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몇 엘리트를 위해 모두가 줄을 서서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광경. 2004년 한국 교육의 슬픈 자화상이다. 교육의 결과에만 치중하는 사회구조는 고교등급제, 내신 부풀리기 같은 반칙과 편법을 양산했다. 두 패로 갈라진 교육논쟁은 애꿎은 평준화 제도에 문제의 원인을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9월16일 연세대 앞에서 고교등급제 실시 대학 규탄 시위를 벌이는 학부모시민단체 회원들.
우리네 삶터마다 생각이 나뉘고 편이 갈라졌지만 적어도 교육만큼은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데 고개 저을 사람은 없다. 문제는 교육 현안을 다루고, 이야기하며, 바꾸고 고쳐가는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는 것. 문제가 문제인 만큼 다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교육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정작 깊고 오랜 병에 시름시름 앓는 교육을 구하기는커녕 병을 덧들여 아예 죽음에 이르도록 몰아가고 있다.
교육에 끼여든 사회갈등
지금 교육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시각이 맞부딪쳐 생겨났다. 한쪽에선 “웬 지역차별이냐, 고교등급제는 또 다른 연좌제다”며 팔을 걷어부치고 다른 쪽에선 “내신 부풀리기와 고교평준화가 학력(學力)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와 교육이 경쟁력을 잃어 나라 망쳤다”며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런가 하면 정작 교육담론 안쪽에서는 점잖게 “교육 논리로만 따져봐야 할 것을 왜 쓸데없이 교육 바깥, 이를테면 사회적인 갈등을 끌어들이냐”며 눈살을 찌푸린다. 이런 와중에도 언론은 여론을 앞세워 싸움을 부추긴다. 교육 문제를 사건, 사고나 사회문제로 몰아가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교육문제를 더 어렵게 하고, 교육 이야기를 더 고단하게 만드는 것은 그 답이 엄연히 있다는 사실이다. 입시, 사교육 따위의 그 하고 많은 교육문제마다 실은 이상적인 본보기가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의 틀, 구체적인 실제 방안까지 모두 다 나와 있다. 다만 그 방안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 험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교육부의 下策 개혁안
교육을 둘러싼 싸움의 앞뒤를 가늠해보면 대체로 이렇다. 지난 2월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거듭 그럴싸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 뜻은 뻔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인 입시 제도를 손보아입시위주 교육으로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엉망진창이 된 교육현장을 바로잡는다, 또 첨단기술이 극한경쟁으로 치닫는 지식정보사회에 걸맞은 교육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방송강의로 학생들의 수능 준비를 도와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주겠다’ ‘대입전형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하되 주로 학생생활기록부의 실질반영 비율을 높여 내신위주의 획기적인 학생선발 개선방안을 찾아보겠다’는 내용이 그 뼈대다. 입시위주 교육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공교육을 내실화하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극한경쟁에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쏟아붓다가 몸과 마음이 망가진 교육대중의 하늘을 찌를 듯한 괴로움을 어떻게든 달래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얽힐 대로 얽힌 교육문제가 기존의 제도를 손보고, 몇 가지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단숨에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숱한 개혁안이 발표되고 실천됐으나 교육이 앓고 있는 병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번 안도 별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수능방송은 무너지는 교실은 아예 포기하고 TV 모니터에 입시교육을 맡기겠다는 것으로 고육책 중에서도 하책(下策)이요, 대입전형제도 개선방안 또한 아슬아슬한 걸림돌이 즐비하다. 한여름 뜸하더니 입시를 앞둔 가을 들어 그예 터질 것이 터졌다. 지금까지 쉬쉬했던, 그렇지만 언젠가는 한번 터지고야 말 일이었던 ‘고교등급제’와 ‘내신 부풀리기’ 문제가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몇몇 이름 있는 대학이 수시모집 과정에서 특정 지역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을 선호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전형방식을 쓴 사실이 밝혀졌다. 불이익을 당했다고 여긴 많은 학생, 학부모들이 발끈하며 나섰고 교육단체들이 줄지어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대학들은 하나같이 “일선 고교의 내신 부풀리기 때문에 변별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참고자료로 수험생의 출신 학교 등 뒷배를 고려했다”고 방패막이를 내밀었다.
