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출입기자 시절 아기에게 젖을 먹이다 잠이 들어 아기를 질식사시킨 주부를 봤다. 그러나 아이를 직접 키워 보면서 아이 키우기는 잠과 벌이는 힘든 싸움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떠들고 다닐 때 직장 동료나 친구들은 대부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 선배들조차 정색을 하고 얘기를 해야만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푸하하하. 니 진짜로 휴직했구나. 그래 아는(애는) 잘 크나?.”
보수적인 고장 대구에서 함께 자란 친구는 낮에 내가 집에서 전화를 받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가 휴직 얘기를 듣고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연락한 친구와 안면 있는 취재원들도 수십명이었다.
“니 보이(보니) 한심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대구에 계시는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정말로 형이 자랑스러워요.”
대학 동아리 여자 후배처럼 나를 진정으로 격려해주는 목소리는 많지 않았다. 소수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동네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영락없이 실업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오늘 쉬시는 날인가 봐요.”
휴직 첫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큰 아이를 태운 어린이집 버스를 맞으러 나온 나를 보고 아파트 경비원은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쉬는 날’이 여러날 계속되자 보기가 민망했던지 마주쳐 인사를 하면 “아, 예”하며 웃기만 했다.
“아주머니가 안 계신가 봐요.”
이웃집 아주머니는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출근하지 않고 낮에 집에 있는 이유를 굳이 캐묻는 사람에게는 그냥 ‘휴가중’이라고 둘러댔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서다. 어쨌든 이웃들은 아침저녁으로 딸아이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고, 또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단지 안을 돌아다니는 젊은 남자를 보면서 ‘이상한 이웃’의 등장을 신기해했다.
아이를 데리고 벤치에 앉아 있을라치면 손주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나 젊은 엄마들이 주로 던지는 말은 경비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오늘 쉬시나 봐요.”였다. 한번은 좀 젊어 보이는 할머니에게 육아휴직 얘기를 했다가 설명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 뒤부터 누가 물으면 휴가중이라고 대답하게 됐다. 볕 좋은 날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단지 안을 슬슬 돌아다니면 곳곳에 나처럼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주부나 할머니들이 그늘진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들 틈에 선뜻 끼어들지 못한 것은 ‘아이 키우는 남자=실업자’라는 편견이 담긴 눈길이 부담스러워서다.
우리 가정문제에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인 곳은 언론이었다. ‘미디어오늘’과 ‘기자협회보’에 나의 휴직 얘기가 실린 뒤 방송사와 잡지사에서 많은 전화가 왔다. 내 이야기가 육아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고 평등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사생활을 공개할 용의도 조금은 있었다.
처음 방송사의 취재요청을 망설임 끝에 수락해 간단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나 한달짜리 육아휴직이 대단한 일인 양 떠벌리는 게 스스로 낯간지럽게 여겨져 결국 방송사에 양해를 구하고 도중에 그만뒀다. 또 언론에 보도된 우리 이야기를 듣고 볼 주위 사람들의 뒷말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우리 집안은 안동 권가에다, 경북 지역이 본거지다. 보수적인 가풍에 아직까지 남녀차별, 남아선호사상도 무척 강하다. 둘째가 아들이었으면 당연히 득남을 축하했을 어른들이 건강하고 예쁜 딸아이를 무사히 얻었는데도 한두 분을 빼곤 전화도 거의 없었다. 축하하는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둘째도 딸이어서 우리 식구들의 기분이 언짢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일부러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남자가 회사를 쉰다는 사실이 텔레비전을 비롯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질 경우 십중팔구 아내에 대한 뒷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여자가 얼마나 별나기에 남편을 휴직까지 시켰을까’ 하는 얘기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아마 고풍창연하신 어머니 눈에는 우리 부부가 한심한 아들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별난 며느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놓인 현실이다.
