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추적! ‘퇴진 정몽헌’의 現代장악 시나리오

  • 문주용 이데일리 산업부 기자

    입력2006-09-28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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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퇴장인가, 교묘한 위기 탈출인가. 경제개발시대의 ‘영웅’ 정주영(鄭周永·85)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전격 퇴진을 선언, 재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것도 자신의 뒤를 이어 현대호(號)를 이끌고 있는 두 아들 정몽구(鄭夢九·62) 현대자동차 회장과 정몽헌(鄭夢憲·52) 현대그룹 회장까지 동반 퇴진시키는 구도여서 충격은 일파만파로 증폭됐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정몽헌 회장만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어정쩡한 모양새다. 그간 구구한 억측과 갖가지 음모설이 쏟아져 나왔지만, 수소폭탄급 폭발에 뒤이은 먼지폭풍이 서서히 걷히면서 재계는 이번 사태를 정몽헌 회장측이 벌인 ‘실패한 친위 쿠데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실패한 친위 쿠데타?

    “오후 2시에는 발표 못해. 내용도 없는데다, 이익치 문제가 아직 결론이 안 났단 말이야.”

    현대그룹 자구계획 발표를 2시간 가량 앞둔 5월31일 정오 경. 정몽구 회장(이하 ‘MK’)의 핵심 측근인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 말고 손사래를 쳤다. MK 계열의 간부들 사이에선 ‘회장’이라는 직함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의 신변처리 문제 때문에 2시로 예정된 발표는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MK측에서 봐도 그 무렵 빚어진 정몽헌 회장(이하 ‘MH’)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는 쉽게 해법을 찾기가 어려울 듯했다.



    이 관계자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긴 이익치 문제말고 달리 또 뭐가 있겠어. 이번 발표에서는 얼렁뚱땅 유임되는 것으로 했다가 나중에 본인이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처리하겠지.”

    그의 말마따나 현대의 유동성 위기는 6조원 가량을 추가로 확보하고 이익치 회장 등 몇몇 경영인이 퇴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듯했다. 이번 위기가 현대건설, 현대상선 등 MH의 계열사에서 비롯됐으니만큼 현대자동차 등 MK 계열 회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걱정할 게 없어 보였다.

    한가로운 점심식사가 끝나갈 즈음, 기자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2시에 발표합니다.”

    MH쪽 직원은 이 한 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MK측에선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이익치 회장의 신변문제가 가닥이 잡힌 것쯤으로 추측할 따름이었다. 잠시 후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전개될 초유의 사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시가 약간 지나서 발표된 현대의 최종 자구계획은 방송과 통신으로 나라 안팎에 전해지면서 ‘거인의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었지만, 정작 MK측은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날 발표를 맡은 현대그룹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위원장은 “명예회장께선 평소 정몽구 회장에게 앞으로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야 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고 부연했지만, 정작 MK측에서는 항명 조짐이 불거졌다. 현대건설에서 불거진 유동성 위기의 불똥이 난데없이 현대자동차까지 날아가 경영권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반전됐기 때문이다.

    ‘박세용 파동’ 때부터 갈등

    이러한 자구계획은 현대에 본격적인 전문경영인 시대가 도래했다기보다는 정주영이라는 개발시대의 영웅을 희생양 삼아 새로운 형태의 오너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두 번째 진통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가 많다.

    이번 사태가 한 마디로 MH의 친위 쿠데타 성격을 띠고 있다는 얘기다. 그룹 경영 주도권을 둘러싼 지난 3월말의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두 달 만에 ‘2차 왕자의 난’이 터진 셈이지만 두 난(亂)의 판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MK와 MH의 경영권 다툼은 지난해 말 박세용(朴世勇) 현대상선 회장 겸 그룹 구조조정위원장의 인사 파동 때부터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박세용 회장 거세는 이익치 회장이 낸 아이디어였고 MH가 이를 승인했다는 게 그룹 내부의 정설이다. MH와 박회장은 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함께 구속되면서 가까워졌고, 그 전까지 왕회장(정 명예회장) 사람으로 분류되던 박회장은 이 때부터 범(汎) MH 계열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그룹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MH와 박회장 사이가 차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깐깐하고 치밀한 성격인 박회장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MH에게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박회장은 현대를 자동차·중공업·전자·건설·금융 및 서비스 등 5개 소그룹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부채비율 200%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MK가 자동차 소그룹을, MH가 전자·건설·금융 및 서비스 소그룹을, 정몽준(鄭夢準·49) 의원이 중공업 소그룹을 맡게 돼 있어 사실상 그룹의 후계구도를 정하는 작업이었는데, 그 구도에 대해 MH의 불만이 컸던 것 같다. 형과 동생에게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세계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기업들이 돌아간 데 비해 자신의 몫은 초라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익치의 역습

