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호

네덜란드가 독립전쟁 벌인 까닭도 ‘돈’ 때문

[‘돈’으로 본 세계사] 가톨릭신자 카를 5세가 교황청 공격한 것도 '돈' 때문

  •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입력2025-07-0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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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 침략전쟁 때 중국 ‘화약’, 유럽으로 전파

    • 화약 무기 개발 + 군사혁신 → 전투력 급상승

    • 소총수 앞에 선 ‘갑옷 입은 기사’ 무용지물

    • 독일 용병이 ‘로마 약탈’한 까닭, ‘급여 체불’

    • 용병제도가 ‘기성복’이라면 상비군은 ‘맞춤복’

    1320년경 유럽에서 발명된 화포는 1346년 백년전쟁 초 크레시 전투에서 처음 사용됐다. 위키피디아

    1320년경 유럽에서 발명된 화포는 1346년 백년전쟁 초 크레시 전투에서 처음 사용됐다. 위키피디아

    중세 이후 15세기까지 동방의 군사력은 유럽을 압도했다. 1241년 발슈타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독일의 기사단은 몽골의 기병대에 처참하게 패했다. 몽골의 수장 오고타이가 갑작스레 사망하지 않았다면 아마 유럽 전역이 몽골군에게 수난을 당했을 것이다. 1453년에는 오스만제국이 난공불락이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고, 1470년에는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그리스 남부 네그로폰테마저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1509년 포르투갈은 다우 해전에서 인도양을 제패하던 오스만 해군을 격파했고, 1529년 오스트리아군은 수도 빈에서 술레이만 1세의 오스만 군대를 막아냈다. 1571년 신성동맹이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의 함대를 격파했다. 그 후 오스만제국은 유럽 국가들을 더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유럽의 전투력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비결은 바로 화약 무기의 개발과 군사혁신에 있었다. 대포와 총기가 사용되면서 전쟁의 양상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고, 이와 함께 군대를 운영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장궁병(張弓兵)이 쏘는 화살이 전장의 하늘을 덮고 중기병(重騎兵·heavy cavalry)이 말 달리며 전장을 누비는 중세의 전쟁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과거와 크게 다른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액운과 재앙 쫓던 ‘화약’, 무기가 되다

    화약 무기의 개발은 화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래 화약의 발명은 무기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시작됐다. 화약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불이 붙은 약’이다. 7세기 중국에서 연단술사(鍊丹術士)들이 불로장생의 단약(丹藥)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발명됐다. 화약은 오랫동안 그 이름처럼 약재로 쓰였고, 이후 액운과 재앙을 쫓기 위한 불꽃놀이에 쓰이다가 8세기 이후 군사 무기로 처음 사용됐다. 이런 화약이 13세기 몽골이 침략전쟁을 시작하면서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대포(大砲·cannon)는 처음에는 화포(火砲·artillery)라 불렸다. 1320년경 유럽에서 발명된 화포는 1346년 백년전쟁 초 크레시 전투에서 처음 사용됐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영국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영국군이 가지고 있던 화포 덕분이었다. 처음 화포는 성벽을 방어하는 용도로 쓰였으나, 점차 화포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공격용으로 쓰이게 됐고, 15세기 들어 군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무기가 됐다. 화포를 적극 전쟁에 활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샤를 7세였다. 그는 전국의 기술자들을 모아 화포의 성능을 개선했고, 이때 개발된 화포를 기존의 것과 구별하기 위해 ‘대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1453년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것은 바로 대포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유럽만 대포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백년전쟁이 종식되는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디 2세는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헝가리 출신의 우르반이 제작한 ‘바실리카 대포’였다. 우르반은 처음 동로마제국에 대포의 제작을 제안했다. 하지만 경제적 여력이 없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거절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디 2세를 위해 대포를 만들었다. 결국 이 대포가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바실리카 대포는 길이가 8m에 이르고 270kg의 포탄을 1㎞ 이상 날릴 수 있는 화력을 가졌다. 그 덕에 두께가 11m에 달하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대포가 전쟁에서 본격적인 전략무기로 등장한 것은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전쟁에서였다. 1483년 프랑스 국왕이 된 샤를 8세는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오스만제국을 꺾고 유럽을 제패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마침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국왕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자 75문의 포와 포병대를 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당시 샤를 8세의 군대는 용병이 아닌 프랑스인 상비군(常備軍)으로 이뤄졌고, 주력부대는 중기병이 아니라 포병이었다. 