내가 육아휴직을 고민하게 된 것은 실제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딸 서래는 어머니께서 키워주셨기 때문에 이런 고민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오래 관절염으로 고생하신 어머니는 집 밖으로 출입할 수도, 아기를 안아주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매일의 기저귀와 옷 빨래며 아기 목욕, 밤에 데리고 자기, 가끔 있는 병원 출입과 필요한 물건 구입 등은 우리 부부 몫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특별히 힘들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그렇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그러나 내가 집에서 아이를 키워보니 노인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이 아이 키우는 거였다. 어머니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아 둘째까지 맡기는 게 힘들어졌고 장모님도 아이를 봐주시지 못하는 게 우리가 처한 상황이었다. 막막했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해결방법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됐다. 첫째,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키운다. 둘째,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해 집에 들인다. 셋째, 육아휴직을 낸다.
회사를 그만두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장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직업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대안은 아기가 너무 어린 데다 큰아이까지 있어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됐다. 특히 아내가 남의 손에 아기 맡기기를 원치 않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
육아휴직에는 ‘휴직’이 없다
결국 우리는 임의조항이긴 하지만 법적으로 보장된 육아휴직을 ‘쟁취’하기로 했다. 출산을 포함해 1년까지 육아를 위한 무급휴직을 줄 수도 있다는 게 법에도 또 단체협약에도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고 낳기만 해놓고 생계 또는 자아실현을 한답시고 무조건 아기를 남의 손에 내맡기기보다는 힘들고 기간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우리 손으로 직접 키워보는 편이 떳떳할 것이란 판단도 작용했다. 하지만 형편은 여의치 않았다.
회사에서도 5월부터 시행된 안식월제로 편집국 인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난데없이 남성의 육아휴직 요청까지 받고 보니 이를 허락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인사위원회까지 열어 신청한 6개월 휴직중 1개월만 승인키로 결정됐지만 나로서는 실망이 컸다.
이렇게 시작하면서도 나는 애초에는 남편들이 주말에 아이 돌보듯 대충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는 것 정도의 일과를 생각했다. 그러나 몸으로 부딪친 육아휴직은 그렇게 녹록한 ‘휴직(休職)’이 아니었다. 온전한 주부의 역할, 즉 살림살이를 대부분 감당해야 했다. 밤새 아기 돌보고 아침에 일어나 밥짓고, 큰딸 깨워 밥 먹이고 옷 입혀 어린이집 보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등등. 물론 이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아내가 도와줬다. 예를 들어 나는 요리를 거의 못하기 때문에 내가 아침에 일어나 하는 것은 그야말로 밥이지 아침 식사 준비는 아니었다.
그래도 쉽지 않았다. 아내 역시 퇴근 뒤 여느 남성 가장들처럼 편히 발뻗고 쉴 틈이 없었다. 내가 한다고 하지만 살림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아내 왈, 퇴근 뒤 집 안을 둘러보면 널려 있는 게 일, 눈길 간 곳이 바로 일거리라나.
제일 힘든 것 가운데 하나는 잠 부족이었다. 95년쯤이었을 거다. 경찰출입기자였을 때 어머니 젖을 먹던 아기가 젖에 눌려 질식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나는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누워서 떡 먹다가 목이 막혀 죽은 사람은 봤어도 애 젖먹이다 잠이 들어 아이를 질식사시켰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면서, 특히 육아휴직기간에 둘째를 주로 내가 데리고 자면서 아이 키우기는 잠과 벌이는 싸움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아이를 키워보거나 살림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남자들은 낮에 집에서 놀면서 잠도 안 자고 뭐하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내 경험으로는 낮에 1시간이라도 푹 잘 수 있는 짬이 나지 않는다. 반풍수 주부인 내가 이렇다면 살림을 반들반들 야무지게 하는 주부는 아마 눈코뜰새 없이 바쁠 거다. 게다가 깔끔한 남편이나 시어머니까지 있다면 그 주부는 거의 매일 파김치로 살게 된다. 나도 파김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금요일쯤 되면 숨죽은 배추 정도는 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둘째 딸 지해는 내가 데리고 자면 하룻밤에 2∼3번, 아내가 데리고 자면 3∼5번 깬다. 아이가 나랑 자는 게 편한 거라고 우기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내가 잠귀가 어두워서 지해가 깨서 칭얼거리다 혼자 잠드는 경우가 2번쯤 되는 것이다. 갓난아이는 오줌을 조절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30∼40분 간격으로 오줌을 조금씩 흘려 내보낸다고 한다. 아무리 흡수력이 좋은 기저귀라도 두세 시간이 지나면 축축해져서 아이가 칭얼거리게 된다. 또 두세 시간 간격으로 우유를 찾는다. 한 번 우유를 먹으면 20분 이상 빨기 때문에 밤에 아이 보는 일은 한두 시간 간격으로 깨는 일의 연속이다.
