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문 안의 빌딩군을 한꺼번에 감상 할 수 있는 봉수대는 남산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어서 진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필수 코스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이 여기 있습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쩔 수 없어 여러분 앞에서 저의 사랑을 외쳐봅니다. 당장은 당신이 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과 함께 영원한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그 청년은 말을 마치고 나서 미리 준비한 꽃을 그녀에게 바쳤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그 청년의 순수함과 당당함에 갈채를 보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남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무렵 남산타워 아래 ‘사랑의 자물쇠’라는 것이 등장했다. 연인들이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매다는 것인데, 수천개가 넘어 오히려 경관을 해치게 되자 당국이 자물쇠를 모아 트리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우리 사랑 영원히’. 사랑의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는 저 멀리 던져 버린다. 그리고 ‘인증샷’. 연인들이 자물쇠 앞 뒷면에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음과 다짐을 번갈아 쓰며 즐거워하고 있다(아래).
어떤 장소가 명소가 되려면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한다.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문화코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출을 보러 가는 행위, 돌탑을 쌓는 행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행위가 그런 사례다.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이런 일상적 행위는 뒤에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 그래서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공간이 된다.
남산이 왜 ‘사랑의 공간’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직접 그 정취를 맛보면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산에선 서울 강남과 강북의 주요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석양이 질 때면 여의도 63빌딩이 반사한 붉은빛이 한강에 떨어져 물빛은 금빛으로 변한다. 석양과 함께 도시의 건물에 하나 둘 불이 켜지면 낮에 보였던 도시의 분주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낭만적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하늘의 별들이 땅에 내려앉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 같다. 천상의 지리학이라 할까.
서울 남산은 한양의 안산으로 목멱산 또는 잠두봉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어디서나 남산이 보이고, 남산에 올라가면 서울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봉수대가 조성됐다.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독창적 조선 화풍인 진경산수를 창시한 정선은 목멱산을 단골주제로 삼았는데, 그의 ‘목멱조돈(木覓朝暾)’에는 이른 아침 남산의 기상과 선비의 유유자적함이 담겨 있다.
아쉽게도 오늘날의 남산은 이전 모습과 많이 다르다. 1972년 들어선 N서울타워(남산타워)로 인해 그 경관이 크게 바뀌었다. 서울 시내에서도 높은 건물들 때문에 남산을 한눈에 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남산의 정취는 여전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호연지기를 심어줬던 남산은 어느덧 사랑의 신화가 펼쳐지는 공간으로 바뀌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