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50년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9-28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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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해 10월 한·미 양국은 올해 6월 말까지 노근리 사건 진상을 모두 조사해 종합보고서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미국은 시간만 끌고 있다. 이 시점에 ‘신동아’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6·25 당시 노근리 상황을 전한 인민군과 미군 문서 여러건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문서는 미군이 6·25 당시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노근리 사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문서를 보유한 주체가 미국 정부였으니만큼 미국은 1950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사건을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지난 해 9월 말 AP 통신은 6·25 당시 미 제1기갑사단과 25사단 사령부 명령서 2건을 공개했다. 이 명령서를 보면 당시 미 육군 25사단장인 윌리엄 B 킨 소장은 1950년 7월26일 야전지휘관에게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해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또 제 1기갑사단 사령부도 명령서에서 “피란민이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전선을 넘어오는 자에게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령서 하나로도 관계자들은 중대한 전쟁 범죄 행위로 처벌될 수 있다.

    미국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1949년 제정된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은 전쟁 상황에 충돌 당사국은 민간인과 전투원, 민간 물자와 군사목표를 구별하며, 따라서 그들의 작전은 군사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전쟁이나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 집단학살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대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학살하고 수십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숨어지내던 독일인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붙잡아 집단학살죄로 처벌한 사례가 있다. 베트남전과 관련해서도 미국 군사법원이 밀라이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범인 당시 미군 현역 대위를 처벌한 사례도 있다. 미국은 제네바협약의 초기 가입국인데다, 6·25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사령관이 협약 적용을 선언하면서 북한군에도 이를 적용하자고 요구한 사례가 있다.

    더구나 AP통신은 당시 노근리 현장에서 직접 기관총을 쏜 미군 병사의 증언을 제시했다. 이 증언은 피해자측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보도 직후 한·미 합동 조사단이 꾸려졌고, 조사단은 6·25전쟁 50주년이 되는 2000년 6월 말까지 사건 진상을 모두 조사하고 종합보고서를 내기로 약속했다. 또 2000년 3월쯤 중간보고서를 내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이 사건은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사람들도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약속한 6월이 다 돼가는데도 종합보고서는 나올 기미가 없다. 약속한 중간보고서도 나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사건의 한 관계자는 “미 국방부는 한국 국방부에 당시 노근리 지역이 적성 지역임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미국이 당시 노근리가 있던 영동 지역의 빨치산 활동이 어떠했는가와 지역 주민 성향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일부 언론은 지난해 9월 말 AP통신이 최초 보도 당시 제시한 발포 명령서 존재 자체를 아예 적시하지 않고 핵심 관련자의 증언을 부인하는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또 사건을 조사하는 주체인 미국 군부는 AP통신이 밝혀낸 미 1기갑사단과 25사단사령부 명령서가 노근리 학살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를 쟁점화하고 있다. AP가 보도한 문서는 사단 사령부 명령서이므로 ‘노근리’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군이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신동아’는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 비공개 문서 여러 건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문서들은 재미학자인 방선주교수와 노근리 피해자대책위의 정구도씨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새로 발굴해 ‘신동아’에 전한 것이다. ‘신동아’가 공개하는 이 문서들은 모두 6·25 당시 미군과 북한군이 작성한 것이다. 물론 전쟁중에 작성된 문서라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여러 건을 동시에 검토해보면 그 상황이 매우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 제1기갑사단 8월17일 문서

    미 제1기갑사단 7연대 1대대는 1950년 8월15일 39.7-50.4 지역에서 2건의 북한군 문서를 노획하였다. 이 문건은 사단본부의 정보참모부에서 같은날 오후 7시에 인수하여 17일 오전 8시에 대략 번역해 놓고 등사하여 관련된 부서에 배포하였다. 첫 문건은 8월2일자로 제목이 ‘복수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북돋우자’이고 둘째 문건은 8월8일자로 ‘산하부대 주의 사항’과 비슷한 것이다. 미군이 영역한 번역본만 발견되고 원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문을 보고 그 원래 구절을 추측할 수 밖에 없다.

