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에스키모족의 침묵, 라틴족의 수다

  • 권삼윤 문명비평가

    입력2006-10-04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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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유럽에 살면서도 알프스 이남의 라틴계 민족은 게르만족보다 말이 많다. 같은 아시아에 살면서도 열대지역 주민들은 수다를 즐기고 동북아 쪽 사람들은 극히 말을 아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
    네덜란드는 참 특이한 나라다. 그들이 350년간 지배했던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여러 차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식민지배 방식이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과 비교할 때 너무나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가장 먼저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동인도회사는 형식적으로는 주식회사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로부터 외교, 군사, 사법, 행정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아 행사했던 총독부 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자카르타 교외에 ‘바타비아’라는 이름의 항구를 건설하고 이 땅에서 나는 커피, 향료, 담배 등을 자기네 나라로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그들은 이런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피지배 국민의 인간성까지 개조하려 했다. 이와 관련된 얘기를 자카르타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우리 교민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언어정책

    “이곳 학교에서는 운동장다운 운동장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현지인들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죠. 그들의 대답인즉 ‘네덜란드 사람들은 우리 인도네시아 청소년들이 넓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보면 호연지기를 키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네들에게 대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뛰어놀지도 못하게 운동장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도네시아는 천연자원이 풍부해 누구나 탐내는 나라였다. 네덜란드는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19세기 말 인도네시아에 어렵사리 들어왔던 미국인 시드모어 여사는 당시 상황을 ‘동방의 정원, 자바’란 책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인도네시아 총독부는 자기네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영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어느 누구도 인도네시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들의 독특한 지배방식이 외부로 새나가 국제문제가 될 소지를 막는다는 게 그 첫째 이유였다. 게다가 그들은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네덜란드인보다 더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심어주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더욱 폐쇄적이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가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네덜란드는 1942년 일본이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인도네시아인들의 해외여행이나 유학도 철저히 막았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엔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이 암스테르담에 가서 공부하고 거기서 무슨 자격증을 땄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 사실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배국이 피지배 국민에게 자기네 언어를 쓰라고 강요하는 것이 보통인데, 네덜란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네덜란드 말을 가르치지 않은 대신 총독부 요원들이 현지 부임에 앞서 자바어를 익혔던 것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인들은 총독부 요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면전에서 흠을 들추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어도 눈만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독부 요원들은 현지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효과적인 식민지배 방식인가.

    네덜란드인들이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전했던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의 작은 섬 데시마(出島)에 상관(商館)을 열어놓고 그곳 쇼군(將軍)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으면서도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이처럼 혹독하게 굴었던 것이다. 손안에 들어오지 않은 일본에는 웃는 낯을 해야 했지만, 이미 손안에 들어온 인도네시아에게는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식민지배의 1차적 목적은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데 있다. 경제적 이득을 오랫동안, 아니 영구히 취하기 위해서는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종속적 구조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의 언어를 가르친다. 일본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이 또 그렇게 했다.

    그 결과 세계의 언어지도가 딴판으로 변했다. 영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언어(사용인구 3억2200만명)로 부상했고, 스페인어가 그 다음인 세 번째(2억6600만명), 포르투갈어는 여섯 번째(1억7000만명), 프랑스어가 열두 번째 큰 언어로 성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네덜란드의 언어정책은 특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어가는 말, 되살아나는 말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덕분(?)에 영어를 익히게 되어 이를 통해 민족간, 지역간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인도는 여전히 다언어 문화권이다. 인구 10억명이 쓰는 언어가 260개나 된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당 평균 사용인구는 400만명 남짓 된다. 그러나 벵골어와 힌두어의 사용인구가 각각 1억8900만명(세계 4위), 1억8200만명(세계 5위)이나 되므로 고작 수백 명이 쓰는 언어도 있다. 이중 영어를 포함해서 15개가 공용어다. 인도의 지폐에는 이들 15개 공용어가 나란히 적혀 있는데, 인도 지폐에선 그래서 문자가 바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디자인인 셈이다.

