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뇌-심장-핏줄 제각각… 값싼 요금 발전사-전력거래소-한전 再통합 논의를!”

아슬아슬 전력 수급 왜 이러나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입력2012-08-21 17: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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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6, 7일 전력이 휘청거렸다. 지난해 9·15 블랙아웃 사태가 떠올랐다.
    • 대규모 동시 정전사태가 일어나면 전기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국가 및 산업 기능의 상당 부분이 마비된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전력 수급을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뇌-심장-핏줄 제각각… 값싼 요금 발전사-전력거래소-한전 再통합 논의를!”

    한국의 원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도 한전은 해외 원전 수주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시고 있다. 재무상태가 나빠서다. 사진은 고리원자력발전소 .

    폭염이 한창이던 8월 6, 7일 전력사정이 아슬아슬했다. 냉방 수요가 폭증한 8월 6일 오후 2시 15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거래소에는 긴장이 흘렀다.

    “주의 단계를 발령합니다.”

    전력거래소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분주했다. 이틀 연속 주의 경보를 발령한 것은 사상 처음. 전력거래소는 현대제철, 대한제강을 비롯해 전력 사용량이 많은 다수 기업에 공장 가동 중단을 요구했다.

    비슷한 시각, 우수연(38·서울 노원구 중계동) 씨는 집 안의 아파트 방송용 스피커를 종이로 막아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전기 사용을 줄여달라는 방송이 나와서다. 8월 6일부터 전기요금이 평균 4.9% 인상된 것도 마뜩잖다.

    “가뜩이나 더운데 전력 수급은 불안하다 하지, 전기요금은 올린다고 하지, 한전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전력 수급을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한국전력공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시곗바늘을 지난해 9월 15일로 되돌려보자. 이날 사상 초유의 전국 순환 정전 사태가 일어났다. 이튿날 한전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엉뚱하게’ 한전을 찾아와서다. 김우겸 당시 한전 사장 직무대행은 몸을 움츠렸다. 이 대통령은 한전 인사들을 35분 동안 꾸짖었다.

    이 대통령 : (한전이) 자기 마음대로 (전력 공급을) 자르고 해도 되는 건가.

    김 사장대행 : 전력거래소에서 그런 거 한다.

    이 대통령 : 한전이 하는 건 뭔가.

    김 사장대행 : 한전이 하는 건 전력 수요가 많아져 조절하는 부분에 대해…. 전력거래소 요청을 받아 사전에 조정했다.

    이 대통령 : 거래소에서 단전하라고 하면 단전하느냐. 단전 전에 매뉴얼상 뭐가 없나.

    김 사장대행 : 사전 홍보하게 돼 있다. 이번에는 워낙 계통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어서 사전 조치를 못했다.

    이 대통령 : 그런 경우 단전을 자기 맘대로 해도 되나.

    김 사장대행 : 급전 운영상 단전이 늦어지면 전국 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그 상황은 전적으로 전력거래소 지휘를 받게 돼 있다.

    김 사장대행이 언급한 ‘전국 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은 블랙아웃(Blackout·전국 동시 정전)을 의미한다. 블랙아웃이 일어나면 전력 인프라가 통째로 마비된다. 복구에 최소 2, 3일이 걸린다. 복구 기간엔 전기 없이 살아야 한다. 지난해 9월 15일 한국은 블랙아웃 직전까지 갔다.

    이 대통령은 이날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한전이 아닌 지식경제부 산하 전력거래소를 질타해야 했다. 참모진이 전력산업과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9·15 정전사태와 관련해 사실상 책임이 없다. ‘뇌’를 전력거래소에 내줘 수요 예측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기라고 하면 으레 한전을 떠올리지만, 전력 수급과 관련해선 전권을 전력거래소가 행사한다.

    ‘뇌’를 떼어준 한전

    “뇌-심장-핏줄 제각각… 값싼 요금 발전사-전력거래소-한전 再통합 논의를!”

    7월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의류 매장이 단속을 비웃듯 에어컨을 켜놓고도 출입문은 활짝 열어둔 채 영업하고 있다.

    9·15 정전사태의 원인 중 하나가 ‘뇌’와 ‘심장’ ‘핏줄’이 따로 노는 기형적 전력산업 구조다. 한국의 전력산업은 민영화를 목표로 구조 개편을 한 뒤 시장 논리 도입을 중단함으로써 기형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력거래소가 계통운영(SO)을 책임지고, 한전이 송전망 운영(TO)을 맡는다. 발전은 한전의 발전 자회사가 한다. 전력거래소가 ‘뇌’, 발전 자회사가 ‘심장’, 한전이 ‘핏줄’ 노릇을 하는 것이다.

