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군 연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던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은 성리학의 발원지 경북 안동에 있다. 상신 대제학을 비롯 청백리를 대거 배출한 안동 김씨는 선조의 고결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사업 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안동은 성리학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영남학파의 영원한 대부 퇴계 이황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퇴계가 태어나기 전에도 안동에는 오랜 학문적 퇴적물이 있었다.
저 멀리 고려 말 안향, 이제현, 우탁 이 이 고장 출신으로 성리학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선비정신이라 부를 만한 고고함과 청백(淸白)을 심어준 이가 바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다. 그는 일생을 대쪽정신으로 청렴결백하게 살다 간 선비였다.
김계행은 안동이라는 지명이 있게 한 고려건국 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김선평(金宣平·안동 김씨 시조)의 후예다.
안동 김씨는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 상신(相臣), 대제학을 비롯 청백리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다. 그러나 어찌 조상의 이름 석자를 팔아먹는 것이 명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으랴.
무릇 명문가라면 높은 자리나 재물을 탐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면 앞장서 헤쳐나가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그런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백당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종가야말로 진정 명문가라 하겠다.
1. 한말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가진이 쓴 보백당 편액. 그도 이 집안 사람이다.2. 늦가을 아침햇살이 든 담장과 후원. 여인네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던 곳이다.
보백당의 불천위를 모신 사당.
그는 피바람이 휘몰아친 두 번의 사화(무오, 갑자)에서 간신히 죽음만 면한 채 안동으로 돌아온 뒤 후학양성에 힘썼다. 오늘날 안동의 선비정신이라 부르는 정신적 토양을 전파하게 된 것이 이때부터다.
일찍이 서울로 진출한 또 다른 안동 김씨 일파 장동파의 대표적 인물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도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면 이곳으로 내려와 재충전의 기회로 삼곤 했는데, 풍진에 오염된 마음을 보백당의 정신으로 씻어내고자 했음이리라. 그 역시 청백리에 올랐다.
보백당의 19대 종손 김주현씨는 말한다. “서원을 보존하고 향사를 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옛 선조의 고결한 정신을 혼탁한 이 시대에 널리 알리는 것이 후손의 의무”라고.
후손들은 이 정신을 구호로 외치기보다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데, 종손은 선비문화수련원 초대원장을 지내며 선비문화 알리기에 분주하다. 또 문중에서는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안동지역 모범 공무원 자녀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10년째 계속하고 있다.
고액 과외니 8학군이니 하며 너나없이 제 자식에게만 눈이 어두운 요즘, 남의 자식들을 보듬고 챙기는 이들의 마음씀이 새삼 선비정신을 생각케 한다.
이 집안의 이런 정신은 종택 대청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보백당 김계행의 다음과 같은 유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우리집에 보물이란 없다. 있다면 오직 청백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