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 이영일 < 한민족복지재단 아프가니스탄 의료지원단장 >

    입력2004-09-03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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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봄 초원’은 온데간데 없고 황량한 사막과 지평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의 전부다. 버려진 평야 곳곳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장갑차와 전차의 형해가 나뒹굴고 폭격으로 지붕을 잃은 폐가가 끝없이 이어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은 신음하고 있었다.

    3월8일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를 떠나 아프가니스탄의 북부 도시 마자르 이샤리프로 향했다. 일행은 한의사 1명을 포함한 4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원, TV취재기자 3명과 한민족복지재단의 홍보대사인 탤런트 정영숙씨, 인솔책임을 맡은 필자까지 모두 12명이다.

    우즈벡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타슈켄트의 고려인 마을 백지미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즈벡 최남단의 국경도시 테르메스에 도착했다. 장장 780km에 달하는 육로이동이었다. 사마르칸트를 통과하는 바로 이 길이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이 지나갔다는 그 유명한 실크로드다.

    우즈벡 군인들의 수많은 검문을 받으면서 일그러진 포장도로를 14시간 동안 달려서 겨우 테르메스에 닿을 수 있었다. 들녘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파미르고원 서남단에서 뻗어내려온 산등성이엔 아직도 흰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프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이 시야를 채웠고, 산도 들도 아닌 낮은 구릉과 초원이 이어졌다.



    풀밭 위에선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2000년 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본 풍경과 매우 흡사했다. 이곳 농부들은 춘분 때부터 시작되는 이슬람의 정월을 기점으로 농사일을 시작한다. 터번을 둘러쓴 농부가 말라빠진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유엔에 등록된 NGO를 통해 입국허가를 신청한 사람과 단체에 한해서만 초청장과 아프간 비자가 발급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의료선교와 문화선교를 하는 IACD(Institute of Asian Culture and Development)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단체의 리더들은 의료선교사 혹은 목사로 한국의 교회들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일행은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보낸 의료선교사 고세중씨의 가이드를 받으면서 이동했다. 고씨는 테르메스에서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아프간 입국시 주의사항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프간에선 중앙정부의 지시를 지방정부가 따르지 않고, 부족간에 반목과 갈등이 심하다. 민간인들도 전쟁 때 지녔던 무기를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어 사실상 무법천지나 다름없다. 따라서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고씨는 또 아프간에 도착하면 개인행동은 물론 저녁 6시 이후에 숙소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아프간 여행을 줄곧 반대하던 아들과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인터넷을 통해 파악한 정보는, 알카에다 소속의 외국인 병사들이 아프간으로 다시 집결하면서 카불 남쪽 가데즈 지방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고 미군은 알카에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아나콘다’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프간 북부지방은 비교적 안전하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다.

    “북부지방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고씨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그런 말을 듣고 동행한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봤다. 단단히 각오하고 왔는지 신앙이 돈독해서인지 모두들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였다. 일행 대부분이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 인도 등지에서 의료봉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정영숙 홍보대사도 소말리아와 미얀마에서 구호사업에 나선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크게 당황하지 않는 눈치였다. 필자는 속으로 벌벌 떨었지만, 유엔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여기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아무다리오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한다. 아무다리오강은 파미르고원과 톈산산맥이 만나는 곳에서 발원, 아알해로 들어가는 긴 강이다. 이 강의 양안을 잇는 철교의 중앙엔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군대를 이동시켰던 단선 철도가 깔려 있다.