    전력거래소의 전력 수요 예측에 따라 발전 자회사가 전기를 생산해 한전에 판다. 전력거래소는 예비전력 감소 정도에 따라 발전소 가동을 늘리거나 절전을 유도하는 컨트롤 타워 구실을 한다. “자기 마음대로 자르고 해도 되는 건가” “거래소에서 단전하라고 하면 단전하느냐”라는 이 대통령의 질타는 서울역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한 격이다. 뇌가 명령하면 핏줄이 따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기형적 전력산업 구조

    “뇌-심장-핏줄 제각각… 값싼 요금 발전사-전력거래소-한전 再통합 논의를!”

    2001년 1월 1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인 어부의 부두(Fisherman′s Wharf)에 있는 한 상점 직원이 정전으로 인해 가게 문을 닫는다는 안내판을 내걸고 전력 공급이 재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요컨대 기형적 전력산업 구조로 인한 정보 비대칭, 의사결정 및 책임소재 분산, 전력거래소의 계통 운영 능력 미흡 등으로 전기 수급이 위태로운 것이다. 또한 전기요금 체제의 왜곡으로 인한 소비 증가가 전력난을 부채질했다. 8월 6, 7일엔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으나 문제는 앞으로다. 기형적 구조와 전력 수급 및 요금 정책을 개선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전력 수급 상황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시되고 있다.

    첫째, 2004년 중단한 민영화를 마무리해 전력산업을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전 자회사들을 시장에 내놓고, 대기업을 발전산업에 적극적으로 진출시키자는 것이다. 둘째, 발전사들과 전력거래소를 한전으로 다시 통합해 ‘원 켑코(One KEPCO·하나의 한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공공재인 전기를 시장에 맡기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면서 ‘뇌’ ‘몸통’ ‘핏줄’을 다시 한몸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재통합론엔 “한국보다 앞서 시장화, 민영화에 나선 국가들이 실패했다” “발전회사를 민영화하면 대기업 배만 불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가 따라붙는다.

    정부는 1999년 전력산업 구조 개편에 나섰다. 독점 전력회사인 한전의 분할 및 민영화가 골자였다. 한전의 발전 부문을 6개 회사로 나누고 전력거래소를 설치하는 1단계 구조 개편을 2001년 4월 완료했다.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동서발전, 한국중부발전 등 6개사가 한전 자회사 형태로 출범했다. 한전 자회사 중 민간에 매각된 곳은 지금껏 없다. 배전 부문도 지역별로 분할한 뒤 민영화할 방침이었으나 공염불에 그쳤다.

    2004년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구조 개편특별위원회는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기대 이익에 비해 위험이 크다고 결론짓고 전력산업 구조 개편 중단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 같은 요구를 수용했다. 시장 원리를 도입했다 부작용 때문에 고생한 영국과 정전사태를 겪은 미국 캘리포니아, 전력가격 급등을 경험한 캐나다 온타리오의 사례가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했으나 공공요금에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기업의 민영화는 사실상 접었다. 올해 12월 대선이 치러지는 권력 교체기가 되면서 전력산업 민영화를 주장하는 시장론자와 예전의 통합된 한전으로 되돌아가자는 재통합론자들이 치열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

    “시장 실패가 더 아파”

    ‘신동아’는 2009년 8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워싱턴(이상 미국), 런던(영국), 오슬로(노르웨이)에서 전력산업 구조 개편 전문가들을 만났다. 해외 전문가들의 견해는 “정부 실패보다 시장 실패가 더 아팠다”는 쪽으로 수렴됐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시장경쟁, 규제완화, 공기업 민영화가 전력산업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8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가장 급진적으로 전력시장 자유화에 나섰다. 규제완화의 목표는 경쟁체제가 되면 시장이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게 돼 전기를 값싸게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정부는 1998년 3개 독점 전력회사에 발전소 매각을 명령했다. 2001년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때마침 수력 발전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천연가스 가격이 올라 발전비용이 크게 올랐다. 엔론을 비롯한 민간 발전회사는 시장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전기가격을 조작했고, 그 결과 도매요금이 급등했다. 당국의 규제로 인해 전기요금을 올리지 못한 판매회사들은 늘어난 전력 구입비용을 발전회사에 제때 지급하지 못했다. 발전회사들은 전력회사에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주정부의 정책 오류와 발전회사들의 극단적인 이윤 추구가 대규모 정전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판매회사들은 결국 차례로 도산했다. 미국소비자연맹(CFA)은 “자유화는 고통만 가져왔을 뿐 얻은 건 없다”고 평가했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예정대로 진행했다면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소지도 배제할 수는 없다.

