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주먹을 막아낸다.’ 이건 불가능하다. ‘나를 때린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인다.’ 이건 한동안 효과가 있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나를 때릴 가능성이 있는 자는 미리 죽인다’는 방법뿐.
-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연구중인 함승희 전 의원이, 9ㆍ11테러 이후 2년여 동안 부시 행정부가 운용해온 안보전략의 실체와 그 역사적 기원을 분석한 로버트 갈루치 전 차관보의 강연내용을 정리해 보내왔다.[편집자]
그러나 다양한 비난과 우려에도 많은 미국인은 강한 미국과 도덕적 우월주의를 선택했다. 내년 1월 재취임식이 있은 후 앞으로 4년간 미국의 외교 및 국가안보 전략이 네오콘의 확고한 신보수주의 기조에 따라 이른바 불량국가들(rogue state)에 대한 강경대응으로 이어질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고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들여다보면 국가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럽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은 부시 행정부가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한 김정일 정권과 교류협력하는 데 지나치게 조바심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지난 6월 노무현 정부는 휴전선 일대에 설치한 고성능 확성기를 모두 철거했다. 사실 이는 남북 비방방송 중단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우리 손으로 제거함으로써 김정일 정권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준 셈이다. 미국 정부는 CNN을 통해 이 철거장면을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며칠 전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컬러스 에버스타트 선임연구원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자 청와대에 비상이 걸렸다고 하더라. 누가 부시 대통령의 낙선을 기원했는지 이름까지 댈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억지와 불성실 때문에 교착된 6자회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조바심, 부시 정부와의 마찰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려는 일부 세력의 무리수 등에 비추어보면, 이와 같은 발언은 청와대의 부인성명에도 앞으로 2기 부시 행정부와 현 정권 담당자 간의 순탄치 않은 파열음을 예상케 한다.
100년 전 조선왕조 말 우리 백성은 당시 정권 담당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운명을 열강의 손에 맡김으로써 국권을 잃었고, 50여 년 전에도 정치권력에 눈먼 정상배들의 정치싸움 속에서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몇몇 정치인의 편협하고 왜곡된 역사관·국가관 때문에 한반도의 운명이 다시 한 번 미국 등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부시 대통령과 그 핵심참모들의 정치철학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그들의 국가안보전략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나 김정일 정권에 대한 그들의 정책은 어떠하며 한국의 정권 담당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되짚어보는 작업 말이다. 필자가 현재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국가안보학을 공부하는 워싱턴DC 조지타운대 국제문제대학원 로버트 갈루치 학장의 강연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시 정권의 선제공격 독트린(Preemption Doctrine)을 주제로 갈루치 학장이 최근 세미나에서 진행한 이 강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참고로 갈루치 학장은 미 국무부에서 정치·군사담당차관보를 지냈고 1970년대부터 파키스탄·인도 핵무기 보유억제활동, 이집트·이스라엘·아랍국가에서의 평화유지군 활동,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무장해제 임무, 러시아에서 이란으로 핵기술 이전 차단활동,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대응 등 다양한 외교안보활동을 경험한 온건합리주의자다. 이제부터 아무런 가치평가 없이 부시 행정부 안보전략의 기원과 본질을 풀어낸 그의 강연내용을 가감 없이 정리해 전한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라크와 북한의 현 상황을 이해하고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이 가진 국가안보의 취약성(Vulnerability)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미국은 영국이 수도 워싱턴을 불태운 1814년 이후 안보적으로 취약한 점이 별달리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도가 불타는 것은 엄청난 취약점을 드러내는 일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1814년 8월24일 미영전쟁 당시 영국군은 워싱턴에 진입해 정부청사를 불태우고, 미국이 캐나다 수도를 불태운 것에 복수하기 위해 대통령관저 등 공공건물에 방화했다. 이때 관저 외벽이 크게 훼손되어 나중에 건물을 모두 흰색으로 칠한 것이 오늘날 ‘백악관’의 기원이다·필자 주).