    현재 미 국방부와 한국 국방부도 이 문서를 갖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문건을 노획한 미 1기갑사단 7연대 1대대는 노근리 학살 사건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밝혀진 2대대와 작전 지역이 거의 겹치는 부대이다. 이 문건을 공개한 방선주 교수는 “이 미군 문건은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지 5일도 안 돼 미군이 철로 굴다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일을 인민군이 산하 부대에 주지시킨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래서 이 문서는 노근리 사건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본자료가 된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8월2일자 문건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제1군단본부

    분류: 비밀

    1950년 8월2일

    제목: 복수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북돋우자

    수신:산하 모든 부대

    1. 인민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인민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민과 분리되어서는 안되며, 인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적군은 인민군과 인민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갖은 책동을 다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죄없는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있다. 매국노 이승만은 지난 5년 동안 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남한에 살고 있는 노동자 수만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학살을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까지 도발했다. 현재 제국주의자들은 직접 전쟁에 참가하고 있고, 또 민간인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인민의 명령을 따르는 인민군 앞에서 이 사악한 적들은 괴멸되고 있다. 이제 놈들은 조선에서 거의 쫓겨나고 있다. 인민군과 인민 사이의 강고한 연대를 두려워하는 적들은 조선인민군이 아직 해방시키지 못한 지역에 있는 사랑스런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들을 처형하고 있다.

    서울과 그 남쪽에서 수집된 증거에 따르면 도합 1만1148명의 민간인이 처형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적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용서받지 못할 민간인 살육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있다. 영동에 있는 기찻길 터널에서 적들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방법은 낮에는 공군기의 기총사격이었고, 밤에는 기관총 사격이었다.

    영동 근처의 터널에서는 약 100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엄마의 젖가슴에 달라붙은 아기도 있었다. 이들 중 누구도 일어나지 못했다. 이 시체더미 가운데서도 10여명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닷새 동안이나 시체더미에 깔려 있다가 달아날 수 있었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이 생존자 10명은 자신들의 복수를 해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우리는 이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전투 요원들에게 아래 지침을 이슈화할 것이다.

    1. 모든 문화부문 요원들은 영웅적으로 싸우고 인민군 병사들에게 영동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선전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적들을 전멸시킬 것이다.

    2. 각 중대의 문화부문 요원들은 명령에 따라 이 선전을 충분히 퍼뜨릴 것.

    3. 문화 부문 요원들은 인민군 병사들에게 적들이 이런 야만스런 행동을 이후에도 계속할 것임을 알릴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이 실제로 가능한 한 빨리 인민들을 이런 살육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임무임을 깨닫도록 할 것이다.

    4. 이 정보를 인민군의 모든 병사들에게 알릴 것.

    제1군단 군사위원 김재욱

    문화부 사령관 최종학

    다음은 월북작가 이태준이 로동신문 1950년 8월5일자에 김천발로 쓴 ‘전선으로’라는 기사다. 이태준은 일제시대에 ‘시는 지용(정지용), 문장은 태준’으로 불릴 정도로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이 문서는 로동신문 원본 그대로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패망도주하면서 조선의 애국자들과 민주주의자들과 일반 인민들까지 참살하는 식인종 만풍은 괴뢰군경들에게만 있지 않았고 그들의 스승인 미국놈들에게 있어 더 악질적이었다는 것이 놈들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통하여 자명하여졌거니와 영동군 한 곳에서만 보드라도 임계리와 주곡리에서 평화인민 2000여명을 학살하고 달아났으며 황간에서는 기차터널 속에 피난한 촌사람 백여명에게 굴 양쪽으로부터 박격포를 들어 쏘았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중상자 한 명과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젖먹이 하나 이외에는 모주리 처참한 죽엄을 당하였고 죽은 사람들 속에는 나체로 놈들에게 능욕을 당한 처녀와 젖가슴에 탄환을 받은 시체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방선주 교수는 “당시 작가 이태준은 8월4일 무주에서 연락장교의 차로 영동에 들러 다시 327호 탱크에 편승하여 추풍령을 넘고 김천지방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이태준이 언급한 영동 지방의 학살 이야기는 사건 발견 후 불과 6일 사이에 영동 지방에서 채집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50년 8월26일자 ‘민주조선’에 종군기자 전욱이 쓴 내용이다. 전욱 기자는 같은 내용을 8월19일자 ‘조선인민보’에도 썼는데 8월26일자 ‘민주조선’ 보도가 좀더 간결하다.