    MH의 몫으로 결정된 현대전자는 반도체 특수를 누리고는 있었지만, LG반도체와 합병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룹 모기업인 현대건설은 부실 규모가 2조 원대에 달한데다 건설 경기 침체로 내수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다. 현대증권을 비롯한 금융 부문도 외형만 화려할 뿐 실속이 없다는 것이 여러 차례 확인됐다. 그나마 ‘현금 장사’의 창구 노릇을 했던 현대상선은 금강산 관광 등의 대북사업에 돈을 쏟아 붓느라 여력이 없었다.

    이 과정에 MH측은 박회장에게 ‘확실한 도움’을 기대했지만, 박회장은 5개 소그룹 분리라는 원칙의 이행에만 관심을 둬 불만을 샀다.

    이에 따라 MH측은 5개 소그룹 계열 분리를 유야무야하려는 구상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서는 계열 분리안을 추진 중인 박회장을 거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때 이익치 회장이 박회장을 현대차 회장(사흘 뒤 인천제철 회장으로 재발령)으로 전보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게 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1차 왕자의 난은 이회장의 업무정지가 풀리는 3월24일을 D데이로 삼아 전개됐다. 이회장은 ‘바이코리아’ 펀드 자금을 현대 계열사에 불법 지원한 혐의로 기소됐고, 당시 2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융감독원은 이와는 별도로 이회장에 대해 업무정지 명령을 내린 바 있는데, 그것이 이날부터 풀리게 돼 있었다. 때문에 MK측은 이회장의 업무정지 해제를 계기로 그를 증권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회장은 이를 거부하면서 MH와 함께 1차의 난을 주도했다. 그 결과 MH를 그룹의 유일한 회장으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된다. 상처를 입은 MK측은 이를 계기로 자동차 소그룹 분리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5월25일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 공개와 함께 본격화된 2차 왕자의 난은 1차의 난에서 기세를 올린 MH가 그룹의 후계구도를 아예 새로 짜기 위한 의도에서 촉발시켰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허울뿐인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현대자동차 등 우량 계열사의 경영권을 확보, 실질적인 파워를 거머쥐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에서 찾았다는 게 이 음모설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MK측 고위 관계자는 “MH가 5개 소그룹 분리 계획의 판을 깨고 자신을 중심으로 그룹구도를 재배치하려는 의도”라며 “현대차의 지분 변동을 MK와 상의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는 이미 올해 초부터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그룹이 신뢰도 추락에 직면하면서 업종 특성상 경기 회복의 사각지대이자 부실 규모가 큰 현대건설이 이미 기업어음(CP) 연장과 회사채 차환 발행(만기 상환을 목적으로 다시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는 것. 현대 관계자는 “은행 대출을 마음대로 이용하던 다른 그룹과는 달리 현대는 92년 대선 이후 정부의 ‘돈줄 죄기’ 후유증으로 CP 등 단기성 차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시장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투자가 계속되고 있는 현대의 대북사업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현대건설(19.8%) 등 관련 계열사들은 대북사업을 위해 설립한 현대아산에 4500억 원의 자본금을 출자했다.

    투자현황을 살펴보면 금강산 관광사업에 3월말 현재 1억2200만 달러(1340억 원)가 투입됐고, 토지 이용 및 관광사업권에 대한 대가로 북한측에 2억4600만 달러(2700억 원)을 지급했다. 벌써 4000억 원이 넘게 투자됐지만 흑자를 내기는 요원해 보였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대북사업을 현대 위기의 시발점으로 볼 정도였다.

