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살(殺)처분됐다. 소와 돼지의 ‘홀로코스트’에
- 동원된 공무원, 수의사는 정서적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 구제역.
- 인간에게 재앙이 될 것인가. 살처분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가.
겁에 질린 눈망울. 충남 청양군 한 마을에서 소와 송아지가 살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수년간 성장세를 유지하던 국내 축산업은 이 일로 크게 후퇴할 것이 뻔하다. 구제역이 진정되더라도 축산업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역 축제 47건이 취소되고 일정이 미루어지는 등 지역 경제가 피해를 보고 있다. 구제역이 더 확산되면 물가도 오를 것이다.
축산 농민과 방역 담당자들의 고충도 심하다. 텅 빈 축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농민의 상실감, 살아 있는 가축을 죽여서 묻는 공무원의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한다. 정부는 처음에 수출에 지장이 생긴다는 이유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자제했다. 그러나 구제역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방역 당국의 생각은 빗나갔다. 방역 능력을 과신한 셈이다. 이 일을 교훈으로 삼아 방역 능력을 제고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구제역 걸려도 치사율 안 높아
구제역(口蹄疫)은 말 그대로 가축의 입과 발굽에 물집이 생기는 전염병이다. 영어 용어(foot-and-mouth-disease)를 앞뒤만 바꾸어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구제역은 우제류, 즉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에게서 나타난다.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제류가 아닌 동물이 걸리는 사례도 있지만 많지는 않다. 사람에게 감염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게 보고되고 있다. 모두 감염된 동물을 직접 접촉한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끼리의 접촉이나 육류를 먹어서 감염된 사례도 없다.
구제역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피코르나바이러스과에 속하는 구제역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물은 열이 나고 기운이 없어진다. 발, 주둥이, 혀, 젖꼭지에 물집이 잡힌다. 구제역바이러스는 크게 7종류로 구분된다. 더 세분될 수도 있다. 대개 감염된 지 2~3일 내에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구제역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 질병이다. 동물 간 접촉, 배설물과 사료 등 감염 매개체를 통한 접촉, 공기 중에 떠도는 바이러스 입자의 흡입, 사람이나 차량을 통한 전파 등 온갖 방식으로 전염된다. 소는 주로 공기에 떠다니는 바이러스 입자를 흡입해 호흡기를 통해 감염된다. 감염된 소는 배설물, 젖, 호흡기를 통해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돼지는 호흡기를 통한 감염은 덜한 편이다. 대신 감염된 동물과 직접 접촉하거나 오염된 사료를 먹어서 걸린다.
많은 사람이 구제역에 걸린 동물은 대부분 죽는 줄 안다. 그러나 그건 사실과 다르다. 다 자란 동물은 구제역에 걸려도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다. 어린 동물은 치사율이 높다. 감염되었다 나은 뒤 체중 감소, 젖 생산량 감소, 활력 상실 등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
가축 전염병을 다루는 국제기관인 국제수역사무국은 구제역을 가축 및 육류의 교역을 제한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 기준에 따라 구제역이 발생한 나라로부터 가축 및 육류의 수입을 금하고 있다.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혹시라도 수입을 통해 구제역이 전파되면 자국에 경제적 피해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제역이 발생했더라도 살처분을 통해 구제역을 없앴다는 것이 입증되면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회복해 가축과 육류의 수출을 재개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처분만으로 구제역을 제거하면 3개월, 백신 접종을 통해 구제역을 제거하면 6개월 뒤 청정국 지위를 회복한다.