백일이 다가오면서 지해는 한 번 잠들면 3시간 정도 자게 됐지만 그 전까지는 아이와 함께 깨다 자다 하다 보면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창밖이 밝아온다. 다른 주부들처럼 낮에 제대로 살림을 한다면 나도 아이를 안고 우유를 먹이다 아이 위에 엎어지지 말란 법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휴일이면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자고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하룻밤에도 몇번씩 잠을 깨며 아기 보는 일이 군대에서 불침번 서는 일 못지않음을 이제는 안다. 아이를 키워낸 체력과 정신력, 끈기와 인내심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군대 갔다온 남자들 못지않으리란 생각도 든다.
육아휴직중 나를 힘들게 한 또 다른 요인은 자신을 돌볼 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하루에 양치질을 세 번 해본 기억이 없다. 자기 전에 한 번 하는 게 고작이고 그나마도 못하고 잘 때도 있다. 양치질하는 데 3분이면 되지만 그런 여유가 없다. 손에 물마를 시간이 없지만 정작 자기 몸가축은 제대로 못하는 게 주부인 모양이다.
‘주부’로 일하며 생긴 멀티태스킹 능력
집에서 점심을 내 손으로 차려 먹어도 정작 좋아하는 김치찌개 한번 해먹어보지 못했다. 큰아이가 먹다 남긴 밥이나 솥바닥에 눌은 밥, 아침에 먹다 남은 찌개와 나물 등 먹어치워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식탁에 편안하게 앉아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시간도 없으니 이것저것 남은 반찬을 그릇에 때려넣고 밥 넣고 참기름 끼얹어 비벼 먹을 때가 많다.
된장찌개에서 건져올린 시래기에 김치 숭숭 썰어넣고 고추장 얹은 시골비빔밥을 좋아하는 나지만 남은 반찬을 없애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만들어 먹는 잡탕비빔밥은 그리 맛있지 않았다. 군대에서 흔히들 짬밥 많이 먹으면 살찐다고 하는데 꼭 그 꼴이다. 한때 70kg까지 나갔던 몸무게를 온갖 노력 끝에 65kg까지 줄여놓았더니 ‘주부 생활’ 한달 만에 2kg이나 늘었다.
대신 ‘주부’로 일하며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이른바 멀티태스킹 능력이 생겼다. 발로는 흔들침대를 흔들고 손으로는 기저귀를 개면서 불 위에 얹어놓은 국이 끓는 것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보다 더 복잡하고 마음 가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아이가 자는 틈을 타서 세탁기를 돌리고 밥을 가스불에 얹어놓았는데, 아이는 깨서 죽는다고 울지, 압력밥솥은 칙칙거리지, 세탁기에는 섬유유연제를 넣을 때가 됐지…. 이쯤 되면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다 난다. 지금 나는 발로 정확한 리듬에 맞춰 흔들침대를 흔들어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대견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남자들은 주부의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놀면서 애도 제대로 못 키우고 뭐하는 거야?”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퇴근해 돌아온 남편이 넥타이를 풀면서 아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부의 일에 대해 이처럼 무지한 게 우리 사회 보통 남성들이다. 한달 동안 주부(主夫)로 일하면서 주부(主婦)가 하는 일은 남자들이 직장에서 하는 일 못지않게 힘든 것임을 알게 됐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밥짓고 빨래하고, 즉 일상생활의 3요소인 의식주에 필요한 노동을 거의 전부 주부가 하는 것이다. 몇년 전 재정경제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의 가사노동가치가 국내총생산의 25%나 된다고 한다.
미국의 한 금융회사에서는 주부의 가사노동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50만달러에 달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주부가 하는 일의 종류가 1만가지가 넘는다고 분석한 자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집에서 한번 해보라. 웬만한 대기업 부장 이상의 연봉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노동강도가 세고 또 기술이 필요한 일들이다.