    더욱이 현대건설은 걸프전이 터지면서 이라크로부터 8억4965만달러(9400억원)의 공사 대금을 받아내지 못하는 등 부실 규모가 2조 원에 달해 일찌감치 ‘빨간불’이 켜진 형편이었다. 3월부터 1700억 원에 달하는 CP를 상환했고 6870억 원에 대해 만기를 연장했지만, 5∼6월에 다시 5350억 원의 만기가 도래할 예정이었다. 특히 회사채는 차환 발행이 중단되다시피 하는 등 자금 경색에 휘말렸다. 마침내 5월19일, 국내 최대 건설회사이자 국내 최대 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은 사실상 1차 부도를 냈다.

    그런데도 MH는 5월22일 북한 장전항 접안시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출입기자 수십 명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떠나는 여유를 보였다. 앞으로는 대북사업에만 주력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MH는 5월25일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봉래호 선상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몇가지 주목할 만한 발언을 쏟아냈다.

    첫째는 현대투신 사태와 관련한 그의 진퇴 문제. “현대투신이 경영 정상화에 실패할 경우 본인이 반드시 책임을 지겠다”고 장담했다. 현대 사태를 배수의 진을 치고 수습하겠다는 각오를 공개석상에서 보여준 것.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앞으로 모든 기업은 오너와 상관없이 각 계열사의 최고경영진(CEO)이 스스로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며 “어떤 기업도 투명성과 책임경영을 구현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강조, 마치 3부자 동반 사퇴를 예측한 듯했다. MH는 이때 벌써 퇴진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던 것일까.

    MH는 바로 아래 동생인 정몽준 의원(현대중공업 고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의원은 어릴 때부터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사이인만큼 가장 친하다. 그는 형제들 중에서 제일 똑똑했고, 어렵던 시절에도 외국에 나가 꿋꿋하게 공부할 만큼 진지하고 성실하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제 할 일은 다 잘 해냈다. 정 의원은 우리 집안의 자랑이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형제들 가운데 특히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MH의 이날 발언은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것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오후 4시 김재수 위원장이 밝힌 자동차 부문 계열분리 작업의 내용을 보면 더욱 그렇다. 김 위원장은 이날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중공업이 갖고 있던 현대자동차 지분 6.8%와 장내 주식 2.1% 등 총 9.0%를 매입, 현대차의 최대주주가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분 정리 과정에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 지분 11.1%를 인수, 총 11.6%의 지분으로 최대주주가 되는 예상 외의 결과가 발생했다. MH계는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중공업 지분 7.9%까지 합칠 경우 중공업의 지분을 19.5%나 장악, 정몽준 의원 몫으로 돼 있던 현대중공업을 사실상 ‘접수’한 셈이 된 것이다.

    김재수 위원장은 이와 같은 변동이 일시적인 것인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당분간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지분을 계속 갖고 있겠지만 경영권을 행사하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 정몽준 의원의 한 측근은 “사전에 협의가 있었으며, 정몽헌 회장측이 현대중공업의 경영권을 노린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이 직접 나서서 계열사에 대한 지분 정리를 한 결과 최대의 수혜자는 누가 뭐래도 MH였다. 그는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가 됐을 뿐 아니라 정 명예회장 지분을 통해 현대자동차 경영권에도 손을 뻗칠 수 있게 됐다. 그룹 안팎에는 이익치 회장이 이같은 전략을 구체적으로 마련했고 김재수 위원장이 이를 실행하는 역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은 일본에서 MH의 작전참모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의도적인 위기증폭 의혹