지금까지 구제역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나라는 뉴질랜드뿐이다. 미국은 1929년 이래로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아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호주, 캐나다, 유럽 여러 나라도 현재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한때 구제역이 빈발했지만, 1960년대 살처분과 백신 접종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끝에 구제역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잘 퍼질 완벽한 환경
충남 아산시가 1월7일 무인항공방제기로 축사소독에 나서고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안동에서 처음 발생한 구제역이 급속히 퍼진 이유가 분뇨차 때문이라는 잠정적인 역학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분뇨 수거 차량이 안동에서 경기로 분뇨를 수거해 나르면서 구제역이 경기도로 퍼졌다는 것이다. 안동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외국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지금 퍼지고 있는 구제역 균주가 지난해 일본에서 발생했던 균주와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각국의 대책은 거의 동일하다. 발생한 지역을 격리하고 그 지역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것이 그것이다. 주변 약 3㎞ 지역에 집중적으로 방역 활동이 펼쳐진다. 실제로 구제역이 발생하자마자 신속히 완벽하게 격리한 뒤 방역과 살처분을 하면 구제역을 막는 데 효과가 좋다. 아니, 19세기 이래로 세계 각국에서 전통적으로 써온 이 방법이 지금까지 구제역의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방법은 신속한 살처분과 완벽한 격리에 성패가 달려 있다. 문제는 완벽한 격리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람과 차량의 왕래가 뜸하고, 축사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면, 별문제가 안 될 것이다. 19세기에 살처분 방식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 덕분이다.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가축 사육 두수가 늘어나면서 분뇨와 사료, 각종 물품을 운반하는 사람과 차량의 왕래도 늘어났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전국에 차가 안 다니는 곳이 없을 정도다. 국내뿐이 아니라 해외로도 사람과 물자가 꾸준히 오간다. 게다가 단위면적당 사육되는 가축 수가 늘어나면서 전염병이 가축 사이에 금방 퍼지게 됐다. 비좁은 공간에서 자라는 가축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질병에 취약한 편이다. 특히 한국은 국토가 좁고 가축들이 좁은 축사에서 오밀조밀하게 사육되는 경향이다. 그러니 한국에는 사실상 구제역바이러스가 퍼질 완벽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축산업의 성장에 비해 방역 예산과 인력은 미비한 수준이다. 여러 해 동안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예산과 인력의 낭비가 될 테니, 쉽게 늘릴 수 있는 여건도 못 된다.
발생한 지역 바깥으로 구제역이 퍼지지 않았다면 행운이라는 표현마저 쓸 수 있을 것이다. 방역 대책의 허술함은 그것대로 지적해야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미 구제역이 얼마든지 퍼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큰 피해를 보고 있지만 다른 나라들도 구제역으로 심한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앞으로 어느 나라든 그럴 수 있다.
돈과 위신 때문에 살(殺)처분?
예나 지금이나 구제역의 주된 대책은 ‘살(殺)처분’이다. 살처분은 산 동물을 죽이거나 기절시켜서 땅속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 거부감이 덜한 단어를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문외한이 언뜻 들으면 잘 알아듣기 힘들다.
더욱이 죽은 뒤 배가 부풀어 묻은 땅이 들썩거리는 일이 없도록 배까지 갈라야 한다니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살처분 대신 매몰 처분이라는 용어를 쓰는 모양이다. 가축들을 죽여서 묻어야 하는 일을 직접 하는 사람들은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만두겠다고 하고, 심한 정신적 충격에 후유증을 겪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방법을 꼭 사용해야 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정부가 구제역 확산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꺼낸 대책인 백신 접종을 미리 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방역 당국 관계자가 1월7일 강원 양구군 방산면 축산농가에서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백신접종 시기 논란은 어느 나라에서든 구제역이 발생할 때마다 제기되는 문제다. 분명한 사실은 어느 나라 정부든 구제역 백신 접종을 꺼린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가축 및 육류의 수출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1997년 대만에서 돼지 구제역이 대대적으로 발생했다. 대만은 거의 70년 동안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누리던 터라, 상황이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대만은 살처분 방식을 택했다. 사육 두수의 거의 40%에 달하는 400만 마리가 넘는 돼지가 희생됐다. 그러고도 구제역 확산을 막을 수 없자 마지막 수단으로 백신 접종을 동원했다. 결국 돼지 수출 길이 막혔다.
