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美군정에 파직당한 할아버지 ‘항미 DNA’ 이어받은 듯

  • 장제국|동서대학교 부총장·국제관계학과 교수 jchang@dongseo.ac.kr|

    입력2010-02-02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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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서 부인과 정치가의 꿈 얻어
    • 총리 취임 전 신문 기고로 선전포고?
    • 미·일 균열, 한반도에 먹구름 드리워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

    일본에서 정권교체가 거의 확실시되던 지난해 8월27일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 타임스’에 하토야마 유키오 당시 민주당 대표의 기고문이 게재됐다. 제목은 ‘일본의 새로운 길(A New Path for Japan)’. 차기 일본 총리로 거론되고 있었지만 미국 정가에서는 다소 생소했던 일본의 야당 당수가 직접 대미 정책 방향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하여 미국 조야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기고문은 그 후 하토야마 총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미주의자’로 낙인찍는 물증이 되어버렸다.

    이 글의 일본어 전문은 일본 월간지 ‘보이스’ 2009년 9월호에 실렸다. 영문 번역과정에서 원문에 비해 비교적 강한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하토야마의 평소 미국관이 거침없이 표현돼 있다는 점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이 기고문을 읽은 워싱턴의 일본 전문가들은 실망과 동시에 심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왜 그랬을까. 먼저 하토야마는 냉전 종식 후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질서를 ‘실패’로 진단했다. 미국이 그간 ‘시장원리주의(market fundamentalism)’에 기초해 세계화를 추진하다보니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했고 이로 인해 인간의 존엄이 상실됐다는 것이다. 미국형 시장원리주의는 각국의 다양한 전통, 습관, 생활양식을 철저히 배제했고 일본 전통경제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고 비난했다. 읽기에 따라서는 미국이 구축해온 세계질서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미의 물증

    그는 이에 대한 처방으로 ‘우애정신’을 내걸었다. ‘우애정신’은 하토야마 총리의 할아버지인 이치로 전 총리의 지론으로, 손자인 하토야마가 가장 신봉해온 정치철학이었다. 하토야마 총리는 ‘우애정신’을 바탕으로 두 가지 국가목표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가 세계화 논리로 왜곡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이웃나라와의 우애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이었다.



    그는 “일본의 정체성은 아시아에 있다”면서 ‘입아(入亞)’를 강조했다. 또한 미국 일방주의시대의 쇠퇴를 언급하면서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영속성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중국의 부상으로 “앞으로 일본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며 국익을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의 각국은 미국 군사력의 존재가 지역 안정에 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함과 동시에 미국의 과도한 정치적 경제적 힘을 억제하고 싶어한다고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아시아의 통화 통합과 영속적인 안전보장 등 아시아 지역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기고문은 적어도 세 가지의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민주당의 일본은 더 이상 미국에 무조건 추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에 관한 메시지였다. 민주당의 선거공약에 나오는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는 일본의 ‘진정한 독립’의 추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일본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였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동맹국인 미국을 중국과 동일한 선상에 둔다는 것은 자민당 정권하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세 번째는 일본이 그간 공을 들여왔던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중시하는 외교를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은 ‘미국 배제’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본의 노무현’ 상대 안 해?

    미국의 우려는 민주당 집권 후 현실로 다가왔다. 하토야마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2006년 자민당 정권이 미국과 합의한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내 이전약속을 백지화해 다시 검토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의 감정을 자극했고 그 후 양국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미국의 불편한 심기는 여기저기서 감지됐다. 리처드 로렌스 전 미 국방 부차관은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 정부 고관들은 하토야마 총리를 ‘일본의 노무현’이라고 평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하토야마 총리를 “동맹국 지도자로 대우할 수 없고, 전략적 이야기도 같이 할 수 없으며 정보공유도 할 수 없다”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막후 일본 정책통인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차관도 공개적으로 미국의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이러한 우려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은 지난 미일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새로운 동맹 강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동맹 심화 회의’ 개최를 거부했다. 지난해 10월20~21일 일본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에 대해 “일본이 합의를 그대로 준수하지 않을 경우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 8000명의 괌 이전과 부지 이전을 중지할 것”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미일 합의안은 다시 협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못 박았고 “일본이 미군철수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철수한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긴밀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던 미일 양국 간 인적 파이프라인도 급속도로 위축됐다. 지미(知美)파 일본 논객들의 정부정책 자문은 두드러지게 줄었다. ‘관료배제’라는 원칙으로 인해 외무 관료는 정책입안 단계에서 현저하게 약화됐다. 대미정책을 누가 입안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한 불투명성을 하소연하는 관료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실이다.