    김재수 위원장은 현대건설의 위기를 그룹 전체의 위기로 증폭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우량기업으로 알려진 현대상선이 건설과 마찬가지로 유동성 위기를 안고 있는 것처럼 발표했기 때문. 기업의 자금 흐름은 통상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상황이다. 특히 요즘처럼 금융시장이 불안한 상황에서는 루머 하나로 멀쩡한 기업이 휘청거릴 수 있다. 더욱이 그룹의 구조조정 작업을 지휘하는 위원장에게 ‘입조심’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김위원장은 이날 자동차 지분 정리 방안을 발표하면서 현대상선의 자금난을 공개하는 상식 밖의 ‘실수’를 저질렀다. 상선은 5월17일 당좌대월 한도를 500억 원 증액받는 등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자금 수급상의 일시적 불일치’였다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이 때문에 그룹 일각에서는 김위원장이 건설과 상선의 문제를 함께 드러냄으로써 건설 자금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려 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현대건설이 자금난에 빠졌다는 것을 현대건설 출신인 김위원장이 그대로 밝히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더욱 음모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김위원장이 그룹의 위기를 의도적으로 과장해 발표했다는 것이다. 정 명예회장의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동시에 정부로부터도 확실한 지원을 받아내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 MH측이 정 명예회장에게 그룹이 건설뿐 아니라 상선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했다고 설명, 그로 하여금 3부자 동반 퇴진을 선언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이 건설의 자금난을 정확하게 보고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정 명예회장의 결심 배경에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현대상선은 김 위원장의 발표가 있자 “우리에게는 유동성 문제가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는 후문이다.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은 임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김위원장이 왜 애꿎은 현대상선을 끌어들였는지 모르겠다”며 섭섭해 했다고 한다.

    2차 왕자의 난의 구체적 목표는 자동차 소그룹에 대한 MH측의 경영권 확보였다는 게 이번 사태를 보는 MK측의 시각이다. MH측이 계열 분리를 위한 지분 정리 작업을 이용해 자동차 지분을 11.8%(정 명예회장의 지분 9.0%과 현대건설 보유 지분 2.8%)나 확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MK가 갖고 있는 지분 4.0%와 MK 계열의 현대정공이 보유한 7.8%를 합친 비율과 묘하게도 일치, MK측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다. MK측 고위 관계자는 “MH측이 왕회장을 앞세운 것 역시 정몽구 회장의 반발을 꺾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MH측은 이런 의도를 5월31일 최종 자구안 발표 직전에 드러냈다고 한다. 또한 정 명예회장은 MH측의 의도대로 현대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승부수로 ‘오너체제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 카드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 명예회장의 외로운 퇴진이라는 ‘현대판 고려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버지의 퇴진 요구에도 불구하고 MK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은데다, MH 역시 현대아산을 통해 그룹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려 할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MK, “MH가 자동차 넘본다”

    정 명예회장이 실제로 MK의 퇴진을 요구했는지도 의문이다. 시중에 알려진 것처럼 정 명예회장은 MH의 경영능력은 높이 평가하지만 MK에게는 미더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룹 일각에서는 이와 달리 MK는 과소평가, MH는 과대평가돼 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MH 주력 계열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 현대건설에서 MH를 직접 모신 적이 있는데, 그는 외부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고 했다.

    “MH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결코 통이 큰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잘다’고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외국 물을 먹은 만큼 실용적이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출장 갈 때 수행원을 데려가지 않고 해외 지사에서 영접을 나오는 것조차 싫어한다. 출장을 가면 꼭 계열사 현지법인에서 업무보고를 받는 등 매우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그룹의 앞날을 염려한 정 명예회장이 그에게 그룹을 맡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꼼꼼한 성격은 오너의 덕목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MH는 말을 조리있게 하고 셈이 빨라 경영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왕회장의 가신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은 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였다.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결국 손을 든 MH는 스스로 총대를 메고 박세용 당시 사장 등 임원들과 함께 구속됐다. ‘황태자’로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의연했다.

    현대 직원들은 MH에게 매일 사식을 넣어 보냈다. 하지만 그는 임원들에게 사식을 돌리면서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똑같은 대우를 자처했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현대 직원들의 마음이 그에게 쏠렸고, 박세용 회장 등 정 명예회장의 비서 출신 임원들이 그를 따르게 됐다는 것이다.

