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인간은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괴테 ‘파우스트’

  • 김연경│소설가 koshka1@hanmail.net

    입력2011-01-21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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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우스트’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대작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노학자 파우스트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방황하다가 결국 파멸하고 단죄를 받는다.
    • 신의 자리를 넘보았던 파우스트의 도전과 모험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인간은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독일의 대문호 괴테

    ‘괴테’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거인’이다. 독일의 대문호이자 광물학, 식물학, 색채론 등을 연구한 과학자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을 지낸 정치 관료였으며, 평생 뜨거운 열정과 지적 호기심을 불태웠던 인간. 83년에 걸친,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거의 두 사람 몫에 가까울 만큼 길었던 그의 인생은 실로 빈틈없이 촘촘했다. 좀 과장하면 미처 늙을 틈도 없을 만큼 영원토록 생기로운 인간이었다고 할까.

    그런 만큼 그를 둘러싸고 많은 연애담이 떠도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칠순을 넘긴 나이에 10대 소녀에게 청혼한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경우조차 ‘주책’이라는 말보다는 노쇠조차 죽이지 못한 그의 열정과 평온한 자신감, 또 우아한 표현법(청혼!)이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말하자면 괴테만이 갖고 있는 아우라, 즉 ‘귀족스러움’이다. 청년기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 혹은 그의 표현법대로 ‘낭만적인 것’(=병적인 것)에도 전혀 훼손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마저 포용하는 엄정함 같은 것(‘고전적인 것’) 말이다.

    하지만 제법 역설적인데, 괴테는 뿌리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의 증조부는 하층 시민계급(대장장이) 출신으로 근면과 노력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조부는 재단기술자에서 시작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고급 부티크와 일류 호텔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괴테의 아버지는 당대의 전형적인 상류 교양 시민 계급의 삶을 영위했으며 교육열과 문화적 열망이 높았던 듯하다. 그 밑에서 괴테는 근면성실, 목표지향적인 생활, 노동과 휴식의 구분 등 시쳇말로 중산층의 생활 윤리를 몸으로 익히며 자랐다. 이런 그에게 문학이 왜 필요했을까.

    괴테에게 문학은 상승 욕망, 즉 일종의 야망 내지는 포부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은 괴테 개인의 욕망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발전 속도가 더뎠던 독일의 민족적 열등감과 맞닿아 있다. 그의 성공은 곧 독일의 성공이다. 괴테 덕분에 독일문학이 비로소 영국문학의 셰익스피어와 같은 존재를 갖게 됐고 서유럽 문화의 중심에 나설 수 있었다.

    괴테의 대표작인 ‘파우스트’는 그가 24세 되던 해인 1773년 시작해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 완성한 방대한 극작품이다. 아무래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는 르네상스 이래 근대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된, 인간 중심의 신화(神話) 확립에서 찾을 수 있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노학자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 행위의 기저에 깔린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생존했던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반쯤은 신화나 전설처럼 인기를 모았고 그 얘기를 다룬 문학 텍스트도 여러 편이 나왔다. 그중 유독 괴테의 ‘파우스트’만이 문학사의 냉엄한 심판을 거쳐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악마를 보는 까닭

    “인간은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15~16세기 파우스트를 다룬 여러 편의 문학 텍스트가 있었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만이 살아남았다.

    밤, 아치형 천장으로 둘러싸인 고딕식 방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탄식한다.

    “아! 나는 철학도, /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 ”(괴테, ‘파우스트’ 1권, 정서웅 옮김, 민음사, 2010, 29쪽)

    연금술까지 익혔으나 새로운 환멸을 안겨줄 뿐이다. 마법의 힘을 빌려 지령을 불러보지만 소용없다. 좌절한 파우스트는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때마침 들려오는 부활절 찬송가 소리에 입에서 잔을 떼긴 하지만 그의 우울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비극: 제 1부’를 여는 이 노학자의 고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경우 파우스트는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지식의 극점이나 미의 극점은,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파우스트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자살하지 않고 삶을 조금이라도 더 유예하려고 한다면 역시나 ‘어둠’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의 문법이라면 각종 정신병이나 광기가 나올 테지만(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는 정신분열 상태에서 파우스트처럼 악마-분신을 만난다) ‘파우스트’에서는 악마가 작품 속의 실제 인물로서 등장한다. 더욱이 중세말의 분위기를 십분 반영하듯(‘악마’란 ‘악’에 대한 기독교의 강박적 불안의 산물이다) 악마의 형상은 무척 구체적이고 변신의 방식도 다채롭다.