2001년 영국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아시아에 퍼져 있던 구제역 균주가 영국을 침략했다. 영국은 살처분 방식의 종주국으로 알려져 있다. 늘 하던 대로 신속하고 과감하게 살처분에 나섰다. 그러나 구제역의 확산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살처분 방식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백신 접종을 병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백신만이 건강한 가축까지 죽이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막고 가치 있는 희귀한 품종을 보호하며 축산업을 빠르게 재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다른 질병에는 이미 백신을 쓰고 있지 않으냐고도 했다.
살처분이 잘 먹혀들지 않을수록 이런 논쟁이 더 가열된다. 영국 정부는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 밤잠을 설치면서, 살처분을 계속 진행했다. 수백만 마리의 양과 소를 죽인 끝에 구제역을 막을 수 있었다.
수출길이 막힘으로써 빚어지는 경제적 손실이 백신 접종을 꺼리는 주된 이유라면, 수백만 마리를 죽임으로써 입는 경제적 손실과 수출길이 막힘에 따른 경제적 손실 중 어느 것이 더 큰 피해인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 있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청정국 지위를 회복하는 데에 백신 접종 없이 살처분하는 경우와 백신 접종을 하는 경우 사이에는 3개월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3개월의 수출 감소액이 수백만 마리를 살처분할 때의 손실액보다 더 큰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청정국 지위 회복에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검사를 통해 구제역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백신을 맞은 가축과 구제역바이러스를 지닌 가축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양측이 동일한 항체를 지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백신을 맞은 가축이 구제역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보균자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신 접종을 받은 소는 길면 3.5년까지 보균자 상태로 있을 수 있다.
그러니 각국은 백신 접종을 받은 가축 및 육류를 수입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백신을 접종하면 수출길이 더 막히고 경제적 손실이 더 커진다고 보는 것이다. 백신은 즉각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백신을 맞은 뒤 방어력이 생기려면 시간이 걸린다. 긴급하게 확산을 막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단계에서 백신 접종은 한계를 지닌다.
1월6일 방역요원들이 전남 담양군 창평면 호남고속도로 창평요금소에서 통행차량을 소독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구제역 통제에 자신감을 얻게 되자 1992년 다시 백신 접종을 금하고 살처분을 공식 채택했다. 그러면서 백신 접종을 한 가축의 수입을 금지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살처분이 구제역의 주요 대책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듯하다. 살처분의 강력한 효과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백신 접종 없이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자국의 육류가 최고라는 선전 효과를 낸다. 백신 접종은 자국 가축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자인하는 꼴로 인식된다. 한 마디로 국가 위신의 문제로 연결되고 마는 것이다.
19세기 패러다임 달라져야
그런데 최근 들어선 구제역 방역을 둘러싼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다. 각국의 축산업 규모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축산업자는 다른 농업종사자에 비해 부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구제역으로 인한 살처분의 규모도 국가경제에 상당히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또 동물 복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아울러 누구나 살처분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퍼뜨릴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있다. 당국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매몰되는 동물의 모습이 떠돌아다닐 수 있다. 지역 축제가 취소되는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관광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살처분을 하기 어려운 쪽으로 정치적, 경제적, 산업적, 심리적 환경이 변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매몰 처분은 19세기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방법이다. 병에 걸린 가축을 죽여 땅속에 묻으면 전염병뿐 아니라 두려움까지 함께 없앨 수 있었다.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한 현대에는 상황이 다르다. 매몰 처분은 여전히 강력한 억제력과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대책, 우선적 대책이 되어선 안 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완벽한 방역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수의사가 생명을 없애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농업만의 문제 아니다
결국 백신 접종이 구제역 대책으로 더 적극적으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여기에는 백신 효과의 증진, 동물 면역력의 강화, 백신접종개체와 감염개체를 구분할 검사법의 개발 등 과학적 진전이 전제되어야 한다. 백신 접종을 받은 육류의 수출입 문제에 대한 새로운 국제적인 합의도 필요할 것이다. 구제역이 잘 전파되는 환경에 대한 개선도 병행되어야 한다.
대안이 점점 더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면 살처분은 꼭 필요한 경우로 제한될 것이다. 살처분은 구제역이 농업만의 문제였을 때 나온 방법이다. 이제 구제역은 더 이상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