    캘리포니아의 전력, 천연가스, 통신, 상수도, 철도산업을 규제하는 캘리포니아 공익사업위원회(CPUC)에서 에너지 담당 당국자로 일하는 로버트 키노시안은 “시장화는 실패했다”고 단언하면서 “과거의 규제 독점 시스템이 시장 시스템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전력위기 때 위기 극복 담당자로 일했다.

    “규제완화, 시장화 정책을 펼치면 전기요금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시작했다. 전력산업에 욕심을 가진 엔론 같은 회사, 그러니까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는 이들이 찬성했다. 자금력을 이용한 로비도 대단했다. 시장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판매회사들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다. 주정부가 자금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파산한 회사에 투입한 예산은 납세자가 낸 세금이다. 전력대란이 일어난 뒤 CPUC는 발전회사를 규제하는 권한을 되찾았다. 발전회사, 배전회사가 장기계약을 맺게 했으며 발전소에서 발전을 중단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력산업은 특수하다. 발전·송전·배전의 수직통합 및 독점체제가 효율적이면서 안정적이다. 시장화의 실패는 전력산업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영국은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시행한 최초의 선진국이다. 1990년 발전·송전시장을 독점하던 국영 전력청을 3개의 발전회사와 1개의 송전회사로 나눈 뒤 3개의 발전회사를 민영화했다. 민영화 이후 에너지 가격 하락으로 전기 생산비용이 큰 폭으로 감소했는데도 전기요금은 소폭으로 떨어졌다. 당국은 3개 발전회사의 과점 탓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해 추가 분할을 요구했다. 오판이었다. 발전 부문은 현재 13개 회사로 쪼개져 있는데, 그중 7개 기업이 외국자본에 넘어갔다. 영국 그리니치대 스티브 토머스 교수의 설명이다.

    “전기는 특수한 상품이다. 정부가 공공재와 일반재를 구분하지 못했다. 공공재엔 완전경쟁 모델이 들어맞지 않는다. 공공재는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고 수요가 탄력적이지 않아서다. 공공재의 완전 경쟁시장은 구축하는 데 비용도 많이 든다. 영국은 전력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시장 설계, 마케팅, 수수료 등에 15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했다. 공공재는 규제독점이 경쟁시장보다 안정적, 효율적이라는 게 현재까지의 평가다. 경제학의 일반 원리가 전력산업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1993년 설립된 북유럽 전력시장 노드풀은 성공한 전력산업 시장화 모델이다. 1996년 노르웨이, 스웨덴이 ‘풀’이라고 불리는 전력시장을 통해 전력거래를 시작했고, 핀란드(1998년) 덴마크(2000년)가 합류했다. 에릭 트라네 노드풀 최고경영자(CEO)는 “정부의 규제와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덕분에 노드풀이 성공했다”고 강조했다.

    “규제독점과 경쟁체제는 국가별 특징에 따라 도입할 문제이긴 하지만 당연히 효율성 높은 경쟁시장이 더 좋다. 시장은 모두에게 혜택을 준다. 국가별로 보면 노르웨이는 수력, 덴마크는 화력, 핀란드는 화력과 원자력, 스웨덴은 수력과 원자력이 특화해 있다. 물이 풍부한 여름철에 노르웨이가 남아도는 전력을 덴마크에 팔면 덴마크는 화력발전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반대로 겨울철엔 스웨덴, 덴마크가 발전량이 줄어든 노르웨이에 전기를 판다.”

    노드풀은 각국이 가진 발전 자산을 통합 운영함으로써 발전비용을 줄였다는 점에서 같은 환경을 가진 단일 시장인 영국이나 캘리포니아의 그것과는 다르다. 세계화를 강조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설명대로 서로 다른 국가 간 자유무역이 참가자 모두에게 혜택을 준 것이다. 트라네 최고경영자는 “한국이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시작했다 중간에 멈춰 서 있는 건 이상하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 시장화가 어렵다면 과거처럼 발전, 송전, 배전 일원화 체제로 가는 게 낫다. 나라별 사정에 따라 판단할 문제지만 소매시장에서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영국과 캘리포니아 사례가 웅변하듯 공공성이 강한 분야의 민영화, 시장화는 잘못 설계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은 에너지 자원의 97%를 해외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 남북 분단 탓에 전력계통이 고립돼 있어 전력을 수입하거나 수출할 수 없는 환경이다. 캘리포니아처럼 인접한 다른 주에서 전기를 구입해 올 수도 없다. 정책을 수립할 때 신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경제 모델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앵글로-색슨식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개입을 강조하는 모델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시장의 힘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결이 다른 진단을 내놓는다. 한국의 전력산업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시장 논리 도입’ ‘한전으로의 재통합’이라는 서로 다른 의견을 해법으로 내놓고 있는 전문가들도 적극적 시장 논리를 도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직 계열화도 아닌 현재의 ‘어정쩡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는 한목소리를 낸다.