    귀여운 검정 삽살개의 모습을 한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고뇌하는 노학자 사이에 계약이 성립된다. 파우스트의 입장에서 요약해보면 이렇다.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내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하면,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1권, 96쪽) 나의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는 것.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은 멈추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 즉 “고통스러운 향락, 사랑에 눈먼 증오,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와 같은 모종의 “도취경”(1권, 98쪽)이다.

    앞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본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그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라는 성경 문구를 독일어로 번역하며 ‘말씀’ 때문에 고민한다. 결국 그는 ‘말’도, ‘뜻’도, ‘힘’도 아닌 ‘행위’를 가장 적합한 역어로 선택한다. ‘말’(=논리=학문)에 대한 염증, 그와 나란히 ‘행위’(=삶)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삶이, 더욱이 악마에게서 선사받은 삶이 펼쳐진다. 기대해봄직하다.

    그러나 정작 파우스트의 모험은 악의 심연을 엿보고 싶은, 심지어 그 밑바닥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별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상징과 알레고리, 신화적인 요소의 범람, 집필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구성적 단절, 운문 장르의 특성상 불가피한 지나친 비약과 암시 등은 일차적인 독해조차 어렵게 한다.

    실상 파우스트가 악마를 보는 까닭은 많은 부분 그가 신의 자리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욕망조차 악마를 통해 그를 유혹해보고자 했던 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의 실체와 악의 향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마마저 지배하는 신의 존재, 악마저 포용하는 선의 힘을 강조한다. 이런 전제하에 파우스트가 체험하는 삶을 살펴보자.

    그레트헨 비극

    “인간은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오른쪽)와 실러의 동상.

    메피스토펠레스의 인도를 받으며 파우스트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마녀의 집에 도착한다. 그곳, ‘마법의 동그라미’ 안에서 마녀의 약을 마시고 청춘을 되찾은 그는 곧이어 순박한 평민 아가씨 그레트헨(마르가레테)에게 반한다. 한편 그녀의 입장에서 젊고 잘생긴 귀공자 파우스트가 마음에 든 것은 당연한 일.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을 빌려 선물 공세를 펴며 그레트헨을 집요하게 유혹한다. 처음에는 이웃집 여인 마르테의 집에서 밀회를 갖던 그들은 점점 더 대담해져 그레트헨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레트헨은 파우스트가 건네준 수면제를 어머니에게 먹임으로써 본의 아니게 어머니를 죽인다. 나아가 순결한 누이동생의 ‘타락’을 알아챈 오빠 발렌틴이 파우스트 일당과 싸움을 벌이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훗날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의 말을 참조하면, 이후 그녀는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반쯤 미친 채로 감옥에 갇힌다.

    이것이 이른바 그레트헨 비극(‘초고 파우스트’라고 불린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신파극을 연상케 하는 이 시민 비극은 메피스토펠레스의 기획에서 보자면 죄악과 타락에의 유혹이다. 실제로 파우스트를 사로잡은 그레트헨은 귀족 아가씨도 아닐뿐더러 별로 미인도 아니다(“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 1권, 141쪽). 그러니까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악마의 묘약, 즉 약 기운에 취해 그녀에게 반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은유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단순한 육적 쾌감 이상의 것을 성취한다.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와 비극, 이것이 그가 열정의 시험에서 얻은 소중한 체험이다. 1부의 결말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5월1일 전야, 발푸르기스의 밤이 끝날 무렵, 파우스트는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을 발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책망하며 감옥에 잠입한다. 형리(刑吏)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있던 그녀는 파우스트-하인리히의 등장에 열광하지만 탈옥하자는 그의 권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망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들이 절 노리고 있을 텐데요. / 구걸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 게다가 양심의 가책은 어떡하고요? / 낯선 고장을 떠돌아다니는 건 또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요. / 결국 그들이 절 붙잡고 말 텐데! ”(1권, 246쪽) 보다시피 그레트헨이 도주를 거부하는 것은 비단 “양심의 가책”, 즉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든 그레트헨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는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에 ‘속죄하는 한 여인’이 되어 파우스트의 구원과 부활의 순간을 함께한다.