갓난쟁이를 기르며 걱정하던 일이 있는데 태변을 본 뒤 며칠이 지나도 똥을 제대로 누지 않았을 때다. 녀석이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할 리도 없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하얀 얼굴을 잔뜩 붉히며 두 발을 하늘로 쳐들고 아랫배에 힘을 주는 시늉만 했다. 그때 아내와 나는 “지해 똥 눴어?”라는 말이 아침인사였다.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준다는 가루약을 우유에 타서 먹인 덕분인지 며칠 뒤 지해는 용을 쓰며 똥을 조금 쏟아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아내는 기쁜 나머지 건넌방에서 큰아이를 데리고 자고 있는 나를 깨우러 방문 앞까지 달려왔다가 생각을 돌이켜 그냥 갔다고 한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가 태어나서 짙은 쑥색의 태변을 본 뒤 얼마 뒤부터 싸는 똥의 빛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황금색보다 훨씬 밝고 개나리 꽃잎보다 훨씬 맑고 투명한 그런 황홀한 똥색을 보면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저 똥으로 염색을 하면 너무나 고운 빛깔이 나오겠다고 감탄을 했다.
기저귀를 들고 화장실에 뛰어가 변기에 털어 넣을 때마다 그 아름다운 빛깔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까워했다. 지금은 황금색과 쑥색이 뒤섞인 그야말로 똥색인 똥을 아무런 미련없이 변기에 버리지만 그 빛나던 똥색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말못하는, 아니 온몸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아이와 대화하는 법을 체득했다. 처음에는 아이가 울면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알기가 힘들었다. 기저귀도 만져보고 젖병도 물려보고….
하지만 조금씩 지나면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지해의 울음소리는 두 가지였다. 첫 소리에 잔뜩 힘을 줘서 터져나오듯이 ‘응∼애’라고 시작해 약간 악을 쓰듯이 울면 십중팔구는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응아 소리의 높이와 간격이 비교적 규칙적이면서 조금은 앓는 듯, 호소하는 듯한, 콧소리를 담은 울음소리는 젖을 달라는 뜻이다. 안방에 뉘어놓은 지해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녀석의 상태를 알아내 기저귀를 갈아줄지 아니면 우유를 탈지 몇번 맞힌 뒤 아내에게 자랑까지 했다.
그런데 차츰 지나니 두 가지였던 언어가 복잡해졌다. 그래봤자 세 가지로 는 데 불과하지만 지해 쪽에서는 언어능력이 자그마치 50%나 는 것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녁 7시쯤이었을까. 기저귀를 만져보니 오줌을 싼 것도 아니고, 젖병을 물려주어도 자꾸 보채는 것이었다. 얼러도 보고 달래도 보고, 안고 방안을 거닐어도 봤지만 울음은 악을 쓰는 것으로 변해갔다. 울화가 치밀었다. ‘이걸 그냥 확 던져버려’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이성을 찾았다. 이틀이 지나서야 잠덧임을 알았다.
그러던 지해는 두 달이 다 되어갈 무렵부터 사람 얼굴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면 쬐끄만 입으로 옹알이를 하거나 활짝 웃었다. 아이가 웃을 때 그 기쁨은 뭐라 형언하기 어렵다. 무릎 위에 앉혀놓으면 까르르 소리를 내며 방긋방긋 웃던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는 지금도 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와 함께 나를 보고 그렇게 방긋거리던 둘째 아이를 떼놓고 복직해 첫 출근하던 날에 무거웠던 마음도 잊을 수 없다.
저녁에 방치되는 아이 곁엔 TV만
아이가 둘 이상인 주부가 일과 중 가장 힘든 때는 큰애가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때부터 자기 전까지일 것이다. 나도 큰놈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오후 5시부터 아내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밤 9시까지가 가장 힘들었다. 서래는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려 내 손을 잡는 순간부터 입에 무엇이 들어갈 때까지 “아빠, 배고파”를 염불하듯 한다. 잼 바른 식빵, 우유에 탄 죠리퐁, 떡, 고구마, 방울토마토, 수박, 참외 등을 대령해야 한다.