급기야 “학력이 국가경쟁력인 지식정보사회에서 이런 막무가내 평준화, 평등주의가 나라 망친다”는 큰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양성 가운데 수월성이 빛나는 것이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을 개천에서 용만 쓰게 하는 경쟁주의는 오히려 사회악이라고 악을 쓰는 데까지 이르렀다.
학생은 안중에 없는 싸움
이제 논쟁은 좀 잠잠해졌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다툼이고 싸움이냐는 것이다. 서로 명분과 대의를 앞세우고, 때로는 현실과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문제의 초점인 자라나는 세대, 우리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직무유기를 하고도 수수방관하는 교육정책 당국. ‘에헴’ 하며 지당한 말씀만 늘어놓는 교육학자. 목 좋은 가게 장사 잘하려면 그 정도 반칙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아예 마음대로 좌판까지 벌일 수 있게 자율성을 달라는 대학. 대기업에서 요구하니 힘없는 하청업체는 부실한 제품이라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납품할 수밖에 없지 않냐며 신세 한탄이나 하는 고등학교. ‘금쪽 같은 내 새끼’ 어떻게든 공부 잘해 성공하고 출세하도록 뼛골 빠지게 애써왔는데 부모 못난 탓에 좀 못살고, 어려운 살림 한다고 웬 차별이냐며 한풀이 해대는 부모.
이들에게는 그저 제 앞가림과 끝없는 욕심, 대리만족을 위한 투사(投射)만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가장 아프고 힘든 건 자라나는 세대, 우리 아이들일 텐데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뒷전에 밀려나 버렸다. 만일 참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들의 앞날을 걱정했다면 처음부터 문제를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 눈높이에서 차근차근 풀었어야 했다.
고교등급제는 반칙
제로섬 같은 살벌한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편법도 마다하지 않던 교사와 학부모는 급기야 내신 부풀리기라는, 누가 봐도 비교육적이지만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편법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대학측, 그것도 이름깨나 있는 대학들은 이를 빌미로 학생 개인이 아니라 학교 또는 지역에 차별을 두는 반칙을 저질렀다. 이는 소수를 위해 다수를 다치게 하는 공세적이면서도 폭력적인 반칙이다. 게다가 수능시험과 상관없이 다양한 특기와 적성을 지닌 학생을 선발하자는 수시모집의 본디 뜻과 다르게 학력에 연연함으로써, 이른바 고등학교에 등급을 매기는 알량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사태는 대학의 잘못이 더 크다. 이쯤 되면 제발 대학에 모든 걸 맡겨달라는 자율성 요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촌에는 다양한 본보기가 있다. 모든 대학이 자율적으로 나름의 기준을 정해 학생을 고르는 미국 방식과, 대학에서 공부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고등학교에서 알아서 구분해주면 대학이 이를 받아들이는 독일 방식이 대표적이다.
어느 쪽이건 간에 사회나 교육대중의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 이런 제도가 시행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편법이 판치는 한국에서 어느 한쪽에만 자율성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려면 자율성이 제대로 발휘될지, 그럴 만한 채비는 갖추고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나 자신 대학에 몸담고 있지만, 그래서 누워서 침 뱉는 일이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대학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결국 교육 당사자, 대중들이 교육문제의 핵심을 찾고 해결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에둘러 갈 것이 아니라 차제에 교육문제의 핵심을 바로보자. 지금 우리 교육을 두고 두 가지 가치관과 세계관이 대립하고 있다. 교육은 마땅히 엘리트를 선발해 잘 길러 사회에 유효하게 써먹도록 하는 일이라는 생각과, 교육은 많은 사람에게 두루 기회를 주어 사람 노릇하고 살 수 있게 키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학력에 ‘올인’하는 사회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상호배제적인 관계가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가 그동안 유교 이념에 가위눌리고, 다른 한편 서둘러 산업화하고 근대화하면서 무엇이든 급하게 써먹고자 한 실증주의에 쫓겨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었던 건 사실이다.