    이 문서도 한글 신문 그대로 미국립문서보관서에서 잠자다가 발견되었다.

    월북작가 이태준의 기록

    “29일(7월29일을 말함) 해질 무렵이었다. 대구 방면으로 진격하는 우리 인민군 부대 장병들이 황간역 북쪽 로응리에 다달았을 때 들과 철교 밑에서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참혹한 장면에 부닥쳤다. 동지점 일대의 들의 초목과 철교밑 시냇물은 피로 물들여 있고 두겹 세겹씩 덮인 시체로서 처참한 수라장을 이루어 우리 인민군 전투원들의 가슴을 어지럽게 하였다. 발디딜 곳조차 없는 현장에는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약 400명의 시체가 널어져 있었고 그중의 젊은 녀성들은 반라체가 되어 거꾸러져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우리들은 별안간에 어린애 목소리에 놀랐다. 6,7세 가량이나 보이는 소녀가 등에 젖먹이를 업고 벌벌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 뒤에 머리가 흰 로파가 따라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사유를 물었더니 그들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우리들을 쳐다 보고만 있었다. 우리들은 재빨리 부대에 뛰어가 우선 우유와 빵을 가져다 그들에게 먹이었다. 그랬더니 차차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말을 주고받고 보니 소녀는 계산리에 사는 최순자였고 그 등에 업은 젖먹이는 자기 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흰 로파는 소녀들의 이웃집에 사는 김사랑씨였다.

    로파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여섯 식구가 모두 들에서 학살되었고 최순자 소녀의 일곱식구도 학살되어 자기들은 간신히 살아 남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계속 동지점에서 벌어진 미군의 입에도 담지 못할 학살 사건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로응리’는 ‘노근리’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전욱은 실제로 영동에 종군기자로 갔던 사람이다. 이는 미군의 또다른 노획문서가 증명하고 있다.

    ‘민주조선’ 1950년 9월7일자에 실린 종군작가 박웅걸씨의 수기에서도 노근리 사건이 나온다. 이 문서도 ‘민주조선’ 원본 그대로 발견되었다.

    “영동은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해방되었는데 그 날은 왼 거리가 문자 그대로 불바다였다. … 영동에서 황간이라는 거리로 진공해 나가는 도중에서 나는 수십명의 피란민을 만났다. 늙은이와 부인들과 5,6세 가량되는 어린애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부상을 당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다섯살 가량 되는 어린 사내아이가 나의 팔에 매어 달리어 “아저씨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도 죽었어요. 나는 어떻게 해요”하며 운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들은 그 웃마을에 사는 농민들인데 미군들과 국방군들이 피난을 시켜준다고 사람들을 모주리 끌고 나와 기차턴넬 안에다 몰아넣고 미군이 직접 기관총소사를 퍼부어서 모주리 죽여버렸는데 그들은 그 속에서 탄환이 빗맞아 살아 나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인민군대 동무들과 같이 그 굴안에 들어가 보았다. 어구에서부터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피로써 땅이 젖었는데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들의 자지러지는듯한 신음소리가 들려 온다. 굴 안에는 200여개의 시체가 그냥 산처럼 쌓여 있다. 그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새빨간 피덩어리 하나가 우리쪽으로 기어 나오며 “아빠 아빠”하고 부른다. 자세히 살펴 보니 그것은 세 살도 못되는 어린 아이였다. 이 천진스러운 어린이는 자기의 방패가 되어 총에 맞아 쓰러진 어머니의 젖가슴을 파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니 아빠가 왔다고 기어오는 것이었다.