    취재기자는 우즈벡군이 촬영금지구역으로 정해 놓은 강변지역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일행을 방패 삼아 강변의 곳곳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우리는 우즈벡 초병이 촬영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 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리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이곳을 경비하던 군인들이 몰려와 비디오 카메라를 조사한 후 기자를 연행해 갔다. 다행히 필름만 압수당하고 기자는 무사히 풀려났지만, 이 사건으로 아프간 입국이 1시간 가량 지연됐다. 약을 담은 큰 짐은 차편으로 보내고 수하물은 각자 끌거나 메고 2km 가량의 다리를 도보로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의 남단엔 영어로 ‘웰컴 투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세관 앞에 이르렀을 때 반가움과 두려움이 함께 교차했다. 아프간 외무성에서 나왔다는 관리는, 영어로 “당신들을 환영한다”고 말하고 친절하게 입국절차를 설명해줬다. 우즈벡 세관의 까다로움과 비교하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아프간 관리 덕택에 긴장했던 마음도 다소 가라앉았다. 군복을 입은 관리들이 입국자의 이름과 여권번호를 기재하는 것만으로 입국 통관절차가 끝났다.

    마침내 아프간 최북단 국경도시 아이랏돈에 들어온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기중인 차에 짐을 옮겨 싣고 우즈벡에서 사온 물과 빵, 삶은 계란으로 점심을 때운 뒤 아프가니스탄의 3대도시로 알려진 마자르이샤리프로 향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북쪽 지방의 풍경은 조금 전에 지나온 우즈벡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아름다운 ‘봄 초원’은 온데간데 없고 황량한 사막과 지평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의 전부다. 이날엔 사납기로 유명한 사막의 모래바람까지 거세게 불어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서 우리를 맞으러 나온 홍성집 목사(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 파송된 재미교포 목사로 IACD의 책임자다)와 고세중씨가 운전하는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마자르이샤리프로 출발했다.

    사막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는 소련군이 아프간을 침공하기 위해 닦아 놓은 아스팔트길. 바람이 심하면 모래가 날아와 쌓여 ‘모래밭’으로 변한다. 모래 위를 달리는 차는 마치 눈 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차가 모래에 빠지면 바퀴가 헛돌았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차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쌓인 모래를 치워주면서 팁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로의 모래청소부들은, 이처럼 사막의 열기와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모진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텁게 두른 남자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불어오는 모래바람 속에서 낙타에 땔감을 가득 싣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사막에 죽어 넘어진 나무의 가지들을 모아 시장에 땔감으로 파는 사람이란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앞에 가는 대형 화물트럭을 피하려다가 시동이 멈추는 바람에 한동안 승강이를 해야 했다. 차를 밀기 위해 잠시 차에서 내렸다. 5분 남짓 차 밖에 나와 있었을까. 귓속엔 금세 모래가 굴러다녔다. 바람 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숨 막힐 정도의 강풍이 얼굴을 때린다. 사막을 빠져나오는 데 1시간30분 가량 걸렸다.

    마자르이샤리프로 가는 3시간 동안, 자동차 차창을 통해 본 아프간은 ‘버려진 땅’ 그 자체였다. 우즈벡처럼 중앙정부의 주도로 관정(管井)이나 저수 등 관개수리사업을 제대로 추진했다면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한 옥토가 그대로 버려져 있다.

    버려진 평야 곳곳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길가에 버려진 탱크나 대포, 군용차의 녹슨 차체들이 나뒹굴고 폭격으로 지붕을 잃은 폐가가 군데군데 흉측하게 서있다.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알카에다 사령부 터엔 장갑차와 전차의 형해(形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미군의 폭격이 비교적 정확해 알카에다 시설 외에 다른 건물들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공사가 중단된 건물인지 폭격에 무너진 건물인지 구별할 수 없는 ‘폐허더미’가 끝없이 이어졌다.

    사막을 벗어나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자 이곳에도 봄은 찾아와 있었다. 23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신음하는 ‘죽은 땅’에도 희망을 상징하듯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돌덩이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민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모습이 평화롭다.

    마자르이샤리프는 아프간 말로 ‘왕자의 무덤’이란 뜻이다. 8세기경 마호메트의 조카 알리가 이곳에 묻혀 붙은 이름으로 회교 성지의 하나로 꼽히는 도시.

