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문명의 충돌과 교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 문명의 미래는 무엇인가.
-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조우한 예수와 공자,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주여성의 문화충격까지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에피소드 열네 꼭지를 독자께 차려 올린다.
-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유럽의 기원 격인 켈트족 이야기를 준비했다.
- 문명의 교차로를 뚜벅뚜벅 걸어가보자.
켈트족이 범유럽적 정체성의 담지자로 주목받고 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유럽 중부와 서부에 살았던 켈트족이 선사시대에 이미 유럽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면서 통일된 문화적 전통을 이룩했던 집단으로 새롭게 조명받았다. 즉 우리가 흔히 단군과 고조선으로부터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듯이, 당시 유럽 통합을 주도하던 정치 세력들은 켈트족에게서 오늘날 모든 유럽인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1992년 베니스에서는 ‘켈트족, 유럽의 기원(The Celts, the Origins of Europe)’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렇듯 켈트족은 찬란한 선사 문화를 이룩한 주체이자 범유럽적인 정체성의 담지자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들 대부분이 가진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켈트족이라고 하면 대개 로마를 약탈한 미개 집단, 벌거벗은 채 파란색 물감을 뒤집어쓰고 전쟁을 하던 야만인, 혹은 만화 ‘아스테릭스’에 나오는 술 잘 마시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전사 등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켈트족은 그리스·로마의 문명 세계와 적대 관계를 맺었던 야만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켈트족에 관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켈트족은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문명 세계의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도 켈트족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으며, 특히 켈트족이라는 비(非)문명화된 타자(他者)를 통해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되돌아보았다. 즉 켈트족과 문명 세계는 단순히 충돌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했던 것이다.
벌거벗은 야만人
켈트족의 철기시대 유적.
기원전 1900년경, 지중해 동단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이 발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 본토의 남쪽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이 나타났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성장하면서 그리스 지역은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 중심지로 거듭났다. 크노소스 궁전이나 미케네 성채 등에서 나온 풍부한 양의 유물이 이를 입증해준다. 그리스인은 지중해 지역의 자원을 거침없이 소비했고, 지중해 지역 내에서 충당할 수 없는 물자는 원거리 교역을 통해 멀리 떨어진 이방 세계로부터 들여왔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초기 단계에는 주로 동쪽, 즉 레반트 지역과 인더스 문명권과의 교역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 멸망하고 그리스 지역 내 소비가 증가하자 그리스인은 새로운 교역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지역 서쪽으로, 즉 중·서부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풍부한 청동 원료 때문이었다. 미노아·미케네 사회에서 청동기는 개인의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사용되었다. 즉 청동으로 된 무기류나 장신구를 통해 엘리트는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청동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원료인 구리와 주석은 지중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청동 원료가 풍부한 중·서부 유럽 지역과 교역하기 시작했다.
청동을 매개로 그리스 문명권과 접촉한 중·서부 유럽 집단들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수요로 인해 그리스 지역과 인접한 발칸 반도에서 많은 양의 청동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광산에서 구리를 캐는 작업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노동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노동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의 구리 광석을 채굴하던 예전과 달리, 노예 노동력에 의존해 구리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으로 중부 유럽 지역의 청동 생산 시스템의 규모는 확대되었으나,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이면엔 구리 채광을 전담하는 노예 계층 형성이라는 어두운 현실이 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노예 계층의 형성은 위계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은 중·서부 유럽 교역망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또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중·서부 유럽에는 벌써부터 광범위한 교역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교역망을 통해 중부와 남동부 지역의 청동기가 대서양 연안, 북부 스칸디나비아 지방, 발트해 지역 등으로 전해졌고, 그 대가로 지급된 호박석이나 모피가 다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교역망의 각 지점에는 외국산 제품과 현지 물품 교역을 관장하는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특권을 기반으로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게다가 이러한 기존 교역망에 그리스의 원거리 교역이 가세하면서 교역 물량이 늘어났고, 그 결과 교역을 조직하던 집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다. 또한 교역을 관장하던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선진 문물을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자신들과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을 더욱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의 엘리트 무덤에서 발견된 미케네 문명의 접이식 의자가 그러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교역망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차별화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戰士 문화
10세기 영국 웨일스에 도착한 켈트족 생활 모습을 재연한 모습.