시장기가 가신 뒤부터는 “심심해”라며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 저녁준비도 해야 하고 작은놈도 봐줘야 하는데 큰놈이 다리를 잡고 늘어지며 놀아달라고 조르면 그저 난감할 뿐이다. 작은놈은 울고, 압력밥솥은 칙칙거리고, 큰애가 켜 놓은 텔레비전 소리에 전화벨까지 울릴 때면 넋이 나가는 것 같다. 이때는 지해가 방치되는 때이기도 하다. 작은놈의 자지러지는 울음을 외면하고 다른 일을 할 때면 마음이 짠하다.
그렇다고 큰애를 제대로 돌보는 것도 아니다. 집안일을 하려면 아이를 떼어놓아야 하는데 텔레비전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서래는 지금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텔레비전 5개 채널의 프로그램을 모두 외웠는지 리모컨으로 채널을 자유자재로 돌려가며 주로 만화영화인 어린이 프로그램을 본다. 아이를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지 혼자서 한숨만 쉴 때가 많았다. 아마 이 문제는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저녁 무렵 학원이나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방치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이들이 만날 텔레비전만 본다고 부인을 다그치는 남편들은 하루나 이틀쯤 온전히 아이들과 생활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아파서 온가족이 힘들던 때도 있다. 나에게서 시작된 감기가 두 아이에게 옮아 작은놈은 목에 가래가 끓고 코가 막혀 실제로 ‘말못할’ 고통을 겪었다. 코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목에 걸린 가래 때문에 기침을 하느라 하룻밤에도 두세 차례 먹은 우유를 토하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제대로 잠도 못 잤다.
방안 온도와 습도를 높이기 위해 가습기를 틀어놓고 젖병소독기와 주전자까지 동원해 안방에서 물을 끓여야 했다. 김이 자욱한 안방 한켠에서는 가습기가 퐁퐁퐁 습기를 뿜어대고 다른 쪽에서는 휴대용 버너 위 주전자와 젖병소독기의 끓는 물에서 수증기가 올라가는 광경을 생각해보라. 옷과 이불이 눅눅해지고 살갗도 축축해지고 기분까지 축 처졌지만 그 난리를 친 덕분에 아이는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다고 첫애까지 알레르기성 자반증이라는 흔하지 않은 병에 걸려 입원하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열흘동안 집과 병원을 번갈아 오가며 아이들을 돌보는 비상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의사는 자반증이란 혈관에 염증이 생겨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병인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죽을 수도 있는 중병이라고 겁을 잔뜩 주었다. 실제 입원 첫날 서래는 두 발이 퉁퉁 부어 한걸음도 걷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기 안에 생긴 염증으로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통을 호소했다. 한 사람은 집에서 걸핏하면 먹은 것을 토하는 어린것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밤새 배가 아프다고 징징대는 큰애를 돌보느라 거의 녹초가 되곤 했다. 아내와 나는 두 아이의 부모가 되는 통과의례를 이렇게 치렀다.
육아는 힘든 일이지만 개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도 있다. 다른 게 아니라 기저귀를 빨아 너는 일이다. 천기저귀는 일회용과 달리 한 번 오줌을 싸면 곧바로 갈아줘야 하므로 빨래를 꽤 자주 해야 한다. 지금은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세탁기에 넣어 돌리지만 처음에는 매일 아침 손빨래를 했다.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 빨래판에 기저귀를 문질러 빠는 일은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두 번에 한 번 꼴로는 삶아 빨아야 하기 때문에 손도 많이 간다. 하지만 기저귀를 널 때면 그 모든 고생이 싹 잊혀진다.