    우리 동무 하나가 이 어린이를 모-터찌클에 태워서 다음에 진공해 나간 부락에 갖다 주고 아직 죽지않은 부상자들에게는 군의 대대동무들이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또 그 아랫 마을 미군 포진지가 있던 곳에서는 묘령의 여성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이 시체는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그리고 반나체로 의상을 입힌 채 학살한 것이었다. …

    7월31일 모-타찌클부대 동무 하나가 전사들 앞에서 우리들이 그제 영동 아래서 목도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황산을 진공해 나올 때였다. 우리들은 도중에서 부상한 피란민들의 한떼를 만났다. 그들은 그 웃동리에 사는 농민들인데 미군이 피난을 시켜 준다고 끌고 나와 굴안에다 쓸어 넣고 기총소사를 퍼부어 수백명이 죽고 그중에서 용케 살아 나온 사람들이라 한다. 우리는 그 굴안에 들어가 보았다. 수백의 농민들이 시체가 산처럼 싸여 있고 피가 도랑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이것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려는 미군이 유엔의 간판을 쓰고 감행한 일이다. …”

    6·25전쟁 당시 북한은 저명한 작가들을 전선으로 파견하여 전쟁 상황을 기록하게 했다. 위에 인용한 기사를 쓴 작가들은 실제로 북한이 현장에 파견한 기자들이다. 이는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북한군 노획문서(노획문서 SA2005 7/80(box 142)가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박웅걸과 이태준이 모두 들어 있다.

    다음은 작가 파견 일람표이다.

    『민병균 대구방면 병으로 인하여 평양으로 감, 리춘진 동해안으로 남진

    한태천 군사령부에서 사업, 박웅걸 상주 대구방면

    박팔양 군사령부에서 사업, 김영팔 춘천 방면

    윤두현 동해안으로 남진, 리태준 진주 방면

    김사량 대구방면 종군, 김남천 김천 방면

    전재경 대구 방면, 림화 김천 방면

    남궁만 대구방면 부상 입원, 송영 충청도와 전라도농촌 토지개혁과 선거 사업 취재

    리동규 대전 방면, 박세영 동상

    리정구 진주 방면, 리북명 김천 방면

    김북원 조치원 방면, 김조규 동해안으로 종군

    한봉식 강원도 영월 』

    또 이 문서를 보면 ‘민주조선’ 기자 김인환, 김문규는 대전 대구 방면, 전욱은 탱크 105사단을 따라 영동으로 갔다가 대구 방면으로, 선관영은 대구 방면, 김교철·최예순은 동해안 춘천 방면, ‘로동신문’ 기자 임동수는 경북 방면, 현준극은 안동 대구 방면, 김전은 안동, 송학용은 상주, ‘민주청년’ 기자 최일규는 안동대구 방면, 통신사 기자 송영복은 강원도 천안 영동(3사단 7연대 배속)으로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모든 문서들은 미국이 한국전 당시 노획해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난해 AP통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이 사건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다음 문서들은 미 육군성 주한·미군 배상사무소가 노근리 피해자 대책위 정은용 위원장에게 그동안 보낸 답신 내용이다. 1994년 10월28일 회신이다.

    “귀하께서 김영삼 대통령께 보낸 1994년 7월6일자 진정서는 본 배상사무소에서 처리하도록 이첩되었습니다. 귀하의 진정 내용을 살펴보면 1950년 한국동란 당시 미군들이 적군이었던 인민군과의 교전 중에 미군들에 의해 한국인들이 대량 살상되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피해는 직접적으로 군대가 적과의 전투 과정에서 야기된 것으로 사료되는 바입니다. 미 합중국은 합중국 군대가 전투과정에서 야기시킨 귀하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법률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1997년 10월8일자 회신은 다음과 같다.

    “본 공한은 1950년 7월27일 자기들의 부모 또는 형제 및 자매들이 부상 혹은 피살 당했다고 주장하며 정신웅씨를 비롯한 44명의 지방민들이 제기한 행협 손해배상 신청사건 사건번호 청주 배심 97-행-002호에서 동 046호에 대한 회신입니다. 이들 신청인들은 6·25 사변 당시 연합군에 의한 사격과 폭격에 의하여 자신들의 가족들이 부상 또는 피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의하면 당시 피해자들이 전투 지역을 피하여 피란길에 오르다 군인들에 의하여 부상 또는 피살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배상 신청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를 근거로 기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로, 이들 배상신청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며,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그 장소에 과연 미 제1기갑사단 병력이 주둔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입증 자료 또한 없습니다. 한편 이 사건 배상신청을 발생시킨 것으로 주장되는 그 사건이 군인들의 전투 활동중 직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미군대협정 제23조, 민사청구권 제11항은 전투활동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의한 배상신청은 그 지급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설혹 주장하는대로, 사실 불의의 인명피해가 그 시점, 그 장소에서 발생했다 해도, 이들의 배상신청은 상기 조항에 의하여 금지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손해배상신청 사건들은 적용될 수있는 소멸시효에 의하여 그 신청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군대 지위협정에 의한 손해배상신청 시효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3년 이내에 제출해야 하며, 미 육군규정 제27-20조에 의한 손해배상 신청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2년 내에 제출해야 합니다. 이건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는 무려 47년 전에 야기된 사건임으로 이들 신청의 지급은 불가능합니다.”