19세기에 미국은 안보상황에 있어서 지리적인 혜택을 충분히 누렸다. 동서로는 대양이 펼쳐져 있고 기량이 뛰어난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남쪽과 북쪽으로는 위협적이지 않은 국가들뿐이었다. 스스로 방어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미국은 19세기 내내 적에게서 지켜낼 수 있었다.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실제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차 세계대전 개입을 선언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실제로도 참전은 매우 늦었다. 영국은 아직도 당시 미국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할 이유가 없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참전의 타당성을 두고 논란이 계속됐다. 국제주의자들은 미국의 미래가 동맹을 맺어 유럽문제에 개입하는 데 달려있다고 주장했고, 고립주의자들은 독특한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는 미국은 중립적 위치를 고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주의자들과 고립주의자들의 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계속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2차 세계대전 개입에 대한 ‘열성(enthusiasm)’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참전을 선택할 기회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사라졌다. 일본의 성공적인 선제공격은 분명 미국의 취약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하와이는 미국의 주(州)가 아니었으므로 진주만 공습은 사실 본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에서의 공격일 뿐이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안보의 취약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는 공군력이다.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미국의 안보를 위해 어떤 종류의 공군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논의됐다. 적의 대륙간 장거리 폭격기로 인해 미국의 안보가 취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중에 격추할 수 있는 폭격기는 심각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50여 년 전 영국을 공격한 나치 독일의 V-2 로 인해 세상에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조금 더 위험했다. 현재도 중도에 격추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은 탄도미사일은 미국의 안전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둘째로 중대한 변화는 핵폭탄이었다. 한 개의 핵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30개의 핵폭탄으로 30개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 수 있다. 방어란 없다. 일단 미사일에 핵폭탄이 장착되면 도시는 사라지는 것이다. 1814년 이래 미국의 안전이 이토록 심각한 취약점을 노출한 적은 없었다. 대응책으로 구축한 공중방어체계를 통해 미국은 폭격기를 막아낼 수 있게 됐지만 미사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핵무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공격력을 강화하는 방법도 꾸준히 추진해왔지만 공격력만으로 미국을 보호할 수는 없다.
‘나를 때리면 너는 죽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은 ‘억제(Deterrence)’라는 이론을 개발해냈다. 적이 미국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미국을 공격한 것을 처절하게 후회할 만큼 격렬히 보복함으로써 아무도 미국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론이다. 억제는 보복을 전제로 삼고 있으므로 ‘미국은 반드시 보복공격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적국에게 심어줄 여러 공격방안이 마련됐다. 대륙간탄도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s·ICBMs)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s·SLBMs), 핵무기를 탑재한 폭격기가 ‘삼각편대(TRIAD)’라는 이름의 전략핵 억제체제에 포함됐다.
그러자 소련도 미국과 똑같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어 지하에 배치했다. 그리고 잠수함을 건조하고 미사일을 장착했으며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를 만들었다. 소련과 미국은 상호 안정적인 억제를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공격력을 축적했다. 이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억제전략을 개념적으로 명확히 정리한 사람은 부시 행정부의 많은 관료를 교육시킨 앨버트 울스테터였다. 울스테터는 미국이 ‘공포의 미묘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격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적의 공격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어야 안전이 보장된다는 주장이었다. 적의 공격으로 인해 우리측의 무장이 해제되면 보복은 불가능해진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처참한 보복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지 않는 한, 도시 하나쯤 공격당한다 해도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다. 반면 적이 도시는 건드리지도 않고 미국의 공격력만 무력화한다면 미국은 보복공격을 할 수 없게 되어 최악의 상황에 빠진다. 이렇듯 미국의 안보는 어떻게 하면 적의 선제공격을 받고도 보복공격력을 유지하느냐에 달려있었다. 보복공격력의 유지야말로 억제전략 개념의 키 포인트다.
