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정사 전나무 숲의 설경.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전나무 숲을 ‘오대산 전나무 숲’이라고 부르지 않고 ‘월정사 전나무 숲’이라고 한다. 이는 월정사나 오대산을 찾는 이들의 뇌리에 월정사 들머리의 전나무 숲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각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계곡 건너편에 새 도로가 생기기 10여 년 전만 해도 월정사나 상원사로 향하던 모든 자동차는 이 전나무 숲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월정사는 물론이고 오대산을 찾는 방문객들도 울창하며 장대한 전나무 숲의 신비로운 풍광을 가슴에 담고 갈 수밖에 없었다.
월정사는 아름다운 전나무 숲 못지않게 이 땅에서 가장 넓은 절집 숲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면적이 여의도의 7배인 5800여ha나 된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임야 조사와 광복 이후 단행된 농지개혁 등으로 인해 줄어든 면적까지 감안하면, 원래는 이보다 훨씬 넓은 면적의 산림을 보유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월정사는 어떻게 이처럼 넓은 면적의 숲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실마리는 상원사와 세조 임금의 인연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해 그 잘못을 참회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서를 간행하는 한편, 상원사 중건 불사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인연으로 상원사를 방문한 세조는 두 번의 이적(異蹟)을 경험했는데, 하나는 피부병을 앓던 그가 상원사 계곡에서 몸을 씻을 때 문수보살을 친견한 덕에 지병을 고친 사연이고, 다른 하나는 법당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불상 밑에 숨어 있던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게 한 고양이에 얽힌 사연이다.
세조가 하사한 묘전(猫田)
고양이 덕에 목숨을 구한 세조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고양이를 위해 상원사 사방 80리의 땅을 묘전(猫田)으로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하고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조가 자신의 어의(御衣)를 걸어둔 관대걸이는 상원사 초입 계곡 옆에 놓여 있으며, 또한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는 석상(石像)이 되어 상원사 문수전 앞을 지키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곳곳의 사찰림의 유래를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갖고 돌아와서 창건한 가람이다. 창건 이후 1400여 년 동안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불교 성지로, 또 수많은 고승대덕의 주석처로 불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월정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큰 화재로 소실되었고, 6·25전쟁 중 1·4후퇴 때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해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은 물론이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함께 소실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 오늘날은 적광전, 수광전, 설선당, 대강당, 삼성각, 심검당, 용금루, 요사채 등을 갖춘 대가람으로 복구되었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세조가 친필로 쓴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 등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월정사 사찰림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땅의 절집 숲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니다. 1600년이나 되는 불교 전래 역사처럼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다. 사찰림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이나 고려시대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아 산중에 조성된 산지가람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숭유억불이 엄격하게 시행된 조선시대에 절집은 정치적·사회적 핍박을 피해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산중(山中) 사찰’로 정착됐고, 산사 주변의 숲은 자연스럽게 사찰림으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