    마자르이샤리프는 아프간 북부동맹의 본거지로, 1995년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북부동맹이 3년 동안 장악했고 1998년이 돼서야 탈레반 정권에게 넘어간 곳이다.

    북부동맹은 탈레반에게 도시를 빼앗기기 직전, 탈레반 동조세력이라는 이유로 파슈툰족 4000여 명을 학살했고 탈레반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곳을 점령한 후 몽골계의 하자라족 8000여 명을 몰살시켰다.

    인구 150만명의 이 도시는 북부동맹군 총사령관이던 타지크족 출신 마수드 장군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처에 마수드 장군 깃발이 눈에 띄었고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에도 그의 사진이 많이 붙어 있었다. 마수드 장군은 미군의 반(反)탈레반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기자회견석상에서 카메라 기자로 위장하고 들어온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했다.

    마수드 장군이 사망한 이후, 우즈벡 족인 도스툼 장군이 도시를 관장하고 있으며 현재 그는 카불 정부에서 국방차관을 맡고 있기도 하다.

    탈레반이 몰락한 이후 마자르이샤리프는 다시 활력을 찾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크게 늘었다고 한다. 시장도 활기가 넘쳤다. 깔때기를 들고 다니면서 휘발유와 경유를 파는 사람들, 싱싱한 당근으로 즉석에서 주스를 만들어 파는 상인들, 맛 좋은 귤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장사치로 장터는 와글거렸다.

    시장통에서 환전상들이 아프간 화폐 아프가니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달러로 바꿔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암달러상 같지만 은행이 없는 이곳에선 그들이 은행 노릇을 하는 셈이다. 1달러를 내면 6만5000아프가니를 거슬러준다. 작은 물건을 사는 데도 돈을 뭉치로 내야 했다.

    큰 도로는 버스, 군용트럭, 자전거, 오토바이, 우마차로 북새통을 이뤘다. 달리는 자동차의 트렁크에도 사람들이 겹겹이 타고 있었고 트럭이나 차량의 뒤칸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리의 간판들에는 글자표시와 함께 팔 물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압도적으로 높은 문맹률 때문이란다.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이 자동소총이나 기관단총을 어깨에 걸치고 몰려 다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더기 차림에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어른이 아이를,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다. 탈레반 정권 시절엔 여성들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투표권도 없었다. 여성들이 살갗을 외부로 노출하면 현장에서 매를 맞는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탈레반 몰락 직후 외신이 전한 내용과는 다르게 여자들은 모두 차드르와 부르카로 얼굴을 가리고 거리를 오갔다. 회교근본주의 세력이 물러갔지만 언제 다시 정세가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차드르나 부르카를 버린 ‘간 큰’ 여성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마자르이샤리프에 잠시 머문 우리 일행은 발크흐로 향했다. 발크흐는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고도(古都)다. 한적한 변두리 주택가에 자리잡은 흙으로 지은 2층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발크흐 보건소장인 의사 나지블라의 소개로 얻게 된 곳이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그는 식사와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해줬고 군부대와 접촉해 야간보초까지 구해줄 정도로 우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9·11사태 이후 6개월 동안 봉급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그가 베풀어준 호의에 탄복할 따름이다.

    우리는 나지블라가 가져온 ‘논’이라는 둥그런 밀가루 빵을 나눠 먹으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논은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부쳐 만든 것인데 조악한 겉모습 과는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계란과 요구르트를 빵에 발라 먹었는데 이방인에겐 별미였다. 이국적인 냄새가 밴 향채와 잘게 썬 홍당무, 후식으로 나온 특이한 맛의 사과와 귤도 방문객의 입맛엔 안성맞춤이었다.