    워싱턴의 사정도 마찬가지로 하토야마 정권과 선이 닿는 지일(知日)파가 없어 정보 부족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한다. 양국관계를 반영하듯 올해가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임에도 오바마 정권 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왜 미국과의 관계를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하토야마 총리가 불화를 일으키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와 미국의 오랜 인연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미·일 인적 네트워크 급랭

    사실 하토야마 총리가 걸어온 배경을 보면 그는 반미주의자가 결코 될 수 없다. 기본적으로 그는 보수주의자로 자민당 출신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을 했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인생을 살아와 좌파 반미 이데올로기로 편향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에게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선물을 줬다. 먼저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에게 박사학위를 안겨줬다. 그는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한 후 1970년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예정대로 1972년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연이어 1976년 ‘오퍼레이션 리서치(operation research)’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통해 미국 명문대학에서 학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면허증을 확보한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 주류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수많은 스탠퍼드대 출신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안겨줬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존 루스 변호사를 주일 미국대사로 임명했는데 그도 스탠퍼드대 출신이다. 스탠퍼드대 홈페이지에는 하토야마 총리의 취임을 축하하는 기사와 함께 루스 주일 미국대사의 사진을 동시에 게재하고 있다. 루스 대사는 지난 미국 대선 기간 중 자금조달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공헌해 오바마 대통령의 개인적 신임이 매우 두텁고 강력한 스탠퍼드대 네트워크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가 평생 동반자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금슬이 좋은 것으로 소문난 하토야마 부부가 첫 둥지를 튼 곳은 이 대학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요리점에서 일하고 있던 미유키 여사를 만나기 위해 하토야마 총리는 편도 1시간 거리의 고속도로를 수없이 질주했다고 한다. 그러한 열정적 사귐 끝에 미국 생활 5년째 되던 1975년 대학 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에게 또 다른 꿈을 주었다. 그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동생인 하토야마 구니오 중의원은 유치원 시절부터 “나의 장래 꿈은 총리대신”이라고 하며 정치가의 꿈을 키워왔다. ‘일본의 케네디가’로 일컬어지는 하토야마가에서 장손인 하토야마 총리를 제치고 동생 구니오가 먼저 정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하토야마 총리가 처음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한 하토야마를 정치에 눈뜨게 한 것이 바로 미국인들의 애국심이었다. 하토야마는 1992년 6월13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1976년은 미국 건국 200주년으로 미국민이 새로운 여정을 떠날 것을 맹세한 해였다. (당시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열광을 보면서 ‘일본인의 애국심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라고 자문했다. 내가 정치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라고 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주택가에 둘러싸인 일본 오키나와 후텐마 비행장.

    이렇듯 하토야마 총리의 미국에서의 경험만을 놓고 보면 그가 반미주의자가 될 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은 그의 인생항로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제공한 축복의 땅이었다. 그 역시 여러 기고문에서 미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 표현했다.

    하토야마 총리와 미국의 악연은 그의 가문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하토야마 가문이 배출한 정치가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최하가 ‘대신(장관)’이다. 외무대신을 지낸 하토야마 총리의 아버지와 최근까지 자민당 정권의 총무처장관을 지낸 동생 구니오가 그들이다. 증조부는 중의원의장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하토야마가의 정치인들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미국과 인연을 맺었다. 하토야마 총리의 증조부인 가즈오는 일본 최초의 ‘지미파’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1875년에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에 올랐다. 미국 명문 사립인 컬럼비아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았고 연이어 1880년 예일대에서 만국공법을 전공하여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첫 일본인이 됐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해 미국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일본에 이식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서 근대법치국가로 체제가 이행하고 있던 일본에 있어 무엇보다 국민 인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 후 그는 일본 최초의 변호사가 되어 일본변호사회를 창설했다. 유창한 영어실력은 그를 외무차관으로 일하게 했고 일본이 맺고 있던 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인 이치로 전 총리다. 하토야마 총리 스스로 자신의 정치는 할아버지 정치의 계승이라고 말한다. 강연 때마다 할아버지를 언급할 정도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존경하는 할아버지와 미국의 관계는 악연으로 시작됐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극동미군사령부(GHQ)는 이치로를 ‘군부대에 협력한 군국주의자’로 분류해 모든 공직에서 추방했다. 이후 이치로는 시골에서 밭을 갈며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치로의 부정적 미국관이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 눈치 안 본 할아버지

    그 후 복권된 이치로는 친미정책을 폈던 요시다 시게루 정권을 강하게 몰아세워 하야시켰다. 이치로는 1954년 12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2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미국과의 관계에 불편을 초래한 대외정책을 마다하지 않았다. 1956년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를 실현시켰다. 또한 미국이 만들어준 평화헌법을 수정해 일본의 독립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재군비를 주장했다. 주일미군 분담금 삭감을 주장해 미국과 갈등을 초래한 바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정치적 사표로 삼고 있는 할아버지의 미국관이 하토야마 총리의 미국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하토야마 총리의 유엔(UN) 중시 철학이다.

