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박엔 신주류와 구주류 있다”
- “살얼음판 걷는 기분”
- “코드인사 없고 계파정치 없다”
- “인간의 문제 생각하는 정치”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의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
총선 이후 새로 국회에 입성한 인물과 수도권 출신 등이 친박근혜계 내부의 신주류로 등장하면서 졸지에 구주류로 인식되더라는 것이다.
“병풍 때문에 밥상이…”
A의원은 박 전 대표가 최근 본격적인 차기 대선행보를 시작한 시점에 사석에서 신주류 의원들에게 각을 세웠다. 그는 “병풍 때문에 밥상이 가린다”고 했다. ‘병풍’은 신주류 의원, ‘밥상’은 박 전 대표다. A의원은 또 “그들이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느냐”는 물음에 “대표 옆에 붙어 서서 카메라 기자들에게 사진 찍히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라고 했다.
친박계 B씨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국회의원으로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B씨는 요즘 “나는 비주류의 비주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경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은 주류인 친이계와 비주류인 친박계로 확연히 갈라졌는데, 자신은 친박계 안에서 비주류 취급을 받고 있다는 한탄이다.
A의원과 B씨는 지금도 간혹 박 전 대표를 만나서 정국현안이나 정책에 대해 조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부의 견제를 받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A의원은 “경선 때 이명박 공격수로 나서서 악역을 맡은 바람에 현 정권에 미운털이 박혀 있다. 그런데 친박계 안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한다. B씨는 2008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출마를 포기하고 야인으로 머물렀다. 지난해 6·2 지방선거 때는 광역단체장 출마를 시도했지만 해당지역의 친박계 중진 의원이 “박 전 대표의 뜻과 어긋난다”고 적극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접어야 했다.
A의원이나 B씨 같은 사례는 더 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 박근혜 캠프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전·현직 의원들에게서 “박 전 대표를 뵌 지 오래됐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지 않으냐”는 푸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친박계 울타리를 떠나지 않는다.
친박계 좌장이던 김무성 의원, 박근혜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진영 의원은 이례적으로 탈박(脫朴)을 감행했다. 이들이 떠난 이유 중에도 친박계 신주류와의 마찰이 있다고 한다. 김무성 의원은 세종시 파동 때 박 전 대표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가 친박계로부터 사실상 파문을 당한 뒤 친이 핵심부가 제시한 원내대표 자리를 받았다. 그는 원내대표 취임 직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박 전 대표와 사이가 멀어지는 과정에 친박계 일부가 관여했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다”며 여운을 남겼다.
원칙을 중시하는 박 전 대표와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해서 한때 ‘남자 박근혜’라고도 불렸던 진영 의원은 모 언론에 “나도 이젠 친박이란 울타리에서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다. “의원들 계파 성향을 분류할 때 나를 친박이 아니라 중립으로 해달라”고 선을 분명히 긋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박 전 대표와의 결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박 전 대표와 관계는 별로 소원해진 게 없다”고 덧붙인다. 박 전 대표의 주변 인사들 때문에 계파를 떠난 것이지 박 전 대표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의미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진영 의원이 박 전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으면서도 막상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한 친박계 일부의 반감이 심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2007년 전략 잘못 짜서…”
친박계 구주류에 대해선 2007년 전략을 잘못 짜는 바람에 대선후보 자리를 내준 책임이 있지 않으냐는 불신이 있다고 한다. 구주류와 신주류는 박 전 대표의 정치 행보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박 전 대표가 사실상 칩거 생활을 하며 간혹 이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울 때 구주류는 “이 정부의 성공을 돕는 것이 윈-윈 하는 길”이라는 직언을 자주 했다. 그러나 신주류는 “우리가 일일이 개입하면 오히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부담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친박계 내부에서 갈등이 나타날 소지가 있다는 점에 구주류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신주류는 손사래를 친다. 신주류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도대체 누가 신주류고 누가 구주류라는 말인가. 없는 것을 만들어 분열을 조장하려는 것은 대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편 가르기”라는 반응을 보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장.
그러나 친박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일부 사람들은 분명히 갈림 현상이 있고 이 부분은 박 전 대표가 앞으로 교통정리를 해야 할 부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직까지 ‘친박계 내홍’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도처에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최근 친박계에선 제3의 세력이 형성되고 있는 조짐도 감지된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18대 총선에서 친박계를 표방해 여의도에 입성한 일부 초선 의원들이 별도의 모임을 갖고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몸을 던지고 있다. 이들은 박 전 대표의 이미지, 남북대치 상황, 개헌론에 대한 견해를 보고서에 담아 제출하거나 직접 만나 조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표가 의지하는 원로그룹도 막후에서 활동 중이다. 제3공화국 때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용환 전 의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조선일보 부사장 출신인 안병훈 기파랑 이사장 등이 핵심이라고 한다. 또 차동세 전 KDI 원장,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 등도 정책자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세종시 수정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한 원로급 인사는 현장에 내려가 여론을 듣고 박 전 대표에게 전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의원총회 모습.
월박(越朴)을 감행하는 그룹도 있다. 박근혜 대세론이 확산되자 그동안 눈치를 살피던 친이명박계나 중립지대에 있던 의원들이 박근혜 진영으로 넘어오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한구 의원이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원래 친박인 ‘원박’과 대세론을 타고 넘어온 ‘월박’ 사이에 미묘한 흐름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본다. 친박계의 다극화가 진행될 수 있는 양상이다.