둘째로 중요한 점은 억제전략이 심리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 전략은 적이 ‘미국은 공격을 당하면 반드시 우리를 되공격할 것’이라고 믿어야 성립된다. 자신들이 곧 엄청나게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반격을 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애초에 미국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 예상해야 한다. 억제라는 개념에는 물리적인 강제요인이 없다. 따라서 미국은 적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정작 적이 미국의 대응능력에 의심을 품는다면 억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선제 공격한 적에 처절한 보복을 가해 적을 후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는, 만의 하나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할 경우 미국이 일단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1960년대 소련에 대한 미국의 방어체제가, 소련의 선제공격을 받아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다음에야 소련에 보복을 가하는 식의 억제전략임을 알았을 때 많은 미국인은 그다지 유쾌할 수 없었다.
한때 미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시스템(Anti-ballistic Missile Systems·ABMs)이 자신을 완벽하게 방어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센티널 시스템, (대기권 밖의 원거리 광역방어용) 스파르탄 미사일, (단거리방어용) 스프린트 미사일 등 자체방어시스템을 설계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탄 미사일은 날아오는 적의 미사일을 가로채 열핵병기로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방어기술은 공격미사일 기술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와 관련된 개념이 공격-방어 비용대체율(The Offense-Defense Cost of Change Ratio)인데, 이를 설명하려면 세미나 시간을 모두 할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공격력을 강화하는 데 드는 돈이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드는 돈보다 적다’는 것이다.
우리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력을 높이면 적은 공격력을 더 높일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방어체제는 쓸모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ABM(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협상을 시작한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이 조약의 바탕에는, 날아오는 주먹을 막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적은 더 많은 주먹을 날리는 법을 금세 익히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는 깨달음이 담겨있다. 적이 현재 보유한 공격수단을 완벽하게 방어하려 애쓴다 해도 적은 곧 그 방어력을 넘어서는 공격수단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튼튼한 방패와 더 날카로운 창
결국 자신을 방어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크게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상대가 주먹을 날릴 생각도 못 하게 억제하는 것뿐이다. 해럴드 브라운 전 국방장관은 상쇄 전략(Countervailing Strategy)이라는 개념을 구상했다(소련이 공격해 오는 핵미사일을 미국의 핵미사일로 상쇄한다는 이 전략은 1980년 8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명령 제59호로 정식 채택됐다·필자 주).
이러한 억제력은 적의 심리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적의 전략이 무엇인지 살피는 작업이 중요하다. 소련이 매우 깊은 지하벙커를 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미국은 이 벙커가 지도부 피란용임을 간파했다. 따라서 유사시 소련의 지휘체제를 위협하려면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소련 지도부가 피신할 지하벙커를 파괴할 수 있는 특수 성능의 핵무기가 그것이었다. 이로 인해 소련 지도부는 미국을 공격할 경우 처절한 보복이 뒤따를 것임을 다시 한 번 인식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이 중점적으로 추구한 것은 안보상의 취약점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억제력 전략에 의존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에드워드 텔러 등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과학자들은 ‘공격-방어 비용대체율’ 개념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제안을 레이건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날아오는 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해를 입히기 전에 레이저로 요격할 수 있게 우주공간에 방어체제를 구축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장은 천문학적인 돈이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방어에 필요한 비용이 더욱 저렴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고 곧 이어 스타워즈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무렵 소련은 많은 종류의 미사일을 개발했고 그에 따라 미국은 많은 화려한 계획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미국은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어떠한 시스템도 만들지 못했다. 1960년대의 반복이었다. 미국은 멋진 그림을 그렸지만 우주공간에 레이저망을 구축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그 후 소련이 붕괴되었다. 일각에서는 소련 붕괴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무기생산에 과도한 비용을 퍼부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주목할 것은 미사일방어 문제가 그 후 10년간 사그라졌다는 점이다. ‘아버지’ 부시 정부나 클린턴 정부에서는 미사일방어 문제에 있어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연구와 개발은 계속되었지만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이 다가올 무렵 조지타운대 개스턴홀에서 행한 연설에서 “임기를 마치기 전에 탄도미사일에 대한 어떤 결정도 내릴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탄도미사일에 대한 정책결정은 그대로 조지 W. 부시 행정부로 넘어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국가미사일방위계획(National Missile Defense·NMD)과 함께 전략적 지배(Strategic Dominance)를 약속하며 집권에 성공했다. 2002년 9월 발행된 ‘미국국가안보전략보고서(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제9장은 “미군은, 잠재적인 적들이 미국과 동등하거나 미국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군비증강을 꾀하는 것을 단념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질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단지 다른 나라보다 강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 하게 월등히 막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른바 미국 지배(American Dominance)의 요체다. 이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의 안보인식 및 전략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다섯 요소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이제 군비통제조약은 없다.