    이 답신 가운데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그 장소에 과연 미 제1기갑사단 병력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입증 자료가 없다’는 인민군쪽 자료와 미군쪽 전쟁 기록을 들여다보면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노근리 사건은 7월26일과 29일 사이에 일어났다. 먼저 북한쪽 기록.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1950년 8월1일자 ‘조선인민군’ 기사다.

    “각 전선에서 인민군 부대들은 미군부대들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영동을 해방시킨 인민군 부대는 7월29일 황간을 해방시키었다.”

    노근리는 영동군 황간면에 속한 곳이다. 이 기사를 보면 7월29일 무렵에야 인민군이 황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미군이 26일과 29일 사이에 현장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미군쪽 전쟁 기록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방선주 교수가 공개한 미 제1기갑사단의 ‘전쟁일기’ 7월29일자다.

    “29일 오전 5시30분, 야간에 포사격과 전차포 사격을 받은 7기갑연대 1대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제1대대는 2대대보다 앞서 철수하여 계획에 차질이 생겨 철수가 지연되었다. 8시20분에는 1대대와 2대대가 황간 기차역을 지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 피란민들을 계속하여 철수시키고 있는데 많은 불편을 가져왔다.”

    미국 답변 거짓투성이

    이 기록을 보면 7월29일 오전까지도 미군이 노근리 지역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1999년 3월22일 미국교회협의회의 요청에 대한 미 육군성의 답신이다. 이 답변은 AP보도가 나오기 직전에 미국 정부가 낸 회신이다. 영문 원본을 한글로 번역했다.

    “미 육군은 한국 기독교회협의회가 만든 노근리에 관한 첨부자료를 검토했습니다. 또 미육군의 1950년 7월 한국전쟁 기록도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미 육군이 노근리에서 한국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아무런 정보(information)도 없었습니다. 미 육군은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한국전 당시의 미 육군 기록에 대해서도 조사했습니다. 이들이 조사한 기록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1949년~1954년 육군 군무국장 기록

    b.1950년 7월7일~8월1일, 미 1기갑사단 5연대, 7연대, 8연대의 작전 기록

    c.1950년 7월7일~8월1일, 미 25사단 24연대, 27연대, 35연대 작전 기록

    d.1950년 7월, 미8군 전쟁 기록

    e.1952년~1954년 미육군 법무감 기록, 미육군 전쟁 범죄 기록

    f.1917년~1954년 육군 비밀 사찰 기록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는 미 육군이 가장 극심한 고통과 혼란을 겪으며 북한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던 시기였습니다. 아군 부대의 잦은 이동, 피란민 감독의 어려움, 제한된 시야에서 전투해야 하는 고초, 공산주의자들이 지뢰를 폭파하기 위해 피란민을 인간방패로 삼는 점, 피란민으로 위장 침투하는 적군, 공군 지원 부족, 야포 지원 부족 등 갖은 악조건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민간인들이 잠재적으로 희생될 위험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사 결과, 미 육군이 1950년 노근리 양민들의 죽음에 관련되었다고 주장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건 당시 북한군 문서와 미군 문서를 보면 미국 당국의 답변은 거짓투성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측이 이렇게 답변한 데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방성이 노근리 사건을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답변했을 가능성. 둘째는 관련 문서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렸을 가능성이다. 어느 경우라도 미국의 도덕성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해 시간을 끌면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령 당시 영동 지방의 피란민 가운데는 좌익분자가 섞여 있었다는 물증을 잡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약속은 단호하다. 1977년 6월8일 제네바에서 채택돼 1978년 12월7일 발효된 제네바협약 제1의정서는 ▲충돌 당사국의 군대 구성원, 민병대, 의용대 ▲충돌 당사국에 속하며, 이 영토에서 활동하는 기타 의용대(지휘관이 지휘하는 조직적 저항운동 구성원, 멀리서 식별할 수있는 표지를 가질 것,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할 것, 자신들의 작전을 수행할 것) ▲정규군에 편입할 시간이 없어 침입하는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든 자(단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고, 전쟁법규 및 관행을 존중하는 경우에 한정)가 아니면 무조건 민간인이라고 규정했다.