    프랑스는 그동안 대포의 성능을 계속 개선해 가볍고 기동성이 향상된 대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포 양 측면에 포이(砲耳)가 있어 수레 위에 대포를 올려놓았고, 전투 중에 좌우로 돌려 사격할 수도 있었다. 또한 코닝이라는 화약 처리를 통해 불발탄 비율을 낮추고 대포의 화력을 크게 올렸다. 샤를 8세는 대포를 통해 6개월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엄청난 수의 대포와 그 성능에 놀랐다. 잘 훈련된 포병 부대에 중세의 성은 모래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포의 등장은 기존의 전쟁 양상을 완전히 바꿨다. 대포가 성을 무너뜨리면서 성(城)을 높이 쌓고 위에서 방어하는 수성전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포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돈이 대포를 만들었다

    대포 제작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돈이 대포를 만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5세기 영국에서 청동 대포 1문의 제작 비용은 20~30파운드로 당시 기술자의 10년치 수입과 맞먹었고, 프랑스에서는 100리브르로 당시 병사 30명의 연봉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대포 하나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 짐작이 간다. 철제 대포가 개발되면서 청동 대포에 비해 단가가 낮아졌지만, 여전히 고가였다. 전쟁의 본질이 돈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지만, 화약 무기가 나오면서 전쟁에 드는 비용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대포와 함께 화약을 이용한 총기(銃器)도 등장했다. 처음 나온 화승총은 화약에 성냥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발사돼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위험한 무기였다. 15세기 중반 이후 화승총의 문제점이 개선되면서 16세기 이후에는 점차 머스킷(Musket)으로 개량됐다. 총을 발사하는 격발장치에 잠금장치가 연결됐고, 총을 지지하고 표적을 겨냥하기 위해 개머리판이 추가됐다. 총신의 길이가 1m 정도로 늘어남에 따라 정확도도 개선됐다.

    1503년 체리 놀라 전투는 총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최초의 전투였다. 샤를 8세의 후계자인 루이 12세가 이탈리아를 다시 침략하면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에스파냐 군대에 대패한다. 에스파냐군은 소총 부대와 독일 용병의 장창 부대로 구성돼 있었는데, 제방 뒤에 포진한 독일의 장창 부대가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하는 동안 에스파냐의 화승총 부대는 총탄을 퍼부었고, 프랑스 중기병과 스위스 용병은 이러한 방어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에스파냐의 테르시오(Tercio) 방진이다. 이로써 샤를 8세가 이뤄낸 프랑스의 무적 신화는 10년도 못 돼 막을 내렸다. 에스파냐군은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화승총의 위력을 만방에 알렸다.

    1527년에 벌어진 카를 5세의 로마 약탈(Sacco di Roma)은 총기로 무장한 에스파냐 군대의 위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거대해진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고 반(反)합스부르크 코냑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카를 5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음에도 교황청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신교도인 독일 용병 2만여 명을 고용해 로마 교황청을 공격한 것이다. 이익이 된다면 종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민군과 바티칸을 방어하는 스위스 용병이 용감하게 싸웠으나 이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급여 체불로 불만이 쌓인 독일 용병들은 로마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반년 가까이 이어진 약탈과 학살로 로마 인구는 5분의 1로 줄었고,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권도 추락했다.

    소총수가 전쟁을 주도하면서 갑옷을 입은 기사는 전쟁에서 점차 무용지물이 돼갔다. 화승총이 갑옷을 뚫으면서 중기병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고, 명예의 상징이던 중세의 기사단도 이에 따라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1556년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에스파냐 왕으로 즉위했다. 1568년에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1571년에는 오스만제국과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에 고무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신교도들로부터 되찾아오겠다는 결심을 한다. 마침 신대륙으로부터 은이 유입되며 국가 재정이 튼튼해진 것도 이 결심에 힘을 보탠다. 이 크나큰 실책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의 북부 7주가 1572년부터 1609년까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 전쟁을 말한다. 여기에 종교전쟁인 30년전쟁(1618~1648)을 포함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에스파냐는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만제국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유럽 최강국으로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막대한 군비가 지출됐다.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은과 금으로도 군비를 감당할 수 없자 에스파냐는 무역을 통해 점차 부를 늘려가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세금을 거두기로 한다. 

