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0년이 되던 1995년에 창립 50년이 넘은 우리나라 상장기업은 모두 23개사였다. 그중 은행이 5개, 일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10개였고, 한국인이 만든 회사는 8개에 불과했다.
기업의 장수(長壽)는 그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안정도와 직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게 낮은 기업 생존수치만으로도 격동의 우리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치열한 이념대립, 갈등으로 점철된 정권교체, 유가파동과 외환위기 등 거듭된 고난을 버텨내면서 50년의 기업 역사를 일궈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1946년 회사를 설립, 올해로 창립 55년째에 접어든 (주)BYC 역시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기업 가운데 하나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내의 만들기 한 우물만 파온 BYC는 ‘백양 메리야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백양’은 한때 우리나라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불모지였던 내의산업에 선발주자로 뛰어들어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이루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품질 향상을 선도한 BYC의 사사(社史)는 그래서 우리 내의산업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BYC는 1958년 대·중·소로만 대충 구별돼 있던 내의 사이즈를 가슴둘레에 따라 4단계(85·90·95·100㎝)로 나눠 규격화하고, 아염소산 표백기를 개발, 누런 내의를 백옥같이 흰 오늘날의 내의로 탈바꿈시켰다. 거칠고 성글어 착용감이 떨어지고 수명도 짧았던 20수(목화 1g에서 20m의 실을 뽑아낸 것) 내의가 대부분이던 시절에 국내 최초로 100수 내의를 개발하기도 했다. 지금은 120수까지 나온다.
창업주 한영대(韓泳大·76) 회장은 20대에 이 사업에 뛰어들어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품질만큼은 최고라야 한다”는 품질제일주의 경영철학으로 속옷 만들기에 한평생을 바쳐왔다. 20년 늦게 이 업계에 뛰어들어 22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50대 그룹으로 성장한 후발업체를 보면서도 그는 “이 일, 저 일 다 하면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 처음부터 큰 돈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천직으로 한번 붙든 일이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고 했다.
한 우물만 파온 무차입 경영
BYC는 재무구조가 튼튼하기로도 소문나 있다. 이 회사는 99년 매일경제신문과 대우경제연구소가 국내 상장기업 중에서 선정한 재무구조 우량기업 5위에 올랐고, 경상이익률 부문에서도 유수의 재벌그룹 계열사를 제치고 30위 안에 들었다. BYC는 현재 자본금 42억 원에 유보율 3800%, 부채율 30%로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 75년 기업공개 이후 줄곧 흑자경영을 해왔으며, 지난해에는 1100여 명의 직원으로 30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업계 1위를 차지했다.
매출의 35%는 해외시장에서 수출로 벌어 들였다. 일본 미국 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 70여 개국에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고 있는데, 중동지역에선 업계 1위를 고수하면서 BYC를 모방한 유사품까지 나와 상표 지키기에 신경을 써야 할 정도다. 일본에서도 시장점유율 10위권 안에 들면서 일본 내의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처럼 활발한 수출이 외환위기 탈출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BYC의 경영스타일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다” “고지식하다”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BYC에 대한 시각이 180° 바뀌었다고 한다. 모두들 부풀린 몸집을 줄이기에 뼈를 깎는 고통을 겪던 당시에도 이 회사는 그 전까지 군살 없는 내실경영을 해온데다 고금리로 불어난 은행이자 덕분에 오히려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겨울 내복 판매량까지 예년보다 10% 정도 늘어 큰 어려움 없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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