부산항의 기적’이라 표현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수천 년간 중국 중심의 질서에 예속됐던 한반도가 세계라는 무대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부산항이라는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인이 지닌 역동적이고 뛰어난 DNA가 세계시장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부산항의 개항이었다.

    전: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의미의 노동자가 처음 등장한 일터는 항만이었다. 항만을 중심으로 하역 노동자가 모여들었고, 산업 역시 항만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근대성의 본질은 소통과 교류에 있다. 항구는 그 가치가 가장 극명하게 발현되는 공간이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서 부산항을 개발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특히 자본주의경제가 이 땅에서 꽃피울 수 있는 제반 환경을 조성하는 데 부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강: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들이 있다. 바로 개항 이래 150년 동안 단 한 번의 파업도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킨 항만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현재 북항 재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1부두에 항만 노동자의 노고와 헌신을 기리는 ‘부산항역사전시관’을 건립할 것을 제안하는 바다. 한강의 기적 이전에 부산항의 기적이 있었음을, 그리고 기적의 이면에 이름 없는 항만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부산과 부산항이 어떤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나.

    전: 부산만의 특수성과 잠재력이 좀 더 온전히 발현되는 도시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부산이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를 실현하면 지역에서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자치와 분권의 실질적 강화가 불가피하다. 국회에 계류 중인 부산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을 살펴보면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위원회를 꾸리도록 설계돼 있다. 지방정부와 지역 시민사회의 참여가 제한되는 구조다. 입법 초기 단계인 만큼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강: 반도체와 같은 경박단소(輕薄短小)형 고부가가치 제품은 항공편으로 이동한다지만,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거대 물류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바다를 통해 배로 운송된다. 부산항이 무역선들이 활발하게 오가는 세계 최고의 물류 플랫폼으로 남기를 바란다. 특히 북항은 ‘물류 소부장’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중소 선사가 드나들던 곳이다. 재개발 과정에서도 북항 본연의 물류 처리 기능을 살리기 위한 정책적 고민이 필요하다. 



    최진렬 기자

    최진렬 기자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주간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재미없지만 재미있는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1인분의 몫을 하는 사람이 되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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