    유엔은 이치로 전 총리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이치로는 소련과 국교정상화를 성립시킨 후 일본의 유엔 가입을 성사시켰다. 이치로는 일본의 유엔가입을 위해 정열을 바쳤다. 이것은 미국으로부터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이 유엔에 가입한 지 이틀 만에 이치로 내각은 해산됐다. 이치로는 그토록 원했던 유엔총회 참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총리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입버릇처럼 “할아버지가 못다 이룬 과업을 완성시키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실제로 총리가 된 뒤 유엔총회에 출석해 유창한 영어로 연설했다. 할아버지의 유업을 이뤘다는 점에서 감개무량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토야마 총리는 2005년 출판한 저서 ‘신헌법시안’에서 “일본 군사조직의 지휘권을 국제기구에 위탁하자”면서 주권 일부의 유엔 이양을 주장할 정도로 유엔을 중시했다.

    그러면 과연 하토야마 총리는 반미주의자일까. 일각에서는 일본 국내 정치현실이 현재와 같은 대미 마찰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상황을 들고 있다.

    “일본은 형식상 독립국”

    먼저 민주당 정권은 연립내각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서 408석이라는 경이로운 의석을 확보했지만, 참의원에서는 과반수를 점유하지 못하고 있다. 중의원에서 연립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 문제를 2006년 미일합의대로 이행한다면 이에 극렬 반대하는 사민당과의 연립이 깨어질 것이 확실하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런 사정상 올 7월 참의원 선거까지는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채 미국과의 마찰을 일부 감수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만약 민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또다시 단독 과반 의석 획득에 실패한다면 하토야마 정권은 미국이냐, 연립정권이냐를 놓고 중대결단을 내려야 한다.

    두 번째는 반(反)자민당 정서에 근거한 것이다. 자민당 정권은 일본을 반세기 동안 지배해왔다. 그 중심에 미국과의 끈끈한 관계가 있었다. 미국은 그간 일본을 종속적 존재로 취급하면서 동북아에서 이익을 취해왔고 반대급부로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가능했다는 게 민주당의 판단으로 민주당은 이러한 암묵적 거래는 종식돼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월간지 ‘선택’ 2000년 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자민당) 보수정치가 장기집권한 결과 보신정치로 흘러 대미추종외교에 안주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냉전이 종식되어도 자민당은 새로운 가치관을 내지 않으므로 민주당은 ‘자립과 공생’ 외교를 확립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는 노무현 정권시절 미국을 한국의 기득권 세력 형성에 일조한 것으로 몰아세워 “반미면 좀 어떠냐”라고 했던 정서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하겠다.

    세 번째로 ‘오키나와현민 생각이 우선’이라는 철학이다. 오키나와현민은 미군기지 문제로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군용기 이착륙으로 인한 소음, 미군에 의한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민주당의 선거공약집인 ‘매니페스토’에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이미 명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를 번복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하토야마 총리는 확실히 대미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저서에서 “현재의 일본은 형식상 독립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진정으로 독립을 얻었는가”라며 강한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또한 월간지 ‘선택’ 2000년 12월호 기고문에서도 자신은 ‘뉴리버럴(New Liberal)’이고 친미-미일동맹 지지자이지만 “동맹을 운영함에 있어 반드시 일본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와 민주당 간부들조차 “총리는 미국의 군사력으로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강한 것 같지 않다”고 평할 정도다. 현재의 대미 마찰이 대미 등거리 신념에 기인한 것이라면 미일관계는 상당 기간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마찰음을 내는 데 대해 내심 ‘즐기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마 한미관계가 불편할 때 미일관계가 잘나가던 것에 비쳐 역전의 맛을 보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장제국

    1964년 부산 출생

    미국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학사·석사

    미국 시라큐스대 법학대학원 법학박사

    일본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

    일본 이토추 종합상사 특별연구원

    미국 몰렉스 인터내셔널 감사 변호사

    동서대학교 일본연구센터 소장

    現 동서대학교 부총장, 국제관계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저서 및 논문 : ‘신한일관계론’, ‘평양을 향한 부시의 전략(Bush′s Policy toward Pyongyang: Its structure and Future)’ 등


    그러나 미일관계의 악화는 북한의 핵 위협 및 중국의 대두를 목전에 두고 있는 한국에 도움이 결코 되지 않는다. 만약 미군이 일본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는 한반도 안보에 비상등이 켜지는 것과 같다. 한반도 유사시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이를 저지하는 최전선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기능의 부재는 한국 방위에 심각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안보에 큰 위협

    미군이 현저히 약화된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은 패권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중국의 팽창을 막아주는 균형자 역할을 해왔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미군은 일본을 방위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갈 수 없도록 했다. 실제로 하토야마 총리는 “미사일방어망을 완비하면 미국의 힘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전수방위의 범위 내에서 일본의 안전은 지킬 수 있다”라고 했다.

    이래저래 주일미군의 공백은 한반도에 암운을 드리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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