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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횡포, 노동자 고통을 이제야 알겠다”

‘재벌의 나팔수’ 공병호의 대변신

“오너 횡포, 노동자 고통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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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재벌 입노릇, 다시 하지 않겠다
  • ● 정글같은 비즈니스판에서 많이 배워
  • ● 내가 너무 순진했다, 재벌은 감시 받아야
  • ● 기업가, ‘선한 사마리아인’ 아니더라
  • ● 전경련은 국익 먼저 생각해야
  • ● 강준만, 장하성 교수 이제 다 이해해
  • ● 대우 붕괴 원인은 리더십 위기
  • ● 기업 운영에 불법 끼어들 여지 너무 많아
  • ● 난장판 벤처업계, 머니 게임에 멍들고 있다
공병호(41). 그는 전사(戰士)였다. 외환 위기와 정권 교체, 빅딜로 대표되는 재벌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기업인, 좁혀 말해 재벌의 사수대로서 두려움 없이 싸움에 임했다. 그에게선 신념에 찬 인간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열정과 고양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뛰어난 전사에겐 그에 어울리는 수사가 따라붙게 마련. ‘재벌의 나팔수’ ‘젊은 우익 사상가’ ‘한국식 자유시장주의자’.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센터 소장이 된 이후 그의 사회적 삶은 종종 이런 용어들로 설명되곤 했다. 그랬다. 그는 싸움꾼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교묘한 전술로 무장한 확신범, 그래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런 그가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단다. 칼의 말과 총(銃)의 글은 저 멀리 내던져 버렸단다. 패션(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란다.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까닭이란다. 거친 세상, 정글 같은 비즈니스판에서 참 많이 배웠단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오랜만에 만난 그는 한껏 편안해 보였다. 옷차림도 그랬다. 갈색 체크무늬 재킷에 하늘색 버튼다운 셔츠, 링클프리 면바지. 지난해 3월, 테헤란밸리 중심가 ‘인티즌’ 사장실에서 대면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당시 자유기업원 소장에서 벤처기업 사장으로 자리를 막 옮긴 상태였던 그는 낯선 일과 환경에 채 적응이 되지 않은 듯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후 1년8개월.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이란 새 명함을 들고 대중 앞에 다시 서기까지 그의 신변과 의식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1983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공소장은 1987년 미국 라이스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국토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됐고, 1990년에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즈음 그는 하이에크(자유시장경제를 일관되게 고수했던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의 저술을 읽고 그 이론에 깊이 매료됐다. 공소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하이에크의 방대한 저술을 섭렵하는 동안 ‘내 속에서 그런 성향(자유시장의 전사)을 발견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97년 4월, 최종현 SK회장 체제의 전경련은 부설 연구소로 자유기업센터를 설립하면서 37세의 공소장을 그 수장으로 전격 등용했다. 이후 그는 수많은 방송 출연과 기고, 인터뷰를 통해 ‘시장경제 논리’를 설파하고 기업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열성을 바쳤다. 시민단체, 진보적 지식인, 경제 관료 등으로부터 숱한 비판과 비난을 받았지만 소신을 꺾지 않았다.

재벌 개혁에 적극적이던 정부와도 첨예한 갈등을 겪었다. 정부가 고통분담 차원에서 그룹 오너들에게 사재 출연을 요구하자 이를 ‘집단 약탈’이라 비난하며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소수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영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소유한 주식만큼만 지면 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오너의 권한이 소유한 주식의 열 배, 스무 배 이상이란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 듯 했다.

당시 공소장은 그룹 오너 등 기업인을 종종 ‘마이너리티’라 칭하곤 했다. 마이너리티라는 말에는 ‘소수’라는 뜻도 있지만 ‘소외된 자들’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 그에게 기업인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폭력적 대중’과 ‘그들을 대리공격해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정치인들’로부터 핍박받는 속죄양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이다. 공소장은 같은 이유로 시민운동가, 정치인 등을 ‘허황된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의 감성적인 면에 호소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로 폄하하기도 했다.

1999년 11월, 정부와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달하자 전경련은 돌연 자유기업센터 분리를 공표했다. 전경련과 공소장의 공식 부인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앞다투어 ‘전경련이 정부에 대한 화해 제스처로 자유기업센터를 정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2000년 2월21일, 자유기업센터는 자유기업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금만으로 운영되는 국내 최초의 민간 독립 연구소’로 새출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3월 중순, 공소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사유는 KTB네트워크(사장 권성문)가 대주주인 벤처기업 ‘인티즌’으로의 이직. 한겨레신문 기자 출신의 창업 CEO 박태웅 사장과 공동대표를 맡는다고 했다.

연구소 시절, 여권 실세 압력 받아

그 얼마 전까지 재계로부터 연구소 기금 60억원을 출연받는 데 성공했다며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세일즈맨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으쓱해하던 그였다. “저를 믿고 있는 분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겠다. 앞으로 30년은 더 내 생각을 전파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뀐 거지요.