햇살이 눈부신 날 희디흰 기저귀를 탁탁 털어 널 때의 그 기분이란. 기저귀를 널 때마다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기저귀를 너는 꿈을 꾼다. 마을길에 늘어선 가로수에서 매미가 울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흰 기저귀 아래로 아이가 기어다니는 그런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기저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부인 셰리가 얼마 전 환경을 고려해 새로 태어나는 아이 때는 천기저귀를 쓰겠다고 했다는데 우리 집은 첫째 때부터 천기저귀를―밤이나 외출 때는 일회용 기저귀를 쓰지만―썼으니 적어도 이것만큼은 블레어 부부보다 앞선 셈이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 안에 갇혀 지내면서 점심 때 식당에 떼지어 몰려다니는 주부들의 심경을 이해하게 됐다. 집안일을 하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욕구가 꿈틀꿈틀 솟아난다. 전업주부들이 집 안에서 보내는 세월에 비하면 내게 주어진 한 달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대여섯 차례나 이 핑계 저 핑계로 심야 외출을 감행해 해방감을 맛봤다. 밤 9시 아내가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뛰쳐나가 새벽 한두시까지 술자리를 지킨 적도 서너 번이나 됐다. 바깥일에 지쳐 돌아온 아내에게 저녁 먹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옷 갈아입을 틈도 주지 않고, 두 아이에게 시달릴 일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집을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몰려다니는 주부들의 탈출욕구
날아갈 듯한 발걸음과 절로 나오는 콧노래. 술맛은 또 얼마나 좋은지. 이전에는 자정 무렵이 되면 내가 먼저 술자리를 파할 것을 제안하곤 했는데 휴직 기간에는 내가 먼저 일어나자고 한 적도, 술자리를 1차에서 끝낸 적도 없었다. 주부들의 일탈사례가 가끔씩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대부분의 주부들은 그렇지 않을 거다. 남편들이여, 오랜만에 외출한 아내의 귀가가 늦다고 화내지 말자. 밖에서 쓸 술값으로 그럴 듯한 안주거리를 준비해 아내와 도란도란 술잔을 기울이는 맛은 또 어떤가.
집으로 찾아온 친구들과 수다떠는 것도 적잖은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를 알고는 회사 동료나 취재원들이 전화를 걸어오면 놀러 오라고 닦달하곤 했다. 나의 초대를 인사치레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진짜로 사람이 그리웠다. 그런 점에서 휴직 첫날과 마지막날 우리 집을 찾아준 두 선배가 너무 고맙다. 한 선배는 NGO에서 일하는 분이고 다른 한 선배는 월간지에서 일하다 지금은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는 분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의 길이가 상대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나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한나절이나 되는 그 시간이 왜 그리 짧은지.
주부들이라고 해서 쓰잘 데 없는 수다만 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나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깨끗한 먹을거리와 농촌 살리기에 관심 있는 주부들의 모임이 꾸려져 첫 모임을 누구 집에서 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모임이 어찌 의미 없는 수다겠는가. 대부분의 주부모임도 그럴 것이다. 아이들의 건강한 교육과 환경친화적인 쓰레기 처리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고 정치 및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다.
한 달의 짧은 경험으로 명색이 OECD가입국이라는 우리나라가 참으로 미개한 사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은 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에 대해 우리 사회, 나아가 국가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출산휴가 외에 국가가 해주는 일이 무엇인가. 아이를 키우는 일은 순전히 각 가정에 맡겨져 있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는 친조부모나 외조부모가 아이를 맡아 기르는 경우가 많다.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게 기쁨이라고 말하지 말라. 주말에 찾아온 손주들을 본다면 모르되 매일 기저귀 갈아주고 우유 먹이고 안아서 얼러주고 해보라. 젊은이도 힘든데 노인들은 어떻겠는가. 젊은 시절의 온갖 의무와 희생에서 놓여나 인생을 정리하며 이제 좀 여유를 누려야 할 우리 부모님들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육아인력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육아 문제를 사회가 도와주지 않으면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양성이 평등한 사회의 건설 또한 애당초 불가능하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에 낀 5월6일, 큰놈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카네이션 축제를 한다고 해서 작은놈까지 온 가족이 몰려갔다. 원장님 인사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아이들이 커서 딸아이는 엄마 같은 여성이 되어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고 아들은 아빠 같은 어른이 되어서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다고 한다면 비록 사회적인 성취는 남보다 덜했을지라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씀이었다.
또 우리 아이들이 좀더 커서 무엇을 좀 알 만할 때가 되면 그때부터 잘해주어야지 하지만 이렇게 미루다 보면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없게 커버린다는 것, 어릴수록 부모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것들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생생하게 남아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자양분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평생을 살면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인 자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그런 아빠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두 딸과 아내가 고맙다. 육아휴직이 계기가 돼 앞으로 교육, 환경, 여성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이전보다 훨씬 절실하게 피부에 와닿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