몇몇 엘리트를 위해 모두가 줄을 서서 ‘교육을 통한 성공과 출세의 신화’에 맞장구를 치며 억지 춘향 노릇을 해온 것이다. 부모가 성공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자식에게 온갖 선망을 심어주면서 오로지 결과 중심의 교육에 목을 맨 사회를 만들었다. 학력(學力)은 형편없어지고 학력(學歷)만 중시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러자 모두가 학력(學歷)에 ‘올인’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고 병목 지점을 통과한 사람들의 과두(寡頭) 지배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비단 돈과 권력뿐 아니라 영향력, 문화 및 사회적 자본까지 독점하고 대를 물리는 계층 재생산으로 이어졌다. 권위주의 정권이 지배했던 시대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며 이를 모른 척했다. 바로 그런 집단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기반을 다졌다.
다행히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이걸 고쳐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상징이 이른바 ‘평준화’다. 물론 평준화 제도는 권위주의 시대에 도입한 것이지만, 그것이 뿌리내리는 과정이나 내용을 채우는 일은 사회와 교육 민주화의 핵심과제다. 또한 교육을 둘러싸고 오늘날 벌어지는 다툼의 핵심사안이기도 하다.
평준화 제도를 통해 입시교육의 고통을 덜고 교육기회 균등을 도모하겠다는 의도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기회균등은 이룩했는지 몰라도 진정한 평준화에 필요한 조건의 균등, 특히 지역이나 계층을 아우르는 교육 인프라의 확대·투자·개발 등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로지 부모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비생산적인 입시교육에 매진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키워온 탓이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당장 눈앞에 벌어진 상황만으로 결과를 제 마음대로 재단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인 태도다. 특히 평준화가 학력(學力)저하를 가져왔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개인의 능력, 가족문화나 교육환경을 비롯한 사회적인 여러 조건, 또래집단의 영향 등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제도 하나에 학력을 환원시키는 것이야말로 논리의 오류다. 게다가 지난해 실시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연구(PISA)’ 등의 결과(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를 봐도 15세 기준으로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기는커녕 너무 잘해 걱정이다. 과학, 수학, 읽기가 각각 1위, 2위, 6위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걱정이란 말은, 공부는 잘하는데 정작 학문능력이나 직업능력 등 그 후의 진정한 학력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평준화를 잘못된 제도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런 숙제를 풀어가며 바꾸거나 고치도록 해야 한다. 교육문제의 심각성은 곁가지를 건드려서 오히려 몸체를 덧나게 하는 데 있다. 문제의 본질부터 해결해나가야 한다.
세상은 달라졌다. 지금은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팔아 이윤을 남기는 산업사회 시대가 아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대량생산 구조를 갖춰놓고 국가가 규정한 기준에 따라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인재를 양성해서는 모두가 그렇게 바라는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다양성과 특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경쟁 위주 엘리트 교육을 넘어
다양성과 특성은 학력만으로 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니 학력으로 경쟁해서 공부 잘하는 엘리트만을 가리고 기르는 교육체제로 돌아간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핵심사안인 평준화만 해도 경쟁 위주·시험 위주의 엘리트 교육체제가 아닌 횡적인 확산을 지향해야 한다. 학교체제의 다변화를 꾀해 교육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넓혀야 한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대학에 자율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주어도 괜찮다. 하지만 학력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가려 뽑는 게임의 법칙이 유지되는 한,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수능이나 내신처럼 모든 영역을 다 잘하는 사람은 범재(凡才)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다양한 보통사람과 특출한 천재가 어우러져야 한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죄다 범재로 만들어내는 교육을 바꾸지 않고는 어떠한 해법도 소용이 없다.
산업사회까지는 이른바 ‘방법의 지식’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아이가 배고프다고 칭얼댈 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상상력의 지혜’가 중요하다.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배를 만들어주거나,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이들로 하여금 바다를 미치도록 그리워하게 하면 된다”고 한 생 텍쥐페리의 이야기야말로 이미 우리 앞에 시작된 미래를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그런 그리움을 전해주려면 어른들이 그런 그리움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품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그리움을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요즘 벌어지는 교육의 다툼 한복판에서 괴로워하며 나는 이런 그리움을 애타게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