    한데 파우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레트헨을 향한 열정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일지라도 궁극의 지점은 아니다. 즉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열정의 비극은 말하자면 청춘의 상징인바, 청년 파우스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적어도 괴테의 관점을 빌리자면, 삶의 절정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장년과 노년을 거쳐야 한다.

    관료이자 가장으로서의 파우스트

    파우스트의 인생에서 장년과 중년에 해당하는 시기가 곧 ‘파우스트’의 2부 1~3막이다. 그는 여전히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여러 술수를 부려가며(가령 지폐를 만들어 뿌린다) 왕, 그리고 궁정 귀족 사회와 어울린다. 권태에 찌든 그들이 고대 신화 속의 헬레나와 파리스를 데려오라고 하자 그마저 얼결에 승낙하고 만다. 이에 메피스토펠레스는 자기는 ‘이교도’라서 직접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어머니들의 나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그곳에서 삼발이 향로를 훔쳐오면 된다는 것이다. 악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목적을 달성해 궁정 사람들 앞에 헬레나와 파리스를 대령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헬레나에게 반한 나머지 그녀를 구하겠다고(더 정확히, 질투에 사로잡혀 파리스를 제치고 헬레나를 차지하겠다고) 설치다가 파국을 맞는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폭발한 것이다.

    실신한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옛날의 실험실로 데려간다. 파우스트의 제자 바그너는 드디어 플라스크 속의 작은 인간(난쟁이), 즉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태어나자마자 말도 할 줄 아는 이 영특한 녀석은 곧 파우스트의 고뇌를 알아차리곤 그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즉 헬레나를 만나기 위해 함께 떠난다.

    한편 헬레나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돌아왔으나, 적국의 여자가 되었던 몸이기에 자신의 운명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포르키아스로 변신)는 바로 이런 심리적 공황 상태를 이용해 헬레나를 선동해 파우스트의 궁정으로 데려간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진 그녀는 파우스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때, 메넬라오스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선보인 트로이 전쟁이 괴테의 손으로 재창조된다. 전투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지는 않으나, 다음 부분에서 헬레나와 파우스트는 명실상부한 부부가 돼 있으며 아들(오이포리온)까지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문제다. 그는 부모의 사랑과 근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는 비상을 꿈꾸며 제멋대로 날뛰다가 결국 이카루스처럼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불길에 휩싸여 추락, 사망하고 만다. 이에 상심한 헬레나는 아들을 따라 죽는다. 그녀가 유품처럼 남긴 옷이 파우스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간다.

    대략 이렇게 요약되는 헬레나 비극은 ‘파우스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난해하고 어쩌면 지루한 부분이다. 신화와 알레고리가 현실 속에 너무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섞인 우주적 스케일 역시 혼란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단순화한다면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파우스트가 정부 관료로서, 궁정 사회의 일원으로서 모종의 시험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부각된다는 것. 둘째, 1부의 청춘의 열정 이후 보다 성숙된 사랑의 시험이 전개되고 그런 만큼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 진입한 파우스트의 가장으로서의 고뇌가 암시된다는 것. 두 가지 시험은 모두 악마와의 계약 범주에 드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비극으로 종결된다. 파우스트 입장에서는 새로이 몰입할 대상을, 시험의 대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세계 건설이다.

    세계 건설의 시험

    파우스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왕에게서 영토를 하사받는데, 그곳을 개발해 지상낙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애초부터 척박했던 이 해안지대에는 필레몬과 바우치스 부부가 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이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정성껏 대접한, 부부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한 노부부다. 이들이 왜 여기 있을까. 일찍이 파우스트는 궁정 사회에 자본을 도입하기도 했거니와 황무지 간척사업에 착수함으로써 근대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낙관적이지는 않다. 지상낙원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거침없이 개발이 진행되지만 그 때문에 노부부의 터전은 파괴되고 그들도 죽고 만다.