    사시사철 긴장해야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전력 수요가 최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한전의 발전 자회사가 보유한 308개 발전기는 보통 1년 6개월마다 정비해야 한다. 소비가 많은 여름과 겨울을 피하면 봄과 가을에 정비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9·15 정전사태도 발전기 정비가 한창이던 가을에 일어났다. 사시사철 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전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으나 최근 2년간 해외사업 수주에서 죽을 쒔다. 올해 초 에티오피아 송·배전 컨설팅 입찰 때는 참가 자체가 제한됐다.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바람에 ‘최근 3년 연속 결손이 아닌 회사’라는 입찰 기준을 맞추지 못해서다. 인도네시아 석탄 화력발전소와 이집트 복합화력발전소 입찰에서도 부채가 많은 탓에 재무 분야 심사에서 최저 수준의 점수를 받고 탈락했다. 한전의 적자 구조와 재무 상태에 변화가 없다면 “해외시장을 개척해 매출 절반을 국외에서 올리겠다”는 김중겸 한전 사장의 포부는 공수표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전기 소비 증가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평균의 5배다. 한국은 경제성장률보다 전기 소비 증가율이 더 높은 특이한 국가다. 전기는 원가가 석유의 2.5배에 달하는 ‘비싼’ 에너지인데, 요금이 저렴하니 너나 할 것 없이 펑펑 사용해서다. 석유난로를 쓰는 상가나 가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석유를 사용하던 공장이 전기로 에너지원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석유, 가스 가격은 뛰는 상황에서 전기요금을 묶어놓아 일어난 일. ‘전기요금=정치요금’이란 등식이 적용되면서 에너지난이 가중된 것이다. 지난해 전기의 원가회수율은 87.4%다. 전기를 만드는 데 100원이 들어가는데, 87원에 팔았다는 뜻이다. 시장론자들은 ‘정부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기는 정부의 요금정책을 꼽는다.

    정부는 2015년 이후엔 전력 수급 상황이 개선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력 수급기본계획’이라는 것이 있다. 향후 15년의 전기 수요를 예측하고 이에 맞춰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 골자다. 미래의 전기 수요를 실제보다 적게 예측하거나 짓기로 한 발전소를 제대로 건설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부가 2006년 발표한 제3차 전력 수급기본계획(발전소 건설기간을 고려할 때 실제로 2012년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계획)을 보면 올해의 전력예비율은 27%에 달한다. 예측이 ‘엉망 수준’으로 틀린 것이다. 국민을 블랙아웃의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계획대로 발전소가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발전소를 짓기로 한 민간기업이 계획을 이행하지 않았다.

    기형적 전력산업 구조와 왜곡된 전기요금이 고질적 전력난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는 재통합론자와 시장론자가 공히 동의한다.

    재통합론자는 공익성과 한전의 글로벌 경쟁력을 중시하면서 수직 계열화가 세계적 추세라고 강조한다. 시장론자는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민간기업의 발전산업 진입을 촉진해야 자연스럽게 글로벌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뇌-심장-핏줄 제각각… 값싼 요금 발전사-전력거래소-한전 再통합 논의를!”


    재통합론자들은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중심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중 강경파는 ‘원 켑코’를 내세운다. 한전, 한국수력원자력, 화력발전사들을 통합해 ‘글로벌 챔피언’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원전 및 발전소 수주 시 경쟁력을 높이려면 적어도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을 통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재통합론자들은 통일시대 준비와 동북아 계통연계를 고려할 때도 한전을 중심으로 한 수직 계열화가 유리하다고 본다.

    영국은 자국 발전산업의 주도권을 외국 업체에 넘겨준 반면 자국 기업의 수직 계열화를 보호·장려한 독일과 프랑스의 전력회사는 ‘글로벌 챔피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가 간(영토가 넓은 나라는 지역 간) 전력계통 연계 노력도 가속화하는 추세다. 한국은 북한 탓에 영토가 ‘섬’ 성격을 지녀 외국과 전력을 주고받는 것이 어렵지만 언젠가는 추진해야 할 일이다.