철로 만든 제품은 청동기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철제 도구나 무기는 청동으로 만든 제품보다 더 단단하며 날도 더욱 뾰족하다. 그런데 철의 또 다른 특징은 원료인 철광석이 청동의 원료인 구리와 주석보다 더욱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그 매장량도 훨씬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동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범유럽적인 교역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철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원료를 이용해 생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의 집단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역 정치체(polity)들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은 이와 같은 지역 정치체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흔히 ‘족장 사회’ 혹은 ‘군장 사회’라고 부르는데, 켈트족 사회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은 중요한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켈트족 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앞서 언급했듯 철이라는 소재는 청동에 비해 확보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중부와 서부 유럽의 철기 시대 집단들, 즉 켈트족은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 농기구도 만들어 사용했다. 땅을 더 깊게 갈 수 있는 쇠로 만든 보습이나 수확을 더 용이하게 하는 철제 낫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청동기 시대보다 크게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성장은 켈트족 사회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었다.
‘아스테릭스’의 주인공 아스테릭스는 켈트족이다.
군사적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선 전장에서의 용맹을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전사의 삶을 추앙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켈트족 남성에게 전사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 조건이 갖춰지면서 켈트족 사회를 이루는 독특한 요소가 자리 잡았다. 먼저 눈여겨볼 만한 것이 그들의 ‘전사 문화’다. 켈트족에 관한 로마 기록들을 보면 지역 간 편차는 있겠지만, 상당수 켈트족 남성이 전사 집단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사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검이나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다녔다. 또한 켈트족 전사들의 무덤 발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전사의 모습을 갖춘 채 저승으로 갔다.
노예를 팔고, 술을 사다
켈트족 전사들은 줄곧 전투에 가담했다. 그런데 당시 전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투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즉 켈트족의 전투는 상대방을 완전히 복속하고 전멸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실제 전투라기보다는, 전사 집단의 전사적 정체성을 표출·재생산하고, 또한 전사 집단 간 힘과 우월함을 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인 경우가 많았다. 로마 기록에 이러한 켈트족 전투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전투에 가담하는 양측에서는 각각 한 명의 전사가 대표로 나와 싸움을 펼쳤고, 그러는 동안 나머지 전사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까지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기편의 승리를 응원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양한 물질문화와 퍼포먼스를 통해 과시하고 확인하는 것이 켈트족 전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켈트족 전사 문화의 이 같은 측면이 구현되는 또 다른 장은 만찬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켈트족 전사들은 위계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만찬 때 싸움 잘하는 순서로 자리에 앉았고, 고기를 먹을 때도 서열대로 먹었다.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옛 전투의 용맹스러운 기억을 회고했으며, 이웃 집단들과의 오래된 갈등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즉흥적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만찬이 실제로 약탈로 이어지는 예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왁자지껄한 만찬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다. 켈트족이 일상적으로 마신 술은 벌꿀을 발효한 미드(mead)와 맥주로, 둘 다 알코올 도수가 낮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선호한 술은 와인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던 가장 독한 술이자 보관하기 쉬운 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옛 켈트족 땅에서 와인을 생산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켈트족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와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지중해 세계에서였다.
켈트족에게 와인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들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다음, 잠시 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아테네, 스파르타 등과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기원전 8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도시국가들은 식민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식민지를 세웠고, 그곳에서 유럽 내륙의 켈트족 집단들과 교역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대표적 그리스 식민지가 오늘날의 마르세유인 마살리아(Massilia)다. 이 같은 식민지를 기점으로 그리스인들은 중·서부 유럽으로 와인을 공급했고 그 대신 모피, 햄, 주석, 노예 등을 가져갔다.
그리스인들에 이어 로마인들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켈트족 집단들에게 와인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켈트족이 얼마나 와인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와인을 얻고자 얼마나 쉽게 노예를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내에서는 노예 한 명당 대형 항아리 5~6개 분량의 와인을 받을 수 있었으나, 켈트족과의 교역에서는 노예와 와인 항아리를 일대일로 교환했다. 켈트족 집단들이 와인을 마시려면 노예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웃 집단을 약탈하고 그 주민을 노예로 삼았던 켈트족 전사의 행위는 자신들의 전사적 정체성을 과시하는 수단이면서 생활필수품 격인 와인을 확보하는 방편이었다.