    또 민간인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우면 민간인으로 간주하고, 민간인이 아닌 사람이 민간인 무리에 섞여 있다 할지라도 이 무리의 민간 성격을 박탈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비록 이 협약이 1977년에 채택되었다고 하지만, 미국이 노근리 사건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가더라도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아직까지 이 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전세계에 자국 군대를 파견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들이 앞으로도 전쟁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은 자국 군법에 따라 개별 병사를 처벌한 적은 있지만 국제법에 따라 미군 병사의 전쟁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고 배상한 사례가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런 배상 요구를 미국 국익과 세계 전략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1998년 로마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을 때 가입하지 않았다. 노근리 문제는 미국의 이런 선례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시효문제가 걸림돌

    노근리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시효다. 현재 한·미 간의 실정법에 비추어보면 노근리 문제는 시효가 끝난 사건이다. 따라서 형사처벌은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법해석에 따라 시효를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지만 전쟁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 사회 관례다. 실제로 1997년 7월 미국 하원의원 15명이 2차대전 때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바 있다.

    비록 한국과 미국이 가입하지 않았지만 유엔은 1968년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시효 부적용 협약’을 맺은 바 있다. 2차대전 이후 열린 나치전범 재판에서도 연합국은 시효를 적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법원 또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재판에서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일본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게리 맥두걸씨도 보고서에서 일본의 책임은 시효에 따라 소멸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노근리 사건의 범죄 성격을 확실히 밝혀야 한다. 미군의 당시 작전이 민간인 생명을 유린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고 벌어졌다면, 또 이런 민간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다면 이는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인 범죄로 규정될 수 있다. 6·25 당시 미군이 민간인을 살육했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북한군의 선전 문건뿐만 아니라 미국 기자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방선주 교수가 새로 발굴한 미국 AP통신사의 종군기자 스윈톤의 목격기를 인용해 본다.

    “사랑하는 부모님, 지금 깊은 밤의 차가운 천막 속입니다. 예기된 중공군 반격이 전개될 것인가 보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각은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부모님께 편지 쓰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마지막 진격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우리 기총소사로 수백명의 피란민들이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애입니다. 저들은 행길 옆에 기어가듯 죽어 넘어지고 있습니다. 비행기의 50mm 구경 기관총이 그들을 사격할 때 모친들은 한두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아기들을 업고 품고 가고 있습니다. 아기들은 맞지 않고 모친의 잔등에서 떨어져 나가 길옆에서 얼어죽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전쟁을 보았지만 이것은 가장 잔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우리 공군은 이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적이 피란민 행렬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적의 군인 하나 죽이는데 25명의 민간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할 만한 일입니까? 민간인을 적으로 만들어, 우리가 빨갱이들에게 손실을 입힘으로써 얻는 효과를 더욱 갉아먹고 있지는 않는지요? 제 견해로는 예스, 그러합니다.…1951년 1월30일”

    6·25전쟁은 국제법인 국제인도법과 제네바협약이 적용되는 전쟁이다. 국제인도법의 핵심은 군사 목적에서 벗어난 불필요한 학살과 파괴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은 전쟁 범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민간인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피란민 행렬에 인민군이 섞여 있었다 할지라도 민간인 행렬을 전투원으로 취급하는 것이 미군 작전 지침이나 일반 명령, 혹은 묵인 사항으로 굳어져 있었다면 이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전쟁 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 스윈톤 기자의 기사를 보면 미군이 노근리 사건과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노근리 사건은 범죄 행위를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의미가 크다. 만약 6·25전쟁 이후 노근리 사건이 제대로 사법처리되었다면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현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6·25전쟁에 대한 해석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남북 분단과 한·미 관계 때문에 더욱 어려웠는지 모른다. 노근리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가 6·25전쟁을 극복하는 중요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한결 성숙한 한·미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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