    한데 파우스트는 세속적인 권력욕을 은연중에 숭고한 인류애로 포장하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식의 승화 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근대 세계의 확립이 신화 세계의 와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양날의 칼과 같은 진리가 위정자-개발자 비극의 핵심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근심’으로 인해(회색 여인 ‘근심’이 입김을 불어넣고 가버린다) 눈이 멀어버린다. 그 순간에 그가 궁극의 지점에 다다른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다.

    파우스트는 해안지대에 수로가 건설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곤 곧 지상낙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꿈에 젖어 고양된 독백을 늘어놓는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2권, 363~364쪽)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 드디어 이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에 상당히 우스운 반전이 있다. 그를 감동시킨 소리는 수로가 아니라 무덤, 더욱이 파우스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소리였던 것이다. 정녕 파우스트가 죽음 직전에 다다른 저 황홀경은 자기기만이자 자기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의 영탄 역시 감정의 자연스러운 토로라기보다는 반쯤은 당위적인 요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파우스트는 이미 너무 늙어버렸기(괴테의 구상에 따르면 100살이다! )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삶은 없고, 따라서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외치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접수하기 위해 핏방울 계약서를 챙긴다. 하지만 그때 천사들이 등장해 야비하게(!)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악마의 몸은 욥의 몸처럼 종양 덩어리로 변하고, 파우스트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이자 기독교적인 결말인데, 이는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명시됐던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1권, 80쪽)이라고 소개한다. “소생은 항상 부정(否定)을 일삼는 정령입니다! / (…) / 당신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 요컨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 제 원래의 본성이랍니다.” 즉,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죄,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약의 욥기(1장 6~12절)를 괴테 나름으로 다시 풀어쓴 ‘천상의 서곡’은 대단히 노골적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신 앞에 나타나 불만을 토로하며 괜히 시비를 건다. 그러자 신은 파우스트를 가리키며 “나의 종이니라! ”(1권, 23쪽)라며 자랑한다. 그를 유혹해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도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1권, 24쪽) 얼마든지 건드려보라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권, 24쪽)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 역시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신과 계약을 맺고 떠나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신의 전지전능함은 물론 무한한 포용력과 사랑에 탄복한다. “때때로 나는 저 노인네를 만나는 게 즐거워. /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하지. / 위대한 주님치곤 너무 인정이 많아. / 나 같은 악마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해주니 말이야.”(1권, 25쪽) 과연 파우스트의 시험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패배로 끝나고 구원과 부활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세계와 인간의 모든 모순이 화해와 조화로 수렴된다는 믿음만큼 위안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공유할 수 없다면?

    ‘두 개의 영혼’의 투쟁

    파우스트의 몽상의 핵심은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의 절망은 아무리 버둥거려본들 결국엔 신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의 산물이다.(“나는 신을 닮지 않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1권, 48쪽))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기 전, 파우스트는 바그너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 가슴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권, 69쪽)

    상승의 욕망과 추락의 욕망, 신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이 한 인간의 내부에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는 만큼 방황하고 영원히 뭔가를 갈구하며 그것을 손에 넣고자 애쓴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2권, 381쪽)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며, 또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느님의 종’이길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즉 신이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악마와도 결탁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반항’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삶과 세계 앞에서 경외심을 가졌다(“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 대체로 괴테에게 신의 존재론적 지위는 절대적이다.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의 4부 제목대로 “신을 제외하고는 신에 맞설 자가 없다.”

    “인간은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金燕景

    1975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수료

    러시아 모스크바국립사범대 문학박사

    1996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前 경북대 연구교수 前 서울대 연구원

    現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소설가, 번역가

    저서: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미성년’ ‘내 아내의 모든 것’, 경장편소설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장편소설 ‘고양이의 이중생활’, 역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악령’ ‘우리 시대의 영웅’


    하지만 조만간 신의 절대성에 회의를 품거나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俗樂)이 판치는 날것의 현실이다. 그때도 온갖 신화와 알레고리와 천사의 합창을 들으며 구원을 외칠 수 있을까. 결국, ‘인간과 세계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가령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가 그러하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한 핵심이다. 강조하건대, 괴테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괴테의 생애와 파우스트의 생애가 어우러져 미묘한 울림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인물과 작가의 죽음 역시 공명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게 반쯤 억지로나마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하고 또 그를 구원한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가 임종의 침상에서 외쳤다는 한마디처럼. “좀 더 많은 빛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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