켈트족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귀족 문화다. 켈트족 엘리트는 위세품 확보와 과시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고 재생산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귀족 문화에서 지중해 지역의 선진 문물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우선 켈트족 엘리트는 귀한 와인뿐만 아니라 그러한 와인을 우아하게 마시는 문화까지 지중해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라인강 상류의 빌징엔(Vilsingen) 유적과 카펠(Kappel) 유적 등에서 발견한 로도스 섬 양식의 주전자(Rhodian flagon)들이다. 주전자의 형태를 가진 이 청동제 술병들은 공중토론이 이뤄지던 와인 파티인 그리스의 심포지엄(symposium)에서 사용된 물품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한 용도의 용기가 켈트족 영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켈트족 엘리트가 그리스의 세련된 와인 음주 문화를 모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지역의 우아한 와인 음주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켈트족 엘리트의 의지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비(Vix) 유적에서 발굴한 대형의 청동제 술 단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크레이터(crater)라는 전문 용어로 불리는 이 용기는 만찬 석상에서 와인과 물을 섞을 때 사용했다. 켈트족 사람들이 와인을 물에 섞지 않고 그냥 마시는 바람에 쉽게 취하고 난동을 부린다는 그리스 저술가들의 기록을 떠올리면 이러한 크레이터의 존재는 더욱 흥미롭다. 높이 164㎝, 무게 208㎏인 이 술단지는 아마도 스파르타나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주문 제작했고, 그리스인들이 직접 운송해 와서 현장에서 조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켈트족 엘리트는 지중해 집단을 통해 더욱 멀리 떨어진 세계의 물품을 소개받기도 했다. 예컨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호크도르프(Hochdorf) 무덤의 주인인 켈트족 족장은 중국산 비단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옷을 입은 채 매장됐다. 또한 독일 내 다뉴브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호미헬레(Hohmichele) 유적의 제6번 무덤에 묻혔던 여성은 중국산 비단 띠로 장식한 매우 고급스러운 모직 원피스를 입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참고로 이 무덤은 기원전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곳에서 발견한 비단은 현재 유럽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비단이기도 하다.
켈트족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의 건축 양식도 받아들였다. 요새를 축조할 때 그리스 양식을 활용했다 .다뉴브 강이 내려다보이는 독일 호이네부르크(Heuneburg) 요새는 기원전 600~530년경에 아마도 그리스인 건축가 감독하에서 그리스 건축 양식에 따라 리모델링된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성벽은 규격화한 크기와 모양의 진흙 벽돌로 축조됐다. 또한 성벽 북면에는 장방형의 보루가 추가됐는데, 이것은 실제로 방어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요새 전체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자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뤄볼 때, 켈트족 엘리트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고자 지중해 세계의 물질문화는 물론 그 표현 방식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점령한 켈트족
위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켈트족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들의 본토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은 이러한 켈트족의 이주가 인구 증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으며, 고고학자들도 이러한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즉 본토 내에서 켈트족의 인구압이 높아지자 엘리트 전사들이 주민 일부를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주를 시작한 켈트족 무리는 이탈리아 반도가 있는 남동쪽을 향해 내려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은 그들이 이탈리아 지역으로 오게 된 것이 그곳의 우수한 자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예를 들어,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인 ‘박물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알프스 산맥으로 인해 갇혀 있던 갈리아인(켈트족)들이 (중략) 처음으로 이탈리아 내로 넘어오게 된 것은 헬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갈리아 출신의 시민 때문이었다. 수공업 장인이었던 그는 로마에서 살다가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갈 때 말린 무화과와 포도, 그리고 몇몇 종류의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가져갔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이러한 물품들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켈트족 전사를 묘사한 조각‘죽어가는 갈리아인’.
이에 분노한 켈트족은 결국 무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기원전 390년 7월18일 알리아 강변에서 로마 군대를 쉽게 물리친 다음, 해질 무렵에 로마에 도착했다. 이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로마 시민 대부분은 피난길에 올랐고, 몇몇 군인과 그 가족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켈트족이 자행한 살인과 방화, 도둑질과 약탈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학자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눈과 귀는 물론 생각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적군의 고함소리, 여성과 소년들의 비명소리, 화염의 포효, 집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점령했으며 결국 황금 1000파운드(약 450㎏)를 받고 떠났다고 한다. 켈트족의 약탈은 로마 시민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남겼으며,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수백 년 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한편 본토를 떠나 동쪽으로 향한 켈트족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 걸쳐 있는 카르파티아 분지에 도착했고, 기원전 4세기경에는 발칸 반도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무렵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켈트족 세계와 지중해 세계는 또다시 충돌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335년 알렉산더 대왕은 세 명의 켈트족 대표를 마케도니아에 있는 그의 궁전으로 불러 ‘우정과 환대의 협정’을 맺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한 토막 있다. 알렉산더가 켈트족 대표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자신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대답을 예상했던 알렉산더는 “잘난 척하는 놈들”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켈트족 집단과 평화가 유지됐다. 그러나 알렉산더 사후에 일어난 정치적 분란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이 약해지자 켈트족 집단은 다시금 마케도니아 영토를 호시탐탐 노렸다. 결국 기원전 280년 마케도니아로 침입한 켈트족 군대가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고 왕을 살해한 다음 그의 머리를 창에 꽂아 전시했다고 한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누리던 부에 이끌려 남하한 켈트족 집단도 있었다. 기원전 279년에는 켈트족 한 무리가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리스 군대를 물리친 다음 델피까지 내려갔다. 이들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을 성공적으로 약탈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폴론이 천둥과 번개, 지진을 일으켜 이들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약탈 사건은 로마의 약탈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또한 이는 문자로 기록돼 후대에까지 전해졌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야만적’인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마지막으로, 소아시아로 이주해서 켈트족 왕국을 세운 무리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비티니아(Bithynia)의 왕 니코메데스는 세 집단의 켈트족 부족을 초대해 이웃 왕국과의 분쟁 지역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이후 이 켈트족 집단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고원 지대로 옮겨가 갈라티아(Galatia)라는 왕국을 세웠다. 갈라티아를 거점으로 이들은 주변 왕국을 약탈하며 안락한 삶을 유지했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경,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가 지역에 있는 왕국들에 대한 켈트족의 약탈이 너무 심해지자, 그 왕국들의 맹주인 페르가몬(Pergamon)이 기원전 233년 켈트족을 소탕했다.