원박, 월박…다극화 예고?
박 전 대표의 참모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12월27일 발기인대회를 연 국가미래연구원은 정책자문을 해오던 대학교수들을 주축으로 출범했다. 이 연구원의 출범 과정은 친박계 내에서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 박 전 대표까지 참석하는 발기인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미리 안 친박계 의원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대회 전날 신문보도를 보고 뒤늦게 안 뒤 부랴부랴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이 때문에 일부 친박계 의원들은 “아직 분위기가 채 조성되지 않았는데 국가미래연구원이 무슨 목적이 있는지 치고 나가는 바람에 정치적인 오해의 소지가 생겼다”고 했다. 그동안 정치권 외곽에서 때를 기다리던 비선(秘線)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2007년 경선 캠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발기인대회가 열린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친박계 모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그 사람들이 돌격대냐. 학자들을 앞세워서 어쩌자는 말이냐”고 했다. 전화를 받은 의원은 “사실 나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다른 친박계 의원은 “국가미래연구원은 여러 정책개발시스템 중 하나일 뿐이다. 그날 현장에서 처음으로 대표와 인사를 나눈 회원이 많았다”라며 “싱크탱크를 대표하는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국가미래연구원이 박 전 대표에게 정책자문을 하는 여러 그룹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박 전 대표가 직접 참석한 자문그룹 공개 행사가 친박계 핵심 의원들도 모른 채 진행됐다는 건 여러 해석을 낳게 한다. 아직은 범(汎)친박 진영이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07년 박근혜 전 대표와 박사모 등 팬클럽이 응원메시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당시 ‘이회창 총재’를 지지하는 모임이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이들은 대세론에 취해 당장의 대선보다 대선 이후의 자리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이회창 후보의 눈에 들기 위해 그를 제왕적 대선후보로 떠받들었다. 이런저런 전략적인 무리수도 뒀다. 캠프 내부의 알력도 극심했다. 일찌감치 충성경쟁이 벌어졌고 참모들 사이에 서로 음해하는 일도 벌어졌다. 결과는 두 차례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친박 진영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전 대표는 ‘이회창 총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박 전 대표가 계파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한다. 2007년 대선 경선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의해 한나라당 내에 친이계, 친박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박 전 대표가 계파 의원들을 통제하고 줄 세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혁의 측면에서 진일보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 친박 의원은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다소 삐걱거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한때 소외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표면화되거나 국민 정서에 반하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 수준은 아니다. 친박 진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여기에선 일사불란한 계파정치가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의원은 “다만 사실과 다른 소수의 견해가 불필요하게 부풀려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친박 진영의 사람들이 모두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박 전 대표의 다른 측근 인사는 박근혜 정치의 특성으로 ‘코드인사의 배제’를 꼽는다. 이 인사의 설명이다.
“지역·정파 편중 없다”
“노무현 정권 집권기간 소위 ‘코드인사’가 기승을 부렸다. 자기 코드에 맞는 사람만 골라 쓰겠다고 공공연히 천명하기도 했다. 이것은 국민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코드 인사는 정파적 편향에 가깝다. 우리 정치는 여기에다 지역적 편향 인사까지 관행화하고 있다. ‘특정지역 편중인사’는 우리 정치의 오랜 폐습이다. 박근혜의 정치에선 이러한 코드인사, 특정지역 편중인사가 사라질 것이다. 박 전 대표의 확고한 신념이다. 박 전 대표는 ‘누가 그 일에 적임자인가’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이번 국가미래연구원의 인적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이 인사에 따르면 국가미래연구원의 원장인 김광두 교수는 호남 출신이다. 일부러 안배한 것은 아니지만 78명 구성원의 출신지역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정치성향에서도 노무현 정권 출신 인사, 이명박 캠프 출신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친박 진영에선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의 대통령도 ‘특정지역 편중인사’의 굴레를 피해가지 못했다. 만약 박 전 대표가 집권에 성공한다면 그는 ‘지역 편중인사’ 논란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정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2006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규칙 제정을 특별한 친분이 없는 홍준표 의원에게 맡겼다. 홍 의원은 당시 박 전 대표의 경선 라이벌인 이명박 시장과 더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대표 시절 여러 차례 당직 인사를 했지만 특정지역이나 특정계파 편중 시비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2004년 총선 공천을 공천심사위원회에 완전히 일임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임혁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2008년 5월 ‘신동아’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가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의 선전을 이끌어내고 이후 선거에서도 연전연승한 것은 그가 공천혁명과 당 개혁을 통해 차떼기 당 이미지를 벗겨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진보진영도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진보도 본받아야 할 리더십”
양승함 연세대 정외과 교수는 박 전 대표의 용인술과 관련해 “박근혜 리더십은 이명박 리더십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이익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로 접근한다”고 평가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정치를 대하는 방식은 기존의 정치인과는 차별화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대선 경선 캠프가 꾸려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박 전 대표가 차기 대선 경선을 앞두고는 어떠한 용인술을 발휘할지, 과연 정치개혁과 경선 승리를 모두 거머쥐게 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