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간주곡<br> 르 클레지오 지음, 문학동네, 321쪽, 1만3000원
나는 두 가지 비밀스러운 야심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언젠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 ‘조서’가 아주 성공작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소설은 지나친 신중성과 기교주의와 수다의 과오를 범했을지 모른다. 이 소설에 씌어진 언어는 탈현실주의에서 현학적 예언으로까지 폭넓은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훗날 정말로 감동적인 소설을 완성하리라는 것에 절망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나는, 스물세 살의 르 클레지오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는지, 군대에서 탈영했는지 알 수 없는 ‘아담 폴로’라는 떠돌이 청년을 니스 해변에 등장시켜 소설사에 전례 없는 ‘조서 형식’으로 세상에 투고(投稿)한 그의 첫 소설을 읽고 나서야 나도 ‘언젠가는 소설을 쓸 것’이고, 나의 첫 소설이 ‘신중성과 기교주의와 수다로’ 성공작은 아니더라도 ‘훗날 정말로 감동적인 소설을 완성하리라’는 각오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A.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 남자가 열린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등이 약간 굽었으며, 이름은 아담, 아담 폴로였다. 그는 거지처럼 구석진 벽에 몇 시간이고 계속 앉아서 햇빛의 반점을 좇고 있었다.
신중성과 기교주의와 수다, 한마디로 자의식 과잉의 소설이 한 작가의 데뷔작이 되었을 때에는, 주제와 형식이 단단하게 결합된 ‘완벽한 소설’-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같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이너마이트급의 폭발력과 흡입력을 내장하고 있게 마련이다. 패기와 치기가 넘치는 신인의 문장, 곧 화기의 문장이 그것이다. 그것은 신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특장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소설 속으로 육화되어야 하는 열기이자 그림자이고 장식음이다. ‘조서’ 이후 다른 명작들을 발표했지만 르 클레지오를 읽을 때면 언제나 스물세 살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로 돌아가고야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인의 패기로 르 클레지오는 자신의 첫 주인공에게 인류 최초의 남자 아담의 이름을, 그리고 그의 생존 조건을 정신병자, 혹은 탈영병이라는 현대인의 불안정한 상태로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미셀…(중략) 창 아래에 두 개의 의자를 놓으면 정오엔 길게 누워 태양 아래서 잠들 수도 있어. (중략) 4시경 만일 태양이 낮게 비치거나 비스듬히 비치면 난 몸을 더 길게 뻗곤 해. 그 순간에 태양은 창문의 3/4만큼에 걸리지. 난 그걸 바라보곤 해. 태양이 아주 둥글게 바다 위에, 다시 말해서 수평선 위에 똑바로 떠 있는 거야. 매 순간마다 창 앞에서 침묵을 지키며 나는 태양이 내 것이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해. (중략) 이상한 건 처음부터 아무도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었어. 난 친구가 별로 없었고, 여자들도 몰랐던 게 다행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나에게 바보 같은 짓은 이제 그만두고 도시로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같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라고 말할 게 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야.
1857년 노르망디 출신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소설사상 최초의 현대인으로 욕망의 화신 마담 보바리를 창조했다면, 또 1942년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의 가난한 청년 알베르 카뮈가 20세기 현대인의 전형 뫼르소를 창조했다면, 1963년 니스 출신의 혼혈 청년 르 클레지오는 아담 폴로를 등장시켜 소설사에 또 한 명의 새로운 현대인을 추가한다. 누구는 욕망 때문에, 또 누구는 태양 빛 때문에 생(生)을 죽음으로 바꾸어야 했다면, 르 클레지오의 이 청년은 태양은 자신의 것이라면서 세상 아무도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해변의 떠돌이 삶을 선택한다. 인류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예술적 실험이 끝난 20세기 중반, 더 이상 새로운 인간, 새로운 소설, 새로운 미학을 기대할 수 없는 시기에 처한 작가의 허무와 이후에 나타날 새로운 현대인의 삶의 형식을 르 클레지오는 이 작품을 통해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는 국가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중심과 주변의 개념이 전복되고, 언제 어디에서든 소통이 가능한 동시성의 시대다. 이는 어디에서나 글을 쓰고 송고가 가능한 노마드 작가 시대를 열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노마드 작가 군(群)의 선두에 르 클레지오가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결과다.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해 의혹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 존재하며, 그들 자신의 얼굴, 태도, 삶의 양식이나 기벽(奇癖)뿐 아니라 그들의 허망한 꿈, 희망, 손과 발가락의 모양, 눈과 머리카락의 색깔, 말투, 생각, 그리고 어쩌면 죽게 될 나이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이 우리를 통과하며 흔적을 남긴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가 흑인이기를 꿈꿔왔다. 아프리카에서 이 나라, 이 도시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이방인 이 되어 있었다.