    과중한 세금에 신교도에 대한 탄압이 더해지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처음에 에스파냐의 은 선박을 습격하는 등 소극적 저항운동을 하던 네덜란드인들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알바 공작이 에흐몬트 백작, 호른 백작 등 신교도 지도자들을 종교재판으로 처단하자 에스파냐에 대한 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홀란드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북부 7주는 1581년 독립을 선언하고 오라녀공 빌럼 1세를 초대 총독으로 하여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제식훈련의 원조 마우리츠 백작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된다. Gettyimage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된다. Gettyimage

    전쟁 초기에는 테르시오 방진과 독일 용병을 앞세운 에스파냐가 압도적으로 우세를 보여 에스파냐가 승리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1587년부터 마우리츠 백작이 지휘관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마우리츠는 전쟁에서 무기체계도 중요하지만, 군대를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 이를 위해 군인들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훈련하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는 용병이 아닌 상비군 중심으로 군대를 재편했다. 그리고 복잡한 화승총의 사용법이 소총수의 몸에 완전히 익도록 사격의 세부 동작마다 이름을 붙이고 각 동작에 해당하는 구령까지 정해 훈련을 거듭했다. 현대 군대까지 이어져 온 제식훈련도 이때 마우리츠 백작이 만든 것이다. 보병들이 종대로, 횡대로 선형진(線型陣)을 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훈련했고, 총을 발사한 병사가 자연스럽게 후열(後列)에 가서 재장전하는 동안 두 번째 열의 병사가 총을 쏨으로써 마치 기관총처럼 연속 사격이 가능하게 했다. 이렇듯 네덜란드는 상비군 중심의 체계적 훈련, 소대 중심의 효율적 군 편성, 부사관 제도의 운용 등 군사 혁신을 통해 연대가 강한 강력한 군사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군사 혁신 덕분인지 네덜란드군은 1600년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에스파냐군에 압승을 거둔다. 이후 에스파냐는 계속되는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서 에스파냐의 전투력은 급속도로 약화했고,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독립이 국제적 승인을 얻게 되면서 전쟁이 종식된다. 에스파냐에는 정말 뼈아픈 일이었다.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에스파냐는 이 전쟁 이후 하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에스파냐의 테르시오가 말해 주듯 중세부터 근세 전반까지 유럽 군대의 핵심 전력은 용병이었다. 이 시대의 전쟁과 군사 운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병제도를 알아야 한다. 고대에 용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세 후반 봉건제가 무너지고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자, 용병 사업은 점차 수익성 높은 비즈니스가 됐고 용병은 일반적인 군사 운영 방식이 됐다. 왕과 황제의 돈이 군사 기업가, 모병 지휘관, 용병, 대포 제작자 그리고 자금을 제공한 금융업자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 

    군사 기업가의 군대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오랜 기간 유지됐다. 군주의 패권욕과 군사 기업가의 이익 추구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은 계속 일어났다. 용병 고용은 전쟁을 시작하려는 군주가 모병 지휘관, 즉 군사 기업가와 계약을 맺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전쟁은 상비군에 기반을 둔 국가 행위보다는 오히려 군주가 군사 기업가에게 하도급을 주는 민간사업에 가까웠다. 주력부대가 상비군이었던 프랑스조차 중요한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는 용병을 고용했다. 용병 비즈니스의 핵심은 신용이었다. 일단 모집해 전쟁을 시작한 후에 군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군인들은 모병 지휘관의 재산과 명성을 믿고 전투에 참여했다.