    인도의 공용어 가운데는 사용인구가 겨우 2000명밖에 되지 않는 산스크리트도 포함돼 있다.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이 감안됐기 때문이다. 인도의 고전 중의 고전인 장편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그리고 ‘마누법전’ 등이 모두 산스크리트로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지금의 주류 언어인 힌두어도 그 뿌리를 캐다 보면 산스크리트와 닿게 되므로 결코 홀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12억명의 중국인들은 뜻글자인 한자를 공유하고 있어 서로 다른 말을 쓰더라도 의사소통을 해낼 수 있다지만 인도인들은 그런 매개체가 없는데도 용케 한 국가를 이루고 산다. 인도는 이런 사정 때문에라도 ‘신비의 나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 한 나라에만도 260개나 되는 언어가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언어가 있을까. ‘내셔널 지오그래픽’ 99년 8월호에 따르면 유사 이래 이 지구상에 등장한 언어는 1만여개이며, 지금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중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 후쯤에는 다시 그중의 절반 정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가 자기 고유의 언어를 배우지도 사용하지도 않는 언어가 상당수 있음을 그 이유로 꼽았는데, 1200개에 이르는 아메리칸 인디언 언어의 대부분, 아프리카 언어 700개 중 상당수, 그리고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소수 민족 언어가 그럴 운명을 맞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긴 세계에서 16번째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한국어도 국제경쟁력 제고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공용어의 지위를 흔들려는 주장이 일고 있는 마당에 군소 언어가 그런 운명을 맞을 것이라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대세를 쫓는 무리도 있지만 대세를 거역하며 자기 고유의 것을 지키려는 무리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화, 통합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카탈루냐어를 국어로, 스페인어를 외국어로 가르치고 있고,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도 간판이나 문서에 바스크어를 먼저 쓰고 스페인어를 그 다음에 쓴다. 프랑스의 브리타뉴 지방에서는 그동안 브리타뉴어를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인구의 20%로 줄었지만,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고유 언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벨기에의 경우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론 지역과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나눠졌다.

    체코어를 쓰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어를 쓰는 슬로바키아는 1992년 별도의 국가로 독립했으며, 슬로베니아 서부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은 비록 소수 민족이긴 하나 이탈리아어 신문을 발행하고 재판에서도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며, 이탈리아어로 학교수업을 받는다. 그 동부의 헝가리인들이 사는 지방에서는 헝가리어가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다. 옛 유고연방에 속해 있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다같이 남슬라브계 언어를 사용하지만 독립에 즈음하여 각기 다른 문자를 갖게 됐다.

    작은 국가, 소수 민족이 사는 길은 대세에 휩쓸려 자기 고유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키는 데 있음을 유럽의 여러 나라는 이렇게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성서를 부족어로 번역

    한번 생각해 보라.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빨며 배운 고유의 말(이를 우리는 ‘모국어’라고 하지만, 다언어 문화권인 서양에선 ‘어머니의 혓바닥-mother tongue-’이라 한다)을 버리고 ‘표준말’이니, ‘세계공용어’니 하는 것을 쓴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를.

    경쟁력을 위해서, 또한 다수를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소수에 대한 다수의, 또한 힘있는 자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 똑같은 모습,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나는 어떤 존재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여러 언어를 갖게 됐다고 설명하는 구약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저주라기보다는 차라리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난 곳 방언’,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언어로’라는 기치 아래, 각 부족어로 성경을 만들어 부족민 스스로 읽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성경 번역사업을 벌이고 있다. 80년대부터 위클리프 성서번역공회가, 아직 제 말로 된 성경을 갖지 못한 부족민들을 대상으로 이 일을 펼치고 있는데, 그 주요 타깃은 아시아다. 그것도 이슬람 세력권인 서아시아다.

    이는 이제 기독교가 기성 종교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포교의 한계선상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현장에선 이들을 ‘실(SIL)’이라고 부른다(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세계의 1095곳에서 1571개 언어 프로젝트를 통해 성경번역 작업을 벌이고 있다). 파키스탄을 여행할 때 이 일에 종사하는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이에 관해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성경번역 선교사는 현지 활동에 앞서 상당한 기간에 걸친 전문교육을 받아야 하며, 현지에 나가서는 철저한 언어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토대로 특정 부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며, 선교사는 그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부족이 자신의 말과 글로 성경을 읽고, 그리하여 외부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회를 꾸려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도 했다. 그는 “문자는 없이 말만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집한 말들을 컴퓨터에 수록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힘들며, 컴퓨터가 있더라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라 이 작업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큰 어려움은 이런 기술적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작업을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해나갈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무종교 지역도 아니고, 이슬람이라는 강력한 기성 종교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기독교 선교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 공개적으로 일을 벌였다간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뻔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인상을 주지 않도록 보건위생, 문맹퇴치, 수자원 개발 등과 같은 적절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현지 정부의 허가를 얻어 현지인들과 만나고, 그렇게 해서 그들과 가까워지면 서서히 그곳의 언어 조사작업을 벌여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 선교사는 지금도 서아시아 일대에서 성경번역 일을 하고 있는데, 언젠가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 지역 언어에는 히브리어처럼 자음만 있습니다. 예를 들어 ‘ㄱㄴㄷ’이라고 적으면 ‘가나다’ 혹은 ‘간다’ 또는 ‘건대’ 등으로 스스로 모음을 붙여 읽습니다. 아랍어가 히브리어와 마찬가지로 자음언어인데, 이 지역이 이슬람화된 후 아랍글자를 사용하게 되면서 이렇게 됐어요. 이 부족이 쓰는 말에는 글자가 없는데도 공용어의 영향을 받아 모음이 약합니다. 단어를 조사하러 나갔다가 주민들이 ‘아’와 ‘애’ 발음을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무척 헷갈렸어요. ‘아에이오우’는 물론 복모음까지 분명한 우리 언어문화로는 이해하기 어렵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잣대를 버리고 그들이 가진 잣대를 얻으려 힘쓰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관점, 그들이 말하는 배경 등을 이해함으로써 한 언어의 분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선 우루두(Urudu)어가 주류 언어다. 힌두어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으나 이보다는 아랍어적 요소가 강한 것이 우루두어다. 그래서 무슬림이 많이 사는 파키스탄의 주류 언어가 됐다.

