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이 세 성씨보다 레벨이 떨어지는 집안에서 이들 명문과 혼사를 맺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다행히 혼사가 성공하면 주위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택(턱)걸이 혼사’라고 불렀다. 수백년간 명문으로 인정받아 온 기·고·박 집안은 그만큼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어느 집안이 명문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걸출한 인물을 한 명쯤 배출해야만 한다. 학문이 높고, 의리를 지키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세가지 자격 조건을 가진 인물이 나오면 그 집안은 주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명문으로 대접받게 되고, 그 인물은 그 집안의 중시조가 되기 마련이다. 기·고·박 세 성씨는 바로 이런 인물들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광주 일대에서 기씨 집안이 명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출현 때문이다. 고씨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삼부자(三父子)가 함께 전사한 의병장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을 배출하였다(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재청, 3공 때 국회의원을 지낸 고재필씨가 그 후손들이다).
박씨 집안에서는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을 날린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년)과 그의 동생인 육봉(六峯) 박우(朴祐, 1476∼1547년), 그리고 육봉의 아들로 시인이자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년)을 배출하였다(국회의원을 지낸 박종태, 전남대 총장을 지낸 박하욱씨가 그 후손들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들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한편으로 기·고·박이라고 할 때 기씨를 제일 앞에 세우는 이유는 이 지역 사람들이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울러 광주 일대를 가리키는 광(주), 나(주), 장(성), 창(평)이라는 표현도, 원래는 나주가 제일 큰 동네여서 나, 광, 장, 창으로 불려져 왔는데 광주에서 고봉이 배출됨으로 인해 광주를 앞세우게 된 것이라고 고봉 후손들은 힘주어 주장한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봉이라는 한 인물이 이 지역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던 셈이다. 아무튼 기씨가 명문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고봉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현재 기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봉 기대승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기씨 집성마을 중 하나가 광주시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마을이다. 광곡은 한자 이름이고 우리말로는 ‘너브실’이라고 부른다. 동네 앞에 나주평야의 일부분인 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서 너브실이다. 너브실 50여 가구 중에서 몇 집만 빼놓고는 모두 기씨들이 살고 있다.
너브실의 기씨 집성촌
너브실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奇世勳, 1914∼현재)박사의 고택이다. 애일당(愛日堂)이라 불리는 이 집은 고봉의 6대손인 기언복(奇彦復)이 숙종 때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봉 사상을 연구하는 ‘고봉학술원(高峰學術院)’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집 바로 옆에는 고봉의 아들이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거처했던 칠송정(七松亭)이 있고, 집 뒤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고봉의 묘지가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고봉이 죽기 전까지 수양하면서 공부하던 암자인 귀전암(歸全庵) 터가 남아 있다.
또 너브실 중앙에는 고봉을 추모하는 서원인 월봉서원(月峯書院)이 있고, 월봉서원 오른쪽에는 구한말 때 기씨들이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당인 귀후재(歸厚齋)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너브실에는 고봉이 공부하던 암자에서 묘지, 서원, 서당, 학술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는 셈이다. 고봉의 탄생지는 너브실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신룡동(新龍洞)이지만, 고봉 관련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너브실이고, 그 중심에 기세훈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기세훈 고택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300년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전통의 무게와 자연의 향취가 조화를 이룬 집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고택은 우거진 대밭과 소나무 그리고 각종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아늑함을 준다. 그 아늑함을 대하니 미국의 베벌리 힐스가 생각난다.
몇 년 전 LA 베벌리 힐스의 저택들을 둘러보면서 널따란 대지에 각종 꽃나무와 수목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장면들이 인상깊었다. 집이면서 동시에 수목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풍겨 나오는 이국의 꽃향기와 나무향기들이 도로 옆까지 적시고 있어서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베벌리 힐스의 향기 어린 집들을 맛보는 순간 뇌리를 스쳤던 것은 ‘나도 돈 좀 벌어야겠다’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베벌리 힐스에는 역사와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무게는 없었다는 점을 꼬집고 싶다. 분명 베벌리 힐스의 저택들은 아름답지만, 역사의 신산(辛酸)에서 우러나는 인문학적 지층(地層)이 쌓이지 못함으로 인해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사람이 지나치게 들뜨면 십중팔구 향락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향락을 목표로 한 집은 바로 졸부의 집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통의 무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자연의 향기가 결여되어 있으면 박물관에 사는 것 같은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세훈 고택은 양자를 모두 갖춘 집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