    “황태자로서 어려움 없이 컸기 때문에 사람을 쓸 때도 학연, 지연을 따지지 않는다.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주 냉정한 사람이다. 자기 사람으로 불리던 박세용 회장을 하루 아침에 그렇게 내친 것을 보면 알지 않는가. 아니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다. 아랫사람으로서는 모시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한편 정몽구 회장 쪽 사람들은 MK에 대한 외부의 과소평가가 그의 눌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MK는 환갑을 지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다. 이 때문에 기자회견 같은 자리에서 능란한 화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임원들에게 지시하는 말투며 태도가 권위적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면모는 지엽적인 것이라는 게 MK측의 주장이다. MK측의 한 인사는 정몽구 회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허물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현대정공 회장으로 있을 때 신규 진출한 사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회사 내부에서는 관련 고위 임원의 문책이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몽구 회장은 그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 당사자에게 일을 계속 맡기면서 독려했다. 한 번 사람을 쓰면 함부로 내치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은 냉정한 승부사인 정 명예회장 성에는 차지 않았을지 모른다. 때문에 정이 많고 효자인 그에게는 그룹보다는 가계(家系)를 물려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듯하다. 정 명예회장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MK의 약점은 또 있다. 그가 학연으로 이뤄진 측근들에게 끌려다닌다는 것이다. MH측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MK계 사람들은 과잉 충성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MK에게 잘 보이겠다는 뜻에서 결례를 범할 때도 많고, 자기들끼리 ‘인의 장막’을 치기도 한다. 아랫사람이 과잉 충성을 하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이를 즐기기 때문이다. MK가 기아차 공장을 방문할 때면 공장을 새로 단장하느라 페인트가 동이 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MK가 이런 것을 좋아하니까 밑에서 알아서 기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경기고나 경복고 출신인 것도 문제다. 이 학교를 나오지 못하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MK 주변에는 이른바 ‘왕회장 사람’으로 불리는 가신 출신이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에 띈다. MK가 일찍부터 현대정공 등 자동차 소그룹의 경영에 전념하느라 가신들을 가까이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두 사람은 경영 스타일과 능력에서도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지난해 경영실적으로 보면 MH의 성적표가 신통치 않은 게 사실이다. MH 계열사의 지난해 총 매출액은 51조 원이었는데 당기 순이익은 고작 3300억 원이었다.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이 1%도 안될 만큼 창피한 성적이다. 현대건설은 적자가 1208억 원에 달했고, 37조 원의 매출을 기록한 현대종합상사의 순이익도 229억 원에 그쳤다.

    MK의 성적 역시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MH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6개 계열사(현대강관, 현대우주항공 등 포함)의 총매출은 25조4000억 원, 순이익은 3500억 원 가량으로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이 1%를 넘는다.

    지난해 실적은 급격한 구조조정으로 인한 특별이익이나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 경영실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지만 올해 1분기 MK와 MH 계열사의 경영실적을 비교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MK 쪽에서는 현대차, 기아차 등 자동차 부분의 영업 호조로 매출과 경상이익이 크게 늘어난 반면, MH 쪽에서는 핵심 계열사인 현대전자가 756억 원의 경상이익 적자를 기록하고 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몰리는 등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익치·김윤규·김재수의 임무

    이런 사정 때문에 정 명예회장이 MK 퇴진을 지시했다는 건 왜곡일 수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 MK측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라고 했지, MK더러 퇴진하라고 하진 않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1차 왕자의 난이 마무리 될 무렵 정 명예회장이 MK에게 “자동차 부문에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그 쪽에만 전념하라”고 주문한 것이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그 사이에 정 명예회장의 마음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본인의 순수한 뜻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태는 MK측의 반발로 공이 MH측에 넘어간 상태다. MH는 회장 퇴진과 함께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약속했으니 만큼 조만간 이를 이행하리라는 액션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현대의 한 중립적인 인사는 “현재는 거의 결말이 지어진 단계”라고 말했다. 이미 시장에서 MK의 현대차 경영권 고수를 긍정적으로 인정한 마당에 또다시 인위적인 판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시장의 신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일단 현대 구조조정위원회는 그룹이 밝힌 대로 각 계열사에 인사위원회를 설치해 유능하고 국제적 감각이 있는 외부 전문경영인을 추천하는 등 전문경영인 시대로 가려고 시동을 걸고 있다.

    MH측에서는 당장 MH가 빠진 상태에서 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 김재수 위원장 등 3인방의 ‘대리 경영체제’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여 이들의 역할이 주목된다. 이회장은 금융 부문, 김사장은 건설과 대북사업, 김위원장은 구조조정 업무를 그대로 이끌 가능성이 매우 높다.