도둑질과 살육, 강간
지중해 세계 주민에게 켈트족과의 충돌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켈트족과의 만남을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선 켈트족 전사들은 지중해 지역 전역에 걸쳐 용병으로 고용됐다. 예컨대 기원전 369~368년에는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1세가 켈트족 용병 2000명을 고용해 동맹국인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이것은 아마도 켈트족 용병이 고용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마케도니아 계통의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도 기원전 277~276년에 4000명의 켈트족 용병을 고용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그들의 계획이 탄로 나자, 용병들은 나일 강 한가운데에 있는 무인도에 갇혀 굶어 죽거나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라티아 켈트족에게 약탈당한 소아시아의 왕국들도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을 보면 문명화한 지중해 세계와 켈트족 세계와의 충돌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폴리비우스, 파우사니아스, 리비우스와 같은 저술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인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는 로마공화국이 전성기를 맞아 켈트족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나가던 시기다. 따라서 이들은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화한 시스템이 어떻게 외부 집단을 물리쳐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즉 국가의 통제가 존재하는 지중해 세계의 이성적이고 문명화한 질서를 원시적인 켈트족의 야만과 혼란, 야생 등과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저술가들은 켈트족을 묘사할 때 특히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정반대되는 측면들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명 세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자 했으므로 켈트족은 존경할 만한 적수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미개한 고귀함(savage nobility)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켈트족을 다룬 당시의 미술 작품에도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갈리아인(The Dying Gaul)’은 켈트족 전사의 모습을 나타낸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 이 조각은 원래 위에서 언급한 갈라티아에 대한 페르가몬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 건축물을 장식했다고 한다(참고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이 작품을 베낀 로마인들의 모사품이다). 이렇듯 켈트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자 만든 작품인 만큼, 죽어가는 켈트족 전사의 모습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존경할 만한 적수의 면모다.
기원전 2세기 이후 켈트족의 위협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들에 관한 또 다른 이미지가 형성됐다. 알프스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한 로마의 정복이 완성될 무렵 그리스 저술가 포세이도니오스는 ‘역사’에서 이 지역의 켈트족에 대한 민족지적 정보를 전했다. 여기에서 그는 켈트족 사람들의 용감함과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친절 등을 특별히 높게 평가했다. 심지어 전쟁을 좋아하는 그들의 급한 성질을 치기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명사회가 아닌 이 미개한 켈트족 집단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자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황금의 시대’에 근접했다고 보았다.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 켈트족이 더 이상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자, 그들은 로마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존재로도 인식됐다. 예를 들어, 네로 황제의 통치하에서 활동하던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인 타키투스는 로마 지배층의 무능력함과 로마 사회 전반에 스며든 향락과 정신적 해이, 그리고 개인 자유의 소멸 등을 켈트족을 통해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다. 그는 ‘아그리콜라’에서 로마 군대에 맞섰던 영국의 켈트족 수장 칼가쿠스의 입을 빌려 로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세상의 약탈자들, 그들은 무차별적인 강탈로 땅을 고갈시켰으며 (중략) 도둑질과 살육, 강간에 ‘정부 통치’라는 거짓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들은 황폐함을 가져와 그것을 평화라고 한다.”
충돌의 時代
언론 매체와 관련 전문가에 따르면 우리는 오늘날 두 개의 거대한 세계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한쪽에는 알카에다, 탈레반 등으로 대변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국이 이끄는 서방 세계가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돌이켜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약 2000년 전에도 있었다. 즉 켈트족이 지중해 세계를 공격하자 이 충돌의 사건들은 자극적 이야깃거리가 되어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에 의해 기록됐고,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켈트족과 지중해 세계 사이에는 매우 오래된 교류의 역사가 있었고, 보다 중요하게는 상생의 관계가 있었다. 다만 이와 같은 사실은 ‘충돌’이라는 강력한 이미지에 의해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역사는 결국 자극적인 충돌의 사건들로 인해 자칫 간과하기 쉬운 공존과 협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이른바 ‘충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