    시장론자들은 전기시장에서도 독점을 철폐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기라고 해서 시장 원리를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만큼 현재 중단된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서둘러 마무리하자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실패는 시장화 자체가 아닌 시장 설계의 오류와 규제 정책의 잘못 탓이라고 여긴다. “제대로 된 시장화를 해 민간 발전소가 늘어나면 수급 문제가 해결되고 전기요금이 자연스럽게 내려간다”는 주장이다.

    발전산업은 투자를 늘리면 수익이 줄어드는 특이한 구조다. 발전설비가 늘어나고 예비전력이 늘어나면 전기요금은 떨어진다. 예비전력이 줄어들어야 전력가격이 올라가는데 누가 적극적으로 발전소를 짓겠는가? 이윤을 가장 앞선 가치로 둬야 하는 민간기업은 ‘미래의 위기’와 관련해 공익에 어긋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올해 한전이 발전회사로부터 전력을 구입하는 데 쓴 비용은 전년 대비 약 25% 늘었다. 석유 가스 가격이 올라간 데다 전기 수급 불안이 이어지고 여유 발전기가 줄어들면서 전력 구매비용이 급등했다.

    한국에선 한전 자회사들만 발전기를 돌리는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다. 대기업이 참여한 민간 발전회사가 적지 않다. 한전 자회사들의 2010년 매출액 대비 순이익 비율(순이익률)은 1.68%다. 자회사들은 원가에 이문을 붙여 한전에 전기를 넘기면서 수익을 내고 있다. 같은 기간 민간회사인 SK ENS의 순이익률은 30.67%에 달한다. GS파워는 9.11%, MPC 율촌은 7.87%, MPC 대산은 7.34%의 순이익률을 기록했다. 2012년 5월 기준으로 한전 자회사들은 전체 발전 설비의 81%를 담당하고 있으며 민자회사들은 8.5%를 맡고 있는데, 81%를 담당하는 자회사들의 2010년 당기 순이익은 4272억 원인 반면 8.5%를 담당하는 민자회사의 순이익은 3401억 원에 달한다. 민간회사들이 초과 이윤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한전은 1시간마다 전력거래소를 통해 자회사들과 민자발전소에서 전기를 사온다. 발전소마다 생산비용이 다르다. 예컨대 낙찰가가 A발전소 50원, B발전소 60원, C발전소 70원 식으로 결정되다 Z발전소가 120원에 낙찰되면 A, B, C발전소의 낙찰 가격도 120원으로 올려준다. 한전은 원칙적으로 모든 발전회사에 120원을 주고 전기를 사 국민에게 판매한다. 한전이 국민에게 되파는 가격은 구입하는 가격보다 훨씬 싸다. 이러한 구조가 계속되면 한전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한전은 ‘꼼수’를 쓴다. 발전 자회사에는 권한을 이용해 120원보다 적은 돈을 지급한다. 민자발전소에는 120원을 그대로 지급할 수밖에 없다. 민자발전소의 이윤을 보장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뇌-심장-핏줄 제각각… 값싼 요금 발전사-전력거래소-한전 再통합 논의를!”
    “블랙아웃 당해야 정신 차릴 것”

    발전은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장치산업이다. 이윤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민자가 참여하기 어렵다. 발전사업 진출을 준비하는 대기업이 적지 않은 것은 이러한 가격 결정 구조 때문이다. 시장화가 전기요금을 낮추는 만능 해결사가 아닐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처럼 민간기업이 탐욕을 부리면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질 수도 있다. 그 대가는 국민이 치러야 한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2004년 이후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있다. “블랙아웃을 당해봐야 정신 차릴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지난해 9·15 정전사태 때는 인위적으로 순환 정전에 나서면서 재앙을 막았다. 인위적 순환 정전에 실패하면 기계적으로 단전이 이뤄진다. 기계적 단전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어서 단전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기계적 단전에도 실패하면 블랙아웃이다. 1977년 블랙아웃 때 미국 뉴욕은 약탈의 도시로 바뀌었다. 블랙아웃이 일어나면 양수발전기에서 전기를 일으켜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의 전원을 켠 후 원전과 화력발전기가 전기 생산에 다시 나서는 방식으로 전력망을 복구한다. 전기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국가 기능의 상당 부분이 마비된다. 일부 산업시설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전력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하고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질 높은 전기를 제공한 한전이 없었다면 삼성전자, 포스코도 없었다”는 말이 있다. 전문가들은 “전력 수급 안정 및 효율적 공급을 위한 최적의 시스템을 찾아내야 한다” “글로벌 시각으로 전력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고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동북아 계통연계를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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