    MH 진영의 삼각축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이 균형이 흔들리면 MH 체제가 흔들리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 추측하는 것처럼 이들이 현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서로의 임무를 바꿀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정부의 시각은 여전히 냉담하다. 특히 이회장과 금융당국은 여전히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MH측이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외견상 MH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회장 등 모든 계열사의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오직 현대아산의 이사직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아산은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등이 출자한 회사로, MH가 이를 통해 그룹을 수렴청정할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반면 MK측은 일단 시간 벌기에는 성공했지만 언제 또다시 MH측의 공세가 있을지 몰라 긴장하고 있다. 따라서 MK측은 무엇보다 자동차 소그룹의 계열 분리를 서두르고 있다. 6월 중 공정거래위에 신청한 계열 분리안이 승인을 받으면 그룹과의 인연을 미련없이 끊고 세계 5위 자동차 회사로의 도약에 주력할 계획. 계열 분리가 그룹 구조조정의 주요 성과가 될 것이므로 이는 별다른 차질 없이 진행될 전망이다.

    대우차 인수가 최대 과제

    그렇지만 MK에게는 넘어야 할 고비가 산적해 있다.

    우선 정 명예회장이 갖고 있는 지분에 중요한 변동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커다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정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는 MK가 장악한 경영권에 대한 창업주로서의 견제수단이다. 현대차에 경영 부실이 발생, 정 명예회장이 MK 등 현 경영진에 책임을 물을 경우 창업주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 파괴력이 작지 않을 전망이다.

    그렇지만 MK의 현대차 경영권을 위협하는 상황까지는 연출되지 않을 듯하다. MK가 가진 지분 11.8%에 우리 사주 지분(12%), 미쓰비시 지분 등 우호지분을 모두 합치면 40%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적대적 M·A를 방어하기에도 충분하다.

    정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은 그가 지닌 사실상의 마지막 상속재산이다. 따라서 이 지분을 누구에게 주느냐에 따라 현대그룹의 법통이 정해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행여 정 명예회장이 상식을 넘어선 결정을 내릴 경우 상속과 관련해서 현대는 다시 한 번 파란을 맞을 수도 있다.

    또한 MK측은 대우자동차 인수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앞두고 있다. 이는 전문경영인을 자처하며 아버지의 퇴진 요구를 거부한 MK에게 기업인으로서 생사를 건 시험 무대가 될 전망이다. 계열 분리가 순조롭게 이뤄지고 대우차 인수마저 성공한다면 정 명예회장도, MH도 더는 MK의 자동차 경영에 대해 왈가왈부할 명분이 없어진다. 대우차를 인수하면 MK측은 경영권 방어에도 한결 여유를 갖게 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대우차를 인수한다면 현대차, 기아차, 대우차를 총괄하기 위한 경영체제 정비가 필수적인데, 자동차 3사를 장악한 MK는 한결 여유로운 위치에서 경영진 보강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되면 MK측이 정 명예회장의 전문경영인 체제화 요구를 전향적으로 수용, 전문경영인의 역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MK 진영의 최고 브레인인 이계안 사장을 비롯, 이충구 사장, 김동진 사장, 정순원 부사장 외에 추가로 중량급 인사가 경영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MK 계열로 거론되면서도 자동차 소그룹에서 빠져 있는 인천제철 박세용 회장, 현대강관 유인균 회장 등의 보강을 점칠 수 있다.

    그러나 대우차 인수에 실패할 경우 MK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룹 내에서 대우차 인수 실패에 따른 책임론이 고개를 드는 것은 물론, 그룹 총괄을 꿈꾸는 MH측의 재공세가 본격화될 가능성도 높다. 6월26일 입찰제안서 제출→6월 말 최우선 협상대상자 선정→9월말 최종계약자 선정으로 진행되는 대우차 입찰 일정은 MK·MH 갈등의 재연과 직접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3부자 퇴진과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현대의 폭탄 선언은 그룹 안팎을 둘러싼 위기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정교한 전략 아래 나왔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 명예회장의 결단이 발표됐을 때 참으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국민들은 언젠가 또 한 번 쓰디쓴 배신감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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