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선생은 살아생전 ‘난(蘭)’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한편 유교는 “지초(芝草)와 난초는 숲 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군자는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고 가르쳤다. 예로부터 사군자의 하나로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아온 난은 흔히 군자나 선비, 은자에 비유되며 우리 문화에 그 향기를 면면이 전해왔다.
한편 우리나라 재생(再生)신화인 마야고(摩耶姑) 신화에는 ‘풍란’의 유래가 담겨 있다. 지리산의 성모신(聖母神) 마야고가 사랑하는 반야(般若)를 위해 옷을 지었는데, 반야가 쇠별 꽃밭으로 가버리자 화가 난 마야고는 반야를 위해 지은 옷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 실오라기가 바람에 실려가다 나무에 걸려 자란 것이 풍란이 되었다고 한다.
풍란은 동양란에 속하는데 난은 자생지에 따라 크게 동양란과 양란(서양란)으로 구분된다. 동양란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주로 아시아의 온대지방에서 자생하는 난초과 식물을 일컫고, 양란은 열대와 아열대에서 자라는 난초과 식물을 통틀어 일컫는다. 양란은 원래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지만 일찍이 유럽으로 건너가 수많은 품종개량이 이루어진 까닭에 ‘양란’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동양란으로 춘란·한란(심비듐속), 석곡(덴드로븀속)과 풍란(네오피비티아속)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양란은 카틀레야(Cattleya), 시프리페듐(Cypripedium), 덴드로븀(Dendrobium), 심비듐(Cymbidium), 온시디움(Oncidium), 밀토니아(Miltonia), 팔레놉시스(Phalenopsis), 반다(Vanda) 등이 있다. 이들 양란의 종류는 현재 세계 난 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있다.
방을 휘감는 난의 향기
난에 얽힌 고사나 전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올 만큼 난초의 자생지는 양극 지방을 제외하고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해 있다. 한국조직배양연구소 유인서 소장에 따르면 자생란을 포함해 현재 전세계적으로 7만여 종의 난이 등록돼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품종개량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등록되지 않은 난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종에 이를 정도로 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한국의 자생란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40여 속 10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
난을 조직적으로 배양해 신품종을 개발하는 유인서 소장같은 사람. 즉 난을 직접 기르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애란인’ 또는 ‘난우’라고 부른다. 이들이 뭉쳐 만든 애란회 또는 난우회는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이름으로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각 동호회의 회원 수 또한 적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의 꽃말이 ‘미인’이듯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인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난에 빠져들고 한번 심취하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난과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조금 넘었다는 이희배(농협 둔촌동지점장·농협난우회 회원)씨가 난에 빠지게 된 것은 향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협 평직원으로 근무할 때 제가 근무하던 지점의 지점장님이 난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 분 방에 들렀는데 창가에 놓인 난 화분에서 풍기는 꽃 향기가 방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관음소심’이라는 중국 난이었는데 지금도 그 향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난의 향기에 매료된 그는 난 전문가로 소문난 난우회 선배를 소개받아 술을 사주면서 장장 3시간에 걸쳐 난에 대해 배웠다.
“얘기 도중 선배가, 아무리 노력해도 난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자기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말에 오기가 동해서, 5년 후에 제가 선배님을 실력으로 따라잡겠다고 큰소리쳤지요.”
이씨는 집 베란다를 온실로 꾸며 한란과 춘란 등 600분을 기르고 있다. 그는 “난을 통해 참을성과 인내를 배운다”면서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난의 세계”라고 말했다.
“어떤 난우를 통해 들은 얘기인데, 부산에 계시는 스님 한 분이 난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을 키우다보니 소유욕이 발생하고, 어느 날 문득 스님이 깨달았다는 거지요. 난에 자신이 잡혀 있다고 말입니다. 그 길로 스님은 기르던 난 분을 하나도 남김없이 난우들에게 나눠주고 아예 난과 인연을 끊었다고 합니다.”
자신처럼 난에 빠진 사람한테는 그 스님의 행위가 해탈로 보인다는 이씨도 난이 자신을 구속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겨울여행에서 돌아와보니 난이 여러 개 죽어 있었습니다. 애들에게 베란다 문을 시간 맞춰 여닫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만 깜빡해서 동사했던 겁니다. 그후로 지금까지 절대 부부동반 겨울여행은 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난이 저를 구속하는 경우가 많아 벗어나야지 하면서도 아직 스님처럼 해탈이 안됩니다. 가슴에서 난을 피우고 지우면서 난을 닮아가려 하는데 수양부족인지 어렵습니다.”
경남 마산 한우리난우회 총무 이춘호 씨는 17년 동안 난을 길러왔다. 현재 300분의 난을 기르고 있는 그는 “언뜻 보아서는 비슷한 것 같지만 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성이 다 제각각입니다. 난마다 꽃과 잎의 무늬가 하나하나 다 다르기 때문에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몇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무아지경에 빠집니다”라고 고백한다. 야생란을 캐기 위해 전국의 산으로 ‘탐란(난 탐사)’을 다니다 몇 번 ‘공탕(허탕)’ 끝에 최초로 난 하나를 캤을 때, 그는 캐온 난을 심어놓고 밤새 지켜보며 술을 마셨다.
“아마 그 기분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희국(대구난협회 회장)씨는 집에 온실을 만들어 500여 분의 난을 기르고 있을 정도로 난 애호가다. 그는 특히 한국의 자생 춘란에 푹 빠져 있는데 그 가운데 변이종에 특히 매료되어 있다.
“난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변이종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신아(새싹)가 올라올 때 그 꽃과 잎의 무늬나 색깔, 모양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대충 짐작하더라도 다 자랐을 때 뜻밖의 변이종이 생겨나 화려하게 변신하는 걸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임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가장 고고한 아름다움이며
환희의 새봄을 여는
청아한 5월의 아침나절에
봄을 안고 걷는
아리따운 여인의
감미로운 미소여서
인생의 풍요로움과
향기로움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가고픈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어라
‘난 박사’로 불리는 경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원예학과 정재동 교수는 ‘난지예찬(蘭芝禮讚)’과 여러 권의 난 관련 책을 낼 정도로 우리나라 야생란의 대가다. 정교수는 대학시절 전공시간에 식물조직배양을 하다 난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조직배양실험을 할 때 재료로 난이 많이 쓰였습니다. 실험 때문에 자주 접하다 보니까 이걸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30여 년간 난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현재 야생란 10여 종과 품종별 춘란 50여 종을 기르고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심산유곡에 터를 잡고, 천년을 두고 누구하나 찾아들지 않아도 몸가짐 하나 흐트리지 않고 우려 품어내는 그 기품의 뜻을 어찌 알겠냐는 말로 난의 매력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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