    우루두어는 예사로운 언어가 아니다. 우루두어로 주고받는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도 즐거울 만큼 소리가 아주 리드미컬하다. 뭄바이(옛 봄베이)에서 카라치로 가는 파키스탄 여객기에서 들은 기내방송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음악이었다.

    카라치에서 만난 유학생은 “우리말에 흔치 않은 비음, 후음 같은 것이 많아 그렇게 들린다”고 설명했다. 이곳 대학의 우루두어 박사과정에 있는 그는 “우루두어는 힌두어와 아랍어, 이란어 등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그들보다 자모수가 더 많아 그만큼 다양한 소리를 낸다”고 했다. 그들의 입은 어떻게 그처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이랬다.

    “파키스탄 사람들의 구강근육이 매우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강근육뿐 아니라 활동이 많은 팔과 다리에도 근육다운 근육이 없어요.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운 곳에 오래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더운 곳에 사는 사람이 단단한 근육구조를 갖고 있다면 아주 견디기 힘드니까요.”

    떠버리와 ‘3S’

    소리는 입과 코만 움직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복부와 폐, 기도, 목구멍 등이 함께 움직여줘야 한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말에는 대개 북방민족에 비해 비음, 후음이 많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몸 전체를 사용하여 말을 하는 것이다. 우루두어, 아랍어, 이란어 등은 모두 이런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언어다.

    이 때문에 아라비아인들은 자기네 말에 대해 ‘신의 선물’이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세계 어디에서건 그곳이 이슬람의 모스크라면 이슬람의 경전 ‘코란’은 오직 아랍어로만 읽힐 뿐이다. 나는 서아시아 지역 여행중에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코란의 독경소리 ‘아잔’에 새벽잠을 깨곤 했지만 그 소리가 참으로 아름다워 아랍어는 ‘신의 선물’이라는 말을 그때마다 실감하곤 했다.

    더운 지방 사람들은 몸속에 있는 더운 기운을 입으로 토해내야 한다. 그래야 적정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자연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이런 풍토 내지 신체조건이 이곳을 다언어 문화권으로 만든 게 아닐까 한다.

    인도네시아와 인도, 시리아, 요르단 등지를 다니면서 값이 싸다는 이유로 봉고차 형태의 미니버스를 자주 이용했는데, 핸들을 잡은 운전기사들은 저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운전중에 승객들과 잡담을 나눴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사막 속의 고대도시 유적 팔미라로 가는 버스기사는 5시간 내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승객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거기다가 연신 손목을 비트는 제스처까지 곁들여 불안감을 더했다. 그들의 ‘대화 즐기기’는 버스나 시장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일상의 공간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형 국제회의에서도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대개 이들이다.

