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뗏목탐험가인 윤명철 교수. 우뚝 선 콧대에서 떠다니는 뗏목 같은 그의 본질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수전(水戰)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국내외에서 수전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윤명철(尹明喆·51)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를 만나 수전에 관한 철학을 들어보기로 했다. 좀더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윤 교수는 세계적인 뗏목탐험가다. 그가 뗏목을 타고 돌아다닌 코스는 다음과 같다.
1982년, 거제도에서 출발해 일본 규수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뗏목탐험을 시작했지만 출발한 지 33시간 만에 중단했다. 첫 탐험이 중도에서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해에는 성공했다. 거제도에서 출발해 일본의 쓰시마섬을 지나 오시마 열도로 가는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였다. 1996년에는 황해문화 뗏목 학술탐사를 했다. 중국 저장성에서 산둥성 지산까지 가는 코스였다.
1997년에는 중국 저장성 저우산 군도에서 흑산도를 경유하여 인천에 도착했고, 2003년에는 저장성에서 출발해 황해를 건너 인천에 간 다음 다시 제주도를 경유해 일본 규수의 나루시마에 도착했다.
“바다와 나, 대자연과 내가 하나”
일엽편주 뗏목에 몸을 맡기고 황해를 제 집 안마당처럼 돌아다닌 윤 교수의 인상은 의외로 양순하다. 목숨을 거는 뗏목탐험에 나선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얼굴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다분히 문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문사(文士)의 이미지다. 하지만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콧대가 똑바로 섰다. 콧대는 결단과 돌격력을 상징한다. 유명한 무인(武人)들은 공통적으로 콧대가 있다.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을 겪어낸 고승들도 대개 콧대가 섰다.
콧대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돌진하는 힘을 준다. 따라서 코가 뭉뚝한 사람은 중도통합적인 절충을 선호하기 때문에 결단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콧대를 보고 윤 교수의 본질을 짐작하게 됐다. 그의 본질은 부동(浮動)하는 뗏목이다. ‘윤 뗏목’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바다에 떠 있는 뗏목은 어떤 의미인가.
“바다 위 뗏목은 실존을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에 앉아 있으면 참선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특히 하늘에 별빛만 보이고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 한가운데서 뗏목에 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으면 우주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절대고독에 휩싸인다. 이는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뭐꼬’ 화두를 참구하는 선승과 비슷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다와 하늘, 그 절대공간 사이에 나 혼자 있다 보면 ‘명선일체(命禪一體)’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선방에서 말하는 ‘목숨과 선이 하나로 관통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 홀로 떠 있으면 대단한 공포를 느낄 것 같다. 한 발만 내디디면 깜깜한 심연으로 빨려들어간다고 생각할 때 엄청난 공포가 밀려오지 않는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번 무섭다고 생각하면 공포가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러면 뗏목을 탈 수 없다. 밝은 생각을 해야 한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시고 나서 한 말이 있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이요,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다음에 전개되는 상황이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불안하게 보면 불안하지만 태연하게 상황을 바라보면 바다처럼 좋은 곳이 없다.
뗏목에는 보통 원두막처럼 조그만 집을 만들어놓는다. 짐을 넣거나 대원들이 취침하기 위한 용도다. 밤에 원두막 지붕 위에 앉아 있으면 별빛만 보인다. 복잡다단한 사회와 완전히 절연된 공간인 것이다. 전화도 없고 TV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그렇게 별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저절로 호흡이 아랫배로 내려가게 된다. 서울에서 쫓기는 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이 순간순간 요동치면서 호흡이 아랫배로 내려가지 못한다. 그러나 뗏목 지붕 위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할 수 있다. 바다의 뗏목 원두막 위야말로 내게는 아주 푹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