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정했던 이두호씨의 부모. 이씨의 부친은 주벽이 심했으나 모친은 정성을 다해 이를 받아주었다. 그러한 어머니의 성정이 이씨를 바로잡아 주었다고 한다.
나는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명은 ‘삼시’였다. 삼 줄기처럼 질기게 오래오래 살라고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란다. 집안에서는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삼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삼시라는 아명 대신 두호로 불렸으며 중학교 때쯤에는 아무도 나를 삼시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분 아버지께서는 가끔 초저녁이나 밤중에 대문 밖에서 “삼시야” 하고 나를 부르셨다. 그러면 나는 하늘이라도 날 듯 기뻐했다. 그런 날은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지 않은 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술을 좋아하셨다. 담배도 손끝에서 떠날 때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동네 청년들이 “아무개 어른 지금 손에 담배를 들고 계실까, 술잔을 들고 계실까?” 하는 내기까지 했을까.
한 달에 스무대여섯 날은 만취로 귀가가 늦으셨고 그런 날이면 우리 식구들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선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아버지께서 들어오지 않으면 주무시는 법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자다가도 아버지가 오시면 일어나 인사를 드려야 했다. 어머니께서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셨다.
선잠이 들었다가도 아버지가 오시는 기척이 나면 나는 대문 쪽으로 바짝 귀를 기울였다. “어험어험” 하시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두어 번 들리면 나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긴장했다. “삼시야” 하고 부르시면 나는 “예에” 큰소리로 대답하고 얼른 뛰어나가 대문을 열어드렸다.
그러나 “삼시야”라고 부르는 대신 “문 열어라” 하실 때면 가슴이 철렁하는 불안과 공포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런 날은 십중팔구 술을 드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지옥이었다. 아버지의 주정으로 어머니는 물론 우리 형제들도 밤새도록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금방 주무실 때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가뭄에 콩 나기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쯤으로 기억된다. 그 날 아버지께선 몹시 취하셨다. 밥상이 엎어지고 방문짝이 날아갔다. 마당의 장독들도 박살이 났다. 좀처럼 대거리를 하지 않으시던 어머니도 더는 참을 수가 없으셨던지 목청을 높이셨다. “애들 더 고생시키지 말고, 고마 이녁하고 나 죽읍시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는 마루 밑에서 무엇인가 들고와 방 안에 뿌리셨다. 방 안에는 기름 냄새가 등천했다. 아버지께서는 마루 밑 기둥 뒤에 놓여 있던 라이터용 휘발유가 든 병을 갖고 나와 뿌리신 것이다. 나는 ‘휘발유 냄새’라는 것을 직감했고 반사적으로 윗목에 있던 라이터와 성냥을 품안에 감추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는 며칠 동안 앓아 누우셨다. 술이 깨신 아버지께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인 누나가 호소와 원망을 퍼부었으나,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부서진 문짝을 고치실 뿐이었다.
아버지는 솜씨가 참 좋으셨다. 아버지의 손을 거치면 도저히 쓸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난 문짝도 말끔하게 새것으로 되살아났다. 밥상도 말짱해졌다.
그래서인가, 가끔 동네 어른들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그놈 참, 솜씨는 영판 아버지 닮았구먼”하고 말씀하시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