아득해진 유년의 허기
소설가들이란 근원을 좇는 족속들이다. 우선 나 자신의 뿌리를 좇고, 나아가 종족의 뿌리를 좇고, 더 나아가 인류의 뿌리를 좇는다. 르 클레지오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모로코인 여성과 결혼한 뒤 프랑스와 미국과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을 오가며 살고 있다. 이러한 근원을 가진 작가란 프랑스라는 한 국가와 언어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인류사적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서’는 르 클레지오의 작가로서의 출사표, 곧 작가의 원점(초상)에 해당한다. 이 원점을 지탱한 두 개의 기둥이 있는데, 2004년에 한국에 소개된 ‘아프리카人’과 최근에 번역 출간된 ‘허기의 간주곡’이 그것이다. 전자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일생을 보냈던 영국인 아버지의 삶을 추억하는 글이고, 후자는 평탄한 어린 시절을 거쳐 전쟁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어야 했던 어머니의 삶을 ‘에텔’이라는 여성의 성장담으로 복원한 사모곡이다.
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 그걸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어린아이였던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미군 트럭들을 쫓아 도로를 달려가면서, 군인들이 기세 좋게 던져주는 추잉검, 초콜릿, 빵 꾸러미를 잡으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아이였을 때는 정어리 깡통에 든 기름을 마실 정도로 기름진 음식에 굶주려 있어서, 몸이 튼튼해지는 음식이라며 할머니가 떠주시는 간유를 숟가락까지 쪽쪽 빨아가며 핥아먹었다. 그리고 짭짤한 게 너무 먹고 싶어서 부엌에 놓아둔 식품저장용 항아리 뚜껑을 열고 거무튀튀한 왕소금을 자주 한 움큼씩 집어 먹었다.
소설의 첫 장을 펼치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20년 동안 내가 읽어온 르 클레지오의 문장이 맞는 걸까. 아니면, 그와 엇비슷한 연배로 전쟁과 가난을 원체험으로 지닌 한국 작가 황석영이나 김원일의 문장일까. 이렇듯 ‘허기의 간주곡’은 한국의 장년 이상의 독자들에게 익숙한데, 작가와는 달리 허기의 체험이 없는 나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 감동을 전해준다. 하나는 마치 인류의 자발적인 고아처럼 40년 가까이 세계를 떠돌던 작가의 펜 끝이 불러낸 헛것(주인공)이 자신의 기원인 어머니라는 점이고, 이 어머니를 환기하고 형상화한 장소가 한국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이 잉태된 것은 이화여대의 석좌교수로 한국에 체류하던 2008년 무렵이고, 그는 이 대학에서 제공한 사저에 머물며 이 작품 집필 도중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의 초청을 많이 받았고, 한국 작가들과 교류했으며,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정서와 교감했다. 그 덕분인지, 이번 ‘허기의 간주곡’은 이청준의 보석 같은 작품 ‘눈길’과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 감싸고 있는 어떤 세계를 연상시키고, 거기에서 만난 우리의 여인들, 어머니들의 초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니스, 오합지졸들의 도시, 브루엄 경 시절에는 영국인들의 무대였다가 러시아 황후와 마리 바슈키르체프 시절에는 러시아인들의 무대였던 도시, 태양과 시멘트질의 계곡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무심하고 잔인한 도시. (중략) 그날 밤의 기억을 에텔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여덟 살쯤이었고, 모드와 함께 ‘볼레로’의 초연을 보러갔다. 점점 부풀어 오르고 증폭되는 음악,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환호를 보내고 손뼉을 치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 이 소름끼치게 누추한 지하실에서 그 기억이 불쑥 떠올랐고, 건물 현관문을 나가 ‘시보드냐’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불현듯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세상 사람들이 한 번쯤 가보기를 꿈꾸는, 그러나 그곳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가 오합지졸의 도시라고 부른 니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차마 다 읽어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축조된 소설을 가슴에 안고 잠시 상상을 해본다. 고도성장의 이면에 전쟁과 가난의 상흔을 곳곳에 거느리고 있는 나라,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 수도 서울이 이 작가에게 이제는 아득해진 유년의 ‘허기’와 신산했던 ‘어머니’의 삶을 ‘간간이’, 그러면서도 되풀이되는 볼레로의 리듬으로 ‘격렬하게’ 자극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