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고고한 淸白정신 깃들인 洗心과 나눔의 산실

  • 사진·글: 정경택 기자

    입력2004-11-25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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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 연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던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은 성리학의 발원지 경북 안동에 있다. 상신 대제학을 비롯 청백리를 대거 배출한 안동 김씨는 선조의 고결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사업 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안동은 성리학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영남학파의 영원한 대부 퇴계 이황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퇴계가 태어나기 전에도 안동에는 오랜 학문적 퇴적물이 있었다.

    저 멀리 고려 말 안향, 이제현, 우탁 이 이 고장 출신으로 성리학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선비정신이라 부를 만한 고고함과 청백(淸白)을 심어준 이가 바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다. 그는 일생을 대쪽정신으로 청렴결백하게 살다 간 선비였다.

    김계행은 안동이라는 지명이 있게 한 고려건국 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김선평(金宣平·안동 김씨 시조)의 후예다.

    안동 김씨는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 상신(相臣), 대제학을 비롯 청백리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다. 그러나 어찌 조상의 이름 석자를 팔아먹는 것이 명문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으랴.



    무릇 명문가라면 높은 자리나 재물을 탐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면 앞장서 헤쳐나가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그런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백당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종가야말로 진정 명문가라 하겠다.

    고고한 淸白정신 깃들인 洗心과 나눔의 산실
    1. 한말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가진이 쓴 보백당 편액. 그도 이 집안 사람이다.2. 늦가을 아침햇살이 든 담장과 후원. 여인네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던 곳이다.

    고고한 淸白정신 깃들인 洗心과 나눔의 산실

    보백당의 불천위를 모신 사당.

    김계행은 연산군 시절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임금에 대한 충간(忠諫)도 성군(聖君)에게나 통하는 법, 폭군 연산에게 통할 리 만무하였다.

    그는 피바람이 휘몰아친 두 번의 사화(무오, 갑자)에서 간신히 죽음만 면한 채 안동으로 돌아온 뒤 후학양성에 힘썼다. 오늘날 안동의 선비정신이라 부르는 정신적 토양을 전파하게 된 것이 이때부터다.

    일찍이 서울로 진출한 또 다른 안동 김씨 일파 장동파의 대표적 인물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도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면 이곳으로 내려와 재충전의 기회로 삼곤 했는데, 풍진에 오염된 마음을 보백당의 정신으로 씻어내고자 했음이리라. 그 역시 청백리에 올랐다.

    보백당의 19대 종손 김주현씨는 말한다. “서원을 보존하고 향사를 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옛 선조의 고결한 정신을 혼탁한 이 시대에 널리 알리는 것이 후손의 의무”라고.

    후손들은 이 정신을 구호로 외치기보다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데, 종손은 선비문화수련원 초대원장을 지내며 선비문화 알리기에 분주하다. 또 문중에서는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안동지역 모범 공무원 자녀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10년째 계속하고 있다.

    고액 과외니 8학군이니 하며 너나없이 제 자식에게만 눈이 어두운 요즘, 남의 자식들을 보듬고 챙기는 이들의 마음씀이 새삼 선비정신을 생각케 한다.

    이 집안의 이런 정신은 종택 대청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보백당 김계행의 다음과 같은 유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우리집에 보물이란 없다. 있다면 오직 청백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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