“당시의 벤처열풍 생각나시죠. 그건 바람이었습니다. 대단한 폭풍이었죠. 사실 전 그때 제가 하는 일에 상당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어요. 지루해진 거죠. 무엇보다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니, 40이란 나이도 있고 말입니다, 캐리어를 계속 쌓아가야 하는데 경력이 너무 단출한 거예요. 그냥 논객으로 그렇게 한 연구소에서 30년, 40년씩 몸담는 거…, 그런 게 아주 회의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30~40년 운운한 건 바로 당신이 아니냐고 하자 겸연쩍은 듯 답했다.

“전 단순했어요. 정말 괜찮은 연구소를 만들어 평생 이끌어간다…. 근데 40세 전후로 맘이 굉장히 흔들리더라고요. 사람 마음 바뀌는 거 정말 순간입디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런 겁니다.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경력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에다, 연구소를 위해서도 제가 없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 펀딩에 성공해 자유기업원의 기반을 튼튼히 했고 조직도 안정된 마당에, 제게 덧씌워져 있는 ‘지나친 전경련 컬러’가 도리어 연구소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어떻게 보면 매력적인 제안을 받고, 거기 응하는 걸 합리화하기 위해 부러 그런 쪽으로 더 생각을 몰아간 건지도 모르죠.”

그는 사실 힘이 빠지기 시작한 건 1999년부터였다고 했다.

-‘재벌의 나팔수’ 운운하는 세상의 시각이 점차 부담스러워졌던 건가요.

“음… 공병호 하면 전경련, 전경련 하면 재벌, 그런 식의 구도는 제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언행이 자발적이 아니었단 게 아니라, 전 제 신념을 열정적으로 표현했을 뿐 재벌 편을 들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전 확신범이었습니다. 솔직히 최회장님(고 최종현 SK회장) 모시고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근데 1999년 들어 빅딜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시점부터 서서히 입을 다물었죠. 시장자유주의의 원칙에 비추어, 전경련의 빅딜 추진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TV에 출연하지 않은 것도 그 무렵부터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다 재벌 옹호론으로만 비치는 현실이 답답했다고 했다.

“전 수많은 글로 제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시장경제란 말이 일반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요. 정말 치열하게 쓰고 말했습니다. 글 한줄 없는 사이비 학자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발언 수위를 조절하라는 외부의 압력은 없었습니까.

“많았지요. 우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위로 자꾸 얘기가 들어가고….”

-직접 연락을 받은 적은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여권 실세로 통하는 분이 서너 번 전화했죠.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 봤자 재벌 대변자 아냐”

-왜 하필이면 인티즌이었습니까. 이왕 벤처 행을 결심했다면 다른 업체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텐데요. KTB네트워크 권사장과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는지요.

“같이 나가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무슨 포럼인데, 거기서 권사장을 만났죠. 자유기업원 독립자금 모으느라 한참 정신이 없을 때였어요. 근데 권사장이 선뜻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액수보다 대기업이 아닌 벤처쪽에서 적극 참여해 준다는 점이 고마웠습니다. 그때 권사장은 인티즌의 새 CEO를 물색중이었습니다. 저보고도 사람을 좀 추천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력해 봤는데 마땅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어요. 지지부진한 가운데 권사장이 제게 불쑥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이 직접 와달라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을 물색해 달라 뭐 그런 건 다 해본 말이었고 처음부터 목적은 저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권사장의 권유로 인해 처음 기업 행을 생각하게 된 거로군요.

“처음엔 당연히 펄쩍 뛰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돈 모으러 다닐 땐데…. 한데 권사장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 그렇게 열심히 해 봐야 재벌 대변자밖에 더 되겠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그때부터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애써 덮어두려 했던 회의나 무력감, 지루함, 불안감, 그런 것들도 다시 고개를 들었고요.”

2000년 3월20일 인터넷 허브사이트 인티즌은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병호 전 자유기업원장을 공동대표로 영입한다고 발표했다. 공소장의 변신은 세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그렇듯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벤처생활이었지만 그의 앞에는 적지 않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사건이 터진 것은 부임 후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5월 초. 공동대표였던 박태웅 사장이 재무·인사권을 둘러싼 공소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대박주’로 인식됐던 인티즌의 위상이나 두 CEO의 만만치 않은 중량감·유명세로 인해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 아니냐’며 사건의 원인을 공소장에게서 찾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사건 직후 박 전사장을 통해 들은 이야기나, 공소장의 조심스런 발언 몇 가지를 종합할 때, 가장 큰 책임은 대주주 측의 불명확한 태도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쨌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공소장은 오너와 전문경영인, 혹은 직원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듯하다.

분쟁의 후유증이 가라앉으면서 공소장은 인티즌 경영에 전념했다. 닷컴기업이었던 만큼, 특히 수익모델 찾기에 골몰했다. 그러나 사업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경영 그 자체도 어려웠지만 오너와의 의견 조율, 정·관계 인사들과의 관계 설정, 직원 관리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특히 예상이나 짐작과는 관계없이 진행되는 업계의 습성 및 관행은 이론에 더 밝은 초보 전문경영인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제가 원래 술을 잘 안 마십니다. 연구소 시절에는 보통 저녁 10시면 자고 새벽 3시쯤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죠. 벤처에 있는 동안 그런 생활리듬이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저녁이면 술 마실 일이 생겼고, 꼭 그런 게 아니어도 고민할 일이 너무 많아 잠이 오질 않았어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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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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