    아프간 사람들의 거주지는 예상대로 열악했다. 관광 온 것이 아닌 터라 각오하기는 했지만 견디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우선 화장실이 형편없었다. 마당 귀퉁이에 자리잡은 변소의 시설(?)은 흙을 파놓은 구덩이가 전부였다. 한번 일을 보고 나오면 다시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 남자들은 그럭저럭 변소에 익숙해졌지만, 함께 온 여자들은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집 근처 우물이 바닥을 드러내 멀리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우리를 위해 매일 숙소를 지키던 군인들이 물을 실어왔지만 양이 매우 적어 양치질과 ‘고양이 세수’밖에 할 수 없없다.

    또 한 방에서 10명이 침낭을 덮고 잤는데 아프간의 봄추위가 얼마나 매서운지 새벽이면 모두 추위에 잠을 깼다. 처음엔 불평이 많았지만, “지난 겨울 이곳 난민들은 영하30℃의 혹한에 담요 한 장 없이 들판에서 밤을 지내야 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누구도 춥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발크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지블라의 보건소를 빌려 진료소를 마련했다. 간판은 보건소지만 약도 의료장비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 가져간 의약품과 장비로 5개의 진료실을 만들었다. 가정의학 전문의 이용훈, 안정희 박사는 제1, 2진료실을 맡았고 우즈벡에서 합류한 외과전문의 김수호 박사는 제3진료실을,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종철 박사는 제4진료실을 맡았다. 한의사인 강영건씨가 제5진료실을 책임졌다. 약국은 간호원으로 온 김정희, 김여정, 이윤숙씨가 맡았다.

    진료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소문을 듣고 환자가 몰려드는데 질환별로 분류해서 진찰표를 주는 데도 손이 모자랐다. 진찰표를 받지않고 막무가내로 진료실로 몰려드는 환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진찰표를 받지 못한 환자들은 보건소가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와 치료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환자 이외에도 카레아(아프간 말로 한국)에서 온 외국인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과 주민들도 있었다. 어린 시절 곡마단이 마을에 왔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필자와 정영숙씨는 의료지식이 없지만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의사 강영건씨를 돕기로 하고 약봉지에 환약을 넣는 일, 침 맞은 환자의 환부를 약솜으로 닦고 침 뽑는 일, 처방전에 따라 환부에 파스를 붙이고 뜸을 뜨는 일을 도왔다.

    보조 수준의 일이었지만 진료에 적잖은 도움을 줬다고 자부한다. 남자가 등과 허리에 파스를 붙여주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 환자들은 정영숙씨의 몫이었다. 나지블라는 보건소에서 일했던 동료 의사들을 불러왔다. 영어에 익숙한 이들의 도움으로 환자들을 상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장벽 때문에 더 많은 환자를 돌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튿날에는 1000여 명의 환자들이 찾아왔다. 만성적인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이곳 주민들에게 좋은 진료와 고급 영양제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하얀 차드르를 둘러쓴 여자환자들이 몰려올 때는 미국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연상됐다. 동행한 기자는 그림이 너무 좋다면서 부지런히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었다.

    이곳 주민들의 평균 수명은 44세. 여자들은 15세 정도면 결혼해 30세쯤 되면 적게는 7∼8명, 많은 경우엔 13~15명까지 아이를 낳는다. 전쟁으로 인해 여성 상당수가 과부고 아이들 셋 중 하나는 고아다. 환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 같은 성인병은 거의 없고 영양실조 탓에 생긴 병이 대부분이었다.

    평생 동안 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환자들도 많았다. 의사들은 가능한 한 많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절로 숙연해졌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습이 아니라 환자들은 섬기는 자세로 일했기 때문이다.

    필자와 정영숙씨, 3명의 기자, 박종철 박사가 팀을 이뤄 IACD의 책임자인 홍성집 목사의 인솔로 마자르이샤리프 서남쪽에 위치한 사만간 난민촌을 방문했다. 약칭 IDP(Internally Displaced Persons)로 불리는 곳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색하지만 내지유민촌 정도로 부를 수 있다.