군비통제조약은 민주당에 의한 협상이든 공화당에 의한 협상이든 항상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왔다. 미국이 가장 잘하는 것은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조약에 서명하면 미국의 기술은 묶이게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러시아와 아무런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뒤처지고 미국은 앞서 나가게 된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초기 부시 대통령의 정책에는 조약이란 단어가 없었다. 미국이 전략무기감축협상(Strategic Arms Reduction·SAR)에 서명한 이유는, SAR가 미국을 속박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ABM 조약 탈퇴로 인해 화가 난 러시아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자간 협상은 의미가 있을까.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예로 들어보자. NPT에 서명하지 않은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NPT에 서명한 이란, 이라크, 리비아, 북한은 조약을 성실히 준수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다자간조약이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핵개발이 우려되는 국가들은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은 속임수를 쓰고 있다. 미국이 이러한 조약에 서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조약은 없다.
2. 러시아는 더 이상 미국에게 전통적인 개념의 위협은 아니다.
러시아가 가까운 장래에 초강대국이 되기는 어렵다. 문제는 러시아가 핵물질(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 핵무기, 핵 과학자들과 생물학무기 개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승인되지 않은 루트로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새로운 의미로 위협적이다. 러시아 마피아는 의도적으로 탄두미사일과 핵무기 기술을 이란에 이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러시아는 (핵무기) 누출과 기술이전이라는 면에서 전통적인 개념의 위협과는 또 다른 위협을 내포하고 있다.
3. 중국이 거대한 위협이다.
중국은 대양해군을 만들고 있으며 재래식 군대의 기량증진을 도모하며 군사전략을 현대화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하면서 ‘포용(engagement)정책’을 얘기하지만 사실 이는 ‘봉쇄(containment)정책’을 의미한다.
4. 기존의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정책(non-proliferation policy)으로는 불량국가를 상대할 수 없다.
불량국가를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반확산정책(counter-proliferation policy)이다. 이라크, 이란, 북한, 시리아, 리비아는 협상으로 상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협상은 바보 같은 짓이다. 예방전쟁 혹은 선제공격으로 힘을 행사하거나 행사할 것처럼 위협함으로써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협상은 순진한 짓이며 국가안보에 해를 끼치는 짓이다.
5. 신뢰할 만한 효과를 가진 국가미사일방어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실효성이 이미 입증된 시스템이라면 더욱 좋다.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이 실전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다른 나라들이 믿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미사일방어시스템으로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두 집단, 즉 불량국가들과 중국을 상대할 수 있다.
중국의 미사일은 미국의 초기공격으로 무력해질 수 있다. 중국에는 겨우 수십 발의 ICBM이 있으며 이는 미국에 대한 억제력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은 격추시키기 까다로운 기동력 있는 ICBM을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미국은 초기공격으로 적의 미사일을 무력화하는 데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국가미사일방어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 시스템은 적이 섣불리 미국을 공격하지 못하게끔 억제할 것이다.