    반면 이런 자리에 나온 우리나라나 일본 대표들은 말이 적다. 전문지식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언어장벽을 넘지 못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것이다. 국제회의 석상에서 이렇게 말이 적다 보니 ‘3S’라는 놀림도 당한다. 발언하지 않고(silent), 누가 질문해도 대답 대신 씩 웃기만 하고(smile), 그것도 여의찮으면 조는(sleep) 시늉을 하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건 좋은데, 최근에는 영어만 잘하면 세상 사는 방법을 모두 터득한 것처럼 떠드는 사람이 있어 문제다. 그건 우리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 나아가 문화란 게 무엇인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누천년에 걸쳐 쌓아올린 문화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문화를 아주 간단한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 자체가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닌데도 말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문화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데 있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아직 인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느끼듯이 한국인들은 대체로 말을 아낀다. 누가 자신의 심중을 서슴없이 말로 표현하려 하던가. 우리는 그런 문화를 가꿔왔다. 중국 역시 그랬다. 인도 스님들이 산스크리트로 장황하게 써놓은 불전을 북방의 중국인들은 겨우 몇 개의 문자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의미의 함축이면서 동시에 말의 절약이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종(禪宗)에서는 언어의 세계를 ‘갈등(葛藤)’이라 표현할 정도로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의 선문답을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의 절약에 기인한다. 절약된 말을 복원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말을 잘하고 말을 많이 하는 문화가 싹틀 수 없다. ‘말 많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며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게 된다.

    에스키모는 ‘無言 문화권

    유럽에서도 알프스 이남의 라틴계 민족들이 북방의 게르만계에 비해 말이 많다. 자정에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떠나 다음날 아침 9시쯤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닿는 특급열차를 탔을 때, 독일 지역을 여행할 때는 보지 못했던 광경을 만났다. 여기에선 승객들이 밤새 대화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었다. 어쩌다 잠이 들었더라도 눈을 뜨는 순간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어김없이 밝은 목소리로 “부에노스 디아스(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말을 건네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것은 말의 의미를 쫓기보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잠시도 못 견디는 그들의 성미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애정 표현에도 아주 능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늘어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해답을 아주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캐나다에서 만난 에스키모인들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말이 없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들의 언어에는 자모수도 적고 어휘수도 적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말을 적게 한다는 명백한 물증이다. 추운 곳에서 살아가려면 몸속의 에너지를 밖으로 방출해서는 안 되는 데다, 추운 날씨가 근육마저 굳게 하여 말하는 것을 더더욱 힘들게 하게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동북아시아와 북유럽권은 에스키모의 무언(無言) 문화권과 열대·아열대의 다언(多言) 문화권 사이에 있는 ‘과언(寡言) 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과언 문화권 사람들은 말이 적은 대신 사물을 직관적으로 본다. 눈치 또한 빠르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을 하느냐 마느냐로 사랑을 확인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심전심이란 게 있지 않은가.

    언어문화는 말과 글로 이뤄진다. 말은 글보다 훨씬 일찍 생겨났고, 지금껏 문자를 갖지 못한 말도 있다. 말의 역사는 3만년도 넘지만 글의 역사는 50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명은 문자의 발명과 함께 시작됐으니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문명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메소포타미아에서 언어의 발생에 관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래서 수긍할 만한 것이다.

    인류의 첫 문자는 쐐기문자였다. 그것은 뜻글자였다. 소리글자인 알파벳은 그로부터 꽤 세월이 흐른 뒤인 기원전 15세기경 동지중해를 무대로 해상무역을 하던 우가리트인들이 고안했다. 알파벳의 원형이 발견된 시리아의 우가리트 유적지를 찾았을 때 관리인은 품속에서 손가락만한 진흙 막대기를 꺼내 보이면서 “이것은 세계의 모든 알파벳의 조상이 되는 우가리트 알파벳 점토판이다. 만약 이 알파벳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직 달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우가리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인들과는 달리 농경이 주업이 아니라 지중해 상권과 오리엔트 상권을 이어주는 해상상업 민족이었다. 따라서 매우 효과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필요로 했다. 효과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되기 위한 언어의 필요충분조건은 정확성, 신속성, 편의성, 실용성인데, 소리글자 체계인 알파벳은 이와 같은 요구를 충족시켰다. 그게 바로 ‘우가리트 알파벳’이었다.