    아프간에는 유엔의 도움을 받는 난민촌이 있고 사만간처럼 유엔의 지원을 받지 않고 전쟁으로 떠도는 사람들이 모인 내지유민촌이 있다. 필자와 정씨가 1000달러씩 갹출해 위문품을 준비했다. 맨땅에 거주하는 400세대와 담요 한장 없이 밤을 보내는 500세대를 위해 카페트와 담요를 구입하고 ‘논’ 1만5000개를 트럭에 싣고 난민촌을 찾았다.

    카불로 이어진 길을 따라 1시간쯤 달리면 힌두쿠시산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산맥 주변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 중국의 장강 삼협처럼 우람한 천애(天涯)의 절벽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었다. 협곡을 통과해서 30분 정도를 달리자 난민촌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때 묻은 천을 머리에 감고 누더기를 입은 난민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IACD가 고용한 아프간인 바리올라가 방문 취지를 설명해주자 난민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건의 분배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담요에 빵을 받아 각 세대를 돌아다니면서 똑같이 나눠주는데 집안에서 풍기는 악취와 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무척 역겨웠다. 난민촌 부근에선 마실 물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비닐하우스 비슷한 움집에서 풀을 뜯어 죽을 쑤고 있는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풀을 뜯어먹고 다니는 아이들은 각기병에 걸렸는지 배가 불쑥 튀어나왔고 대부분이 머리에 부스럼을 갖고 있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발을 가리키면서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고 싶었으나 그런 행동은 삼가라는 사전 교육을 받은 터라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소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난민촌 여자들은 차드르도 부르카도 걸치지 않았다. 차드르나 부르카를 살 돈이 없기 때문이란다. 난민촌 사람들은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은 구호물자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 노인은 도시에서 버려진 빵을 주워 모아놓은 마대자루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당신들 덕에 새 빵을 먹게 돼 고맙다”고 말했다.

    언덕 위편으로 잔돌을 깔아 만든 공간이 있는데 메카를 향해 절하는 곳이라고 했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하루 라마단(이슬람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의식)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도 신에 대해 절하는 것이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발크흐에서의 진료사업은 비교적 원만하게 시작됐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즈벡족의 대부격인 도스툼 장군의 군대가, 친 탈레반적인 파슈툰족 집단거주지에 머물면서 파슈툰족이 운영하는 보건소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우리를 떨떠름하게 생각한 것이다.

    진료를 시작한 다음날 군복을 입은 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진료소에 나타나 “당신들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우리를 도우러 온 것을 크게 환영하고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당신들이 사용하는 숙소는 안전에 문제가 많으니 그곳을 떠나 군부대 점령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압력을 가해왔다.

    일행은 장군의 권고를 어떻게 처리할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나지블라는 장군의 얘기에 괘념치 말고 이곳에서 계속 의료활동을 하자”고 했지만, 우리로선 장군의 권고를 무조건 무시할 수도 없었다.

    부족들간의 반목이 심하고 언제든 내전이 발생할 수 있는 곳에서 군부의 권고를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3일째 진료부터는 진료를 한번 받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결국 일정한 거점을 정해놓고 하는 의료봉사보다는 이동 진료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주 1회씩 발크흐 보건소를 방문하여 오전 진료를 맡겠다”며 나지블라를 설득했다. 나지블라는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나지블라의 양해를 얻은 후 서둘러 쉐베르간으로 이동했다. 북부동맹군 사령관인 도스툼 장군의 관저가 있는 쉐베르간은 북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도스툼 장군의 거주지 근처에 마련된 주택은 발크흐의 숙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왔다면 아프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쉐베르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남는 팀과 귀국하는 팀으로 나뉘었다. 의료진은 대부분 아프간에 남아 이동진료를 계속했고, 필자가 속한 팀은 3월14일 쉐베르간을 출발, 폐허가 된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뒤로 하고 우즈벡의 테르메스 공항에 도착했다.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돕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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