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얼굴 세종로에 위치한 동아일보사의 현대식 첨단 빌딩 3층과 4층에 한국 최초의 신문박물관이 문을 연 지난 2000년 12월15일, 일본에서 교환교수 생활 1년을 거의 마쳐가던 나는 그 개관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서울로 날아왔다. 동아일보가 일본에 있는 나를 초청한 것은 무엇보다 박물관 전시물 가운데 상당부분을 내가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전시물의 배치와 캡션 집필 등도 내가 자문했다.
한국 최초·유일의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박물관 개관을 위해 실무진들이 한창 바쁘게 일하던 작년 한 해, 나는 몇 차례 서울에 와서 박물관의 도면을 보면서 전시물의 배치, 크기, 내용 등에 관해서 자문하였고, 일본에서도 이 메일로 보내주는 파일을 검토해서 수정·보완을 거듭했다. 박물관 측이 개관행사에서 나를 자문위원으로 소개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은 동아일보만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은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주류는 언론의 역사가 핵심을 이룬다. 개화의 여명기에 발행된 국내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부터 시작하여 혁명적인 선각자 서재필 선생이 창간한 민간지 ‘독립신문’과 한말 민족지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황성신문’, ‘뎨국신문’과 같은 민족지들로 이어오는 한국언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추상 같은 항일논조로 치열한 무장 의병활동에 불을 붙였으며, 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도 신문이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발행된 동아일보, 조선일보 관련 자료들과 광고의 변천, 신문 만화, 연재소설 등 신문의 여러 모습과 광복 후 역사의 큰 고비를 기록한 신문지면 등이 종합적이고 균형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신문박물관의 개관으로 격동의 현대사를 당시의 지면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금싸라기 같은 공간을 수익성이 없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신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학습장으로 만든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몇십년 동안 애써 모은 내 자료를 양도·임대한 것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신문박물관이라는 동아일보사의 공익적 취지에 찬동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의 영어 명칭 프레시움(Preseum)은 프레스(Press)와 뮤지엄(Museum)을 합성해 만든 조어(造語)다. 워싱턴에 있는 뉴지엄(Newseum: News와 Museum의 합성)과 견줄 만한 단어다. 일본의 신문박물관은 뉴스파크(News Park), 뉴스 역사의 공원이라는 뜻이 된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에는 5000여 점의 자료가 소장돼 있다. 그 가운데는 내가 언론사(言論史) 연구를 처음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부터 모아온 추억의 자료들도 포함돼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일보의 맞은편 국제극장 뒤쪽 큰길가에도 보문서림이라는 고서점이 있었고, 인사동에는 경문서림, 한국서적과 같은 단골집들이 있었다. 언론사 관련 자료를 찾는 사람도 별로 없던 시기였기에 나는 그런 고서점을 즐겨 찾았다. 그러나 자료 수집도 어느 단계를 지나고 나면 보관이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혼자 지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수집가들이 비슷한 과정과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동아일보에 양도한 자료 가운데는 역사적 사료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 많다. 신문이 85종이고, 그 외에 잡지, 언론관련 서적 등이 있다. 신문 가운데는 ‘황성신문’(61점)을 비롯하여 ‘대한매일신보’(2), ‘만세보’(45), ‘한성신보’(8), ‘대동신보’(1), ‘경향신문’(한말 발행 22점), 최남선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신문 ‘붉은져고리’(8) 등의 귀중한 한말 신문이 있었고, 일제치하의 ‘중외일보’(1), ‘조선중앙일보’(3), ‘매일신보’(18), ‘경성일보’(42), ‘국민신보’(2), ‘조선신보’(1), 1945년 광복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속간호도 있으며, ‘조선인민보’(46), ‘해방일보’ 같은 좌익 신문은 광복 후 좌익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담은 신문들이다.
대한매일신보사에 걸렸던 태극기와 유니언 잭
호외도 237종이 있다. 1951년 4월7일자 서울신문이 보도한 ‘38선 전면돌파’를 비롯하여, ‘이기붕 일가 자살’(1960.4. 28), 5·16의 발발을 알리는 ‘군부 쿠데타’(1961.5.16) 등은 수많은 역사적 대사건을 단 1분이라도 근접한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알리려 했던 기록들이다. 통신은 광복 후에 발행된 여러 종류를 포함하여 29종이 있고, 잡지 가운데는 한말에 발행된 ‘조양보(朝陽報)’, 일제하의 언론 전문지 ‘쩌날리즘’, 광복 후의 ‘민성(民聲)’ 등이 있다.
내가 보관하던 유물 가운데 3점은 박물관에 양도하지 않고 임대하는 형식으로 전시하도록 했다. 1904년에서 1910년까지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사’에 게양됐던 태극기와 영국 국기 ‘유니언 잭’, 그리고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裴說: Ernest Tho- mas Bethell)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집(輓詞集)이 그것이다. 대한매일신보에 걸려 있던 태극기는 흰 무명 천에 태극의 붉은색과 푸른색 대신 검은색의 천을 덧대어 박음질한 것이다. 4개의 검은색 괘(卦)도 천조각으로 박음질했다. 다만 현재의 태극기와는 태극과 4괘의 위치가 달라서 상하 어느 쪽으로 걸어도 맞지 않는다. 그 태극기가 지닌 역사적 상징성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중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태극기 연구가들에게는 매우 흥미있는 실물 자료가 될 것이다.
유니언 잭은 일본 경찰이나 헌병대가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임을 선언했던 상징물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로서 이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이끌고 있던 양기탁(梁起鐸) 선생은 일본 경찰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문사 안에 기거하면서 피끓는 구국 언론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었다. 일본이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위해 영국에 끈질긴 외교교섭을 벌이던 때였다. 당시 영국의 ‘데일리 미러(Daily Mirror)’는 1908년 8월5일자에 “유니언 잭이 양기탁을 보호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유니언 잭이 옥상에 휘날리던 대한매일신보사 건물은 일본 경찰이나 헌병대가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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