대략 이 다섯 가지가 9·11 테러 이전까지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의 중심을 이뤄왔다. 그러나 9·11은 부시 행정부의 심리상태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9·11로 인해 미국은 어느 때보다 안보적으로 가장 취약해졌고 정부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이제 미국민은 더 많은 건물에 항공기가 충돌할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수십만 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 즉 핵무기나 천연두 같은 생물학무기가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지를 염려하게 되었다.
재래식무기를 이용하지 않은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어체제도, 억제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새로운 공포도 미국민을 엄습했다. 상업용 항공기, 컨테이너 선박, 대형 화물트럭이 무기로 사용되는 경우 어떠한 방어수단도 없다. 공격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므로 억제력도 발휘할 수 없다. 내일 아침 뉴욕이 파괴된다면 많은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하고 나설 판이다. 미국은 실제로 테러를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할 수도 있다.
설사 범인을 밝혀낸다 해도 그들을 찾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알 카에다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아니면 그 외 40개국? 공격을 가한 테러리스트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 해도 미국이 보복할 준비를 갖출 즈음 그들은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미국의 보복공격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돼있다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정리해보자. 억제도, 방어도 불가능하다. 1814년 이후로 미국의 안보가 이렇게 취약한 적은 없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다.
핵긴급수색팀(Nuclear Emergency Search Team·NEST)이라 불리는 정부조직이 있다. 요즘은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핵무기 설계 및 제조기술에 특수작전능력을 접목해 만든 조직이다. 이들의 임무는 핵폭탄을 찾아내 해체하는 것이다. 만약 워싱턴DC 근처 볼티모어 항구나 뉴욕에 핵폭탄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NEST는 이를 찾아내 해체하는 작업을 담당한다. 9·11 이후 NEST가 워싱턴DC에 배치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또 다른 극비계획으로는 정부지속(Continuity of Government·CoG) 프로그램이 있다. 1980년대에 정부 관료 중 몇몇은 주말이 되면 잠적했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전시상황을 훈련했다. 돌아온 후에도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소련이 붕괴한 후 CoG는 한동안 가동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관료들 사이에서는 종종 부통령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농담이 오간다. 부통령 외의 관료들도 간혹 잠적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이 꼭 훈련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워싱턴DC가 파괴될 경우에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일부 관료들을 잠시 ‘대피’시키는 것에 가깝다. 상황은 이렇듯 심각하다.
9·11 테러 이후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을 언급했다. ‘악의 축’ 발언은 미국에 막대한 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몇몇 국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핵태세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통해 미국이 유사시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대상국으로 ‘악의 축’ 국가 이외에도 시리아와 리비아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 후 선제공격론의 윤곽을 그린 부시 대통령의 웨스트포인트 연설과 ‘국가안보전략보고서(National Security Stra- tegy of the United States of Ame- rica)’가 세상에 나왔다.
맞기 전에 섬멸하라
‘국가안보전략보고서’ 제5장에는 “적이 미국 및 미국의 동맹국과 우방국을 대량살상무기로 위협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국가든 법과 전통에 따라 선제공격을 통해 자국을 보호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있다. 적이 미국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면 적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한다 해도 미국은 여전히 도덕적, 합법적, 윤리적이다.
부시 대통령 식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적이 미국 영토를 공격하겠다는 표시로 군대를 집결하거나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고, 기다릴 수도 없다. ‘임박한 위협(imminent threat)’ 개념을 전제로 미국은 설사 적이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불명확할 때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선제행동을 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적이 미국을 언제 공격할지 몰라도, 언젠가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적을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는 이를 미국의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억제와 전략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선제공격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선제공격이란 적이 공격하기 직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선제공격은 실제로는 예방전쟁을 의미한다. 지금 당장은 힘이 약하지만 앞으로 강해질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장차의 도발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적의 힘이 아직 미약한 지금 적을 파괴할 수도 있다.
미국은 1945∼1949년 소련에 대해 그럴 기회가 있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기 전에 소련을 공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나 끝내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케네디 행정부는 쿠바에 설치된 소련 미사일을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약 이때 이 미사일을 공격했다면 그러한 조치는 예방전쟁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