    우가리트인들의 뛰어난 장사수완과 효율적인 문자체계는 곧 이웃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인들에게도 전해졌고, 이들은 우가리트의 것보다 더 편리한 ‘페니키아 알파벳’을 만들어냈다. 페니키아 문자를 빌려 형성된 대표적 언어로는 아람어(Aramaic)가 있다. 아람어는 아시리아와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선 공용어였고, 예수도 사용했으며, ‘다니엘서’ 등 일부 성서도 이 언어로 기록됐을 만큼 서아시아 사회에선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7세기 말, 아라비아의 이슬람 세력이 북상하자 페르시아, 인도, 위구르 등지로 밀려났다가 결국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박물관의 무하마드 카두르 부관장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한글(Korean Alphabet)이 아람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라고 하지 않는가. 아람어가 어떤 언어인지도 몰랐던 데다 그런 얘기도 처음 듣는지라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소르본 대학의 언어학자 장 페브레르 교수가 20세기 초에 펴낸 ‘문자의 역사(Histoire de l’Ecripture)’에 그렇게 썼다면서 이것이 유럽 언어학계에선 꽤 잘 알려져 있다고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고고학자인 그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한글이 아람어에서 나왔다? 듣고 나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선 아람어가 어떤 언어이고, 그것이 그후 어떤 길을 걸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와의 연결고리도 파악될 테니까. 그러나 이 낯선 땅에서, 그것도 언어에 문외한인 내가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쩌다 전문가를 만난다 해도 아람어 한마디 못하는 주제에 그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가슴이 탔다. 그러나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니달 쿨리란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쿨리는 다마스쿠스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대학에 아는 사람이 있는 데다, 영어를 잘해 통역 노릇를 해줄 수 있으며, 차도 갖고 있어 내가 가자는 곳이면 어디라도 갈 친구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년 전 요르단의 암만에 있는 LG전자 사무소에서였다. 그는 LG전자의 다마스쿠스 현지 사무소 직원이었는데, 그의 누이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살고 있었다. 그는 서방측의 경제제재로 먹을 것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이에게 뭔가를 보내주고 싶어했는데, 그곳으로 가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뒤 내가 바그다드에 간다는 얘기를 그곳 직원에게서 전해 듣고 나를 찾은 것이었다. 그때 그는 누이에게 보낼 꾸러미를 건네주며 “다마스쿠스에 오면 극진히 모시겠다”고 했던 것이다. 쿨리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는 내게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어라” 하고선 금방 내가 있는 호텔로 달려왔다.

    우리는 먼저 다마스쿠스 대학으로 가서 아람어의 권위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대신 고대 아랍어 전문가를 만났다. 그는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 충분한 대답을 줄 수는 없노라면서 그가 아는 아람어의 역사를 들려줬다.

    아람어가 살아 있는 곳

    그에 따르면 아람어를 쓰는 이들은 이슬람 세력에 밀려 인도 등지로 동진했는데, 그 무리에는 늘 네스토리아 선교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경교(景敎)로 알려져 있는 네스토리아교는 동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태어난 기독교의 일파지만 교리상의 문제로 주류 기독교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했다. 그래서 아직 기독교가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서 활동해야 했기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동방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네스토리아교 이야기가 나오는데, 쿠빌라이 시절 몽골의 많은 귀족들이 네스토리아 교도였을 만큼 위세를 떨쳤으니 15세기 에 중국으로 갔던 우리 학자들이 이들과 만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훈민정음이 ‘중국말과 다름’을 목표로 했으므로 한자에서 힌트를 얻기보다는 14세기에 문자개혁을 이룩한 몽골의 예(쿠빌라이는 새로운 파스파 문자를 창안했다)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한글과 아람어와 연결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수메르어와 히브리어 등에 능통한 조철수 박사가 ‘훈민정음은 히브리 문자를 모방했다’는 주장(‘신동아’ 97년 5월호)을 제기한 바도 있으니만큼 그쪽과의 교류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를 정확하게 구명하기 위해서는 10∼15세기 중국, 인도, 몽골을 통한 동서 문화교류의 역사와 함께 이들 언어와의 비교연구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시리아를 떠나기에 앞서 말룰라(Maalula)란 곳을 찾았다. 다마스쿠스에서 서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작은 산골마을인데 이미 사어가 된 지 오래인 아람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니버스로 한 시간도 더 걸려 도착한 그곳에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슬람 세력을 막아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기이한 형태의 거대한 바위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 바위산 중턱부터 파랗거나 연분홍 혹은 하얀 색깔의 원색 가옥들이 절벽에 매달린 듯 서 있어 별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으레 있음직한 모스크는 보이지 않는 대신 시리아 정교회의 교회당과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 두 개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교회당 내부는 중세를 떠올릴 만큼 고색창연했다. 마침 예배가 없는 날이라 아람어로 기도하는 광경은 보지 못했으나 아람어 기도 내용을 담은 테이프는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람어 문자를 쓰지 않았다. 오직 그 말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말에는 ‘흐’라는 후음이 많이 들어 있어 아랍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소리가 참으로 리드미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나는 그들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아람어 문자를 기원 전후 무렵 시리아의 사막을 무대로 로마와 오리엔트 세력 간에 균형을 잡아주려 했던 팔미라인들이 남긴 유적과, 팔미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개무역으로 융성했던 하트라의 유적(이라크 북부 소재) 등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글과의 연관성을 밝혀내기란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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