    남부 독일, 가장 국제화된 용병 시장

    남부 독일은 전쟁 사업의 발원지이자 가장 국제화된 용병 시장이었다. 이는 남부 독일의 풍부한 신용 덕분이기도 했지만, 작은 분쟁과 전투가 끊이지 않은 신성로마제국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이 용병에 대한 계속된 수요를 창출해 냈다. 특히 유명한 용병은 남부 독일의 장창병(長槍兵)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 부대였다. 이들은 장창을 써서 적군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고, 어깨를 맞댄 밀집 사각 대형으로 전진하면서도 적군의 보병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용병 시스템은 원래 스위스연방에서 나온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에 굴복할 의향이 없던 알프스의 주들은 민병대를 조직해 자신들을 방어했는데, 이들의 용맹성이 알려지자 다른 나라들이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것이다. 

    스위스 용병은 부르고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명성을 떨쳤고, 이후 에스파냐의 국토 회복 전쟁, 초기 이탈리아 전쟁 때도 활약했다. 스위스 용병을 부러워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를 모방해 독일 장창병을 육성했는데, 이것이 란츠크네히트 부대의 시작이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란츠크네히트 용병이 스위스 용병보다 많아진다. 스위스 용병과 달리 란츠크네히트는 전업 용병으로, 용병 시장이 커지면서 급속도로 늘어났다. 전쟁은 계속해서 일어났고, 이 전쟁이 빨아들인 막대한 자금은 용병들의 급료와 훈련 자금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시스템은 전쟁의 수레바퀴를 계속해서 돌리면서 전쟁을 양산해 냈다.

    전쟁에 용병 시스템이 유리한지, 상비군 체제가 유리한지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상비군 중심의 프랑스군은 용병 중심의 에스파냐군에게 몇 번이나 패했지만, 마우리츠 이후 상비군 체제로 전환한 네덜란드군은 에스파냐군에 승리를 거뒀으니 말이다. 용병제도가 기성복이라면 상비군은 맞춤복이었다. 용병제도는 평시에는 용병이 필요 없고 전시에 신속하게 군인을 모집하여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충성심과 규율이 약해서 통제가 쉽지 않았고 불만이 쌓이면 바로 반란, 약탈 등으로 이어졌다. 상비군 체제는 평시에도 군대를 유지하고 훈련할 수 있어 장기 전략이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당장에 돈이 많이 들었다. 이러한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둘 간의 경쟁에서 상비군이 이겼다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근대 국가의 성립으로 상비군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용병제도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유럽의 군대는 16세기를 지나면서 세계 최강으로 변모해 갔다. 여기에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돈’이었다. 신대륙 발견과 활발해진 무역으로 창출된 막대한 돈과 부가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군인들을 모집하고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다. 돈의 움직임을 따라 군사 패권도 옮겨갔다.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을 주도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함에 따라 스페인의 군사 패권은 네덜란드로 이동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도 그리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전쟁은 돈’이라는 공식은 근세부터는 거의 예외 없이 들어맞았다.

    근세로 들어서면서 대세가 된 군주정체(君主政體)도 서유럽 군대의 굴기에 큰 역할을 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을 실현이라도 하듯, 군주는 더 큰 패권을 원했고, 이런 군주에게 전쟁은 불가피했다. 군주는 전쟁을 계속 일으켰고, 전쟁에 이기면 재정이 풍족해져 더 많은 전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부와 전쟁 간의 선순환 아닌 선순환이 일어나면서 서유럽에는 강력한 근대 군사 국가가 등장했다.

    이렇듯 군주의 욕망, 무기와 군사혁신, 무역으로 축적된 부, 군사 기업가와 용병 시스템이 서로 연결되면서 중세 말 이후 유럽에는 전쟁이 계속됐다. 처음에는 대포, 거기에 더해 총기로 무기 개발이 이루어졌고, 그에 적합한 군인의 역량 개발 그리고 전투 및 군대 운영 방식이 개선됐다. 이렇게 하드웨어(H/W) 혁신과 소프트웨어(S/W) 혁신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계속되는 전투에서 혁신 아이템들을 바로 적용하고 또 개선해 나가면서 서유럽의 군대는 점점 더 강해졌다. 이제 세계 어디에서도 서유럽의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없었다. 이때부터 서유럽은 거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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