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 종전협상, 사실상 미-러-서방 3축 협상
전쟁 거치며 러시아는 외려 경제성장
유럽 지원 중단한다면 종전 빨리 이뤄질 수도
미‧중 외에도 강대국들이 정하는 국제정세
격변기일수록 중간국은 일관적 외교가 유리
중국, 해상 전력 규모만으론 미국 압도
한국, 미국 해상 전력 강화 도우며 협상 주도해야
2월 28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이날 회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하지만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인 우크라이나는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
4월 25일 전쟁기념사업회(KWO)가 개최한 ‘제8회 KWO 나지포럼’은 이러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진행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에 주목했다. 강대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는 상황이 한국에도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4월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8회 KWO 나지포럼. 홍중식 기자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이 제8회 KWO 나지포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중식 기자
주제 발표를 맡은 신 교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종전 협상은 국제정치의 원칙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얄타 회담에서 향후 국제정세의 질서가 확립됐던 것처럼, 이번 종전 협상도 지금의 다극적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변곡점”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중심의 세계는 끝났다
신 교수는 “미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포기했다”고 전제하면서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인정하듯 트럼프 행정부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했고, 이후 강대국들이 이권을 추구하며 다극적 국제질서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세계 경찰의 지위는 포기했지만, 세계 최고의 강대국 지위는 포기할 수 없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우방들과 책임은 나누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재정‧무역 적자 해소, 산업 생산력 재건 등 국익을 추구하겠다는 원칙하에 움직이고 있다”고 오늘날의 국제 질서를 분석했다.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신 교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모두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기 힘든 상황이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이나 미국의 지원 없이 러시아를 막아내기는 어렵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역을 정복하기에는 군사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권의 결정에 따라 전쟁의 향방이 바뀐다”고 말했다.

제8회 KWO 나지포럼의 주제발표를 맡은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홍중식 기자
신 교수는 “우크라이나도 전쟁을 겪으며 경제와 산업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며 “현재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사용 드론을 생산하는 국가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결국 종전의 향방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의지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유럽 등 서방세계와 미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지원과 협상의 정도에 따라 종전 협상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라며 6가지 종전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유럽 등 서방세계가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면 ‘빠른 시일 내 종전’ △서방세계가 지원을 줄이고 전쟁 당사국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면 ‘긴 협상 과정’ △우크라이나 지원은 유지하고 협상도 적극적으로 이뤄진다면 ‘분쟁과 협상 병행 형국’ △우크라이나 지원이 끊기고 전쟁 당사국이 협상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테러전과 게릴라전’ △우크라이나 지원이 줄고 전쟁 당사국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면 ‘저강도 분쟁’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휴전 협상도 지지부진하다면 ‘고강도 분쟁’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예상 시나리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강대국 세력 균형 맞출 수 있는 전략 수립해야
한반도와 우크라이나는 지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날 포럼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종전 과정에 주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신 교수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중간국의 상황을 대표한다”며 “강대국의 국력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외교적 전략을 탐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그는 동시에 “전략을 정했다면 이를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강대국은 상대적 약소국과 외교 전략을 수립할 때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했던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방을 넘나드는 외교 전략을 펼치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라고 부연했다.주우크라이나대사와 주러시아 대사를 모두 지낸 박노벽 전 대사도 “약소국이 정치적 결단이 확실하다면 어떤 강대국도 전쟁을 불사하기는 어렵다”며 신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에 관해서는 “유럽이 재무장에 성공한다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그가 생각하는 변수는 미국의 의사였다. 박 전 대사는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가 미국에 충분한 경제적 이득을 제공하지 않으면 중재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제8회 KWO 나지포럼 종합토론 패널로 참석한 박노벽 전 주러시아 대사. 홍중식 기자
박 전 대사는 또 “각 진영의 세력균형과 제도가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이제는 강대국의 이익과 균형이 세계 정세를 이끌고 있다”고 평했다. 그만큼 동맹과 군사, 경제, 외교적 역량이 중요해진 셈이다. 발언 말미에 박 전 대사는 “러시아 내부에서는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이 크다”며 “한국도 블라디미르 푸틴 다음의 러시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도 짚었다.
유영철 전 센터장은 “우크라이나의 안일한 대러 대응을 타산지석으로 여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전 센터장의 설명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강대국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국가였다. 60만3500㎢가 넘는 국토(대한민국의 약 6배)를 갖췄고, 다양한 지하자원과 소련 시절부터 내려왔던 기술력을 가진 국가였다.

유영철 전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이 제8회 KWO 나지포럼에서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중식 기자
한국, 외교‧안보 역량 강화해야
포럼 참가자들은 대부분 한국이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최윤희 총재는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상정하고 국가 방위 전략을 짜서는 안 된다”며 “한국이 미국의 방위 전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충분히 보여주고 이를 통해 안보 협력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4월 초 미 해군연맹이 주최하는 방산 전시회를 다녀오며 미군 해상 방위력의 심각한 현주소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제38대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한 최윤희 대한민국해양연맹 총재. 홍중식 기자
중국이 조선 산업을 육성하는 동안, 미군의 조선 산업은 쇠퇴했다. 수백 개의 조선소를 운영하는 중국은 오늘날 약 7000척의 상선대를 운용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공산당의 지휘 아래 이 상선대가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예비 전력이 된다. 이에 반해 미군의 상선대는 80여 척에 그친다. 한국 전쟁 당시 수송을 담당했던 상선대(255척)의 규모에도 못 미친다.
최 총재는 “한국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며 “한국이 우수한 조선‧해운 역량을 바탕으로 미국의 안보 공백을 메워준다면 방위비 분담 등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신석호 연구위원도 “지금의 한국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고 봤다. 그는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막는 핵심적 위치에 있다”며 “한국도 외교 안보 역량을 키워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전략적 삼각관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KWO 나지포럼은 ‘전쟁기념사업회(Korea War-memorial Organization) 나라를 지키는 포럼’이라는 뜻으로, 국가안보의 중요성과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기획됐다. 제9회 KWO 나지포럼은 6월에 열릴 예정이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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