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것은 세금으로부터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질투심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때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 대한 정보가 공개될수록 득보다 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 은둔과 비밀을 택한다. 가진 자의 예의(?)를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것도 어쩌면 없는 자 가난한 자들의 질시를 무마하는 일종의 ‘보험’일 수 있다.
뉴욕 유대인 사회의 거목
하지만 20세기 초 미국에서 태어난 한 재벌가 여자는 자신의 삶을 대중의 노출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그녀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 부와 재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 애썼고 계급이 갈라놓은 금기와 경계를 넘어서며 가난한 남자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20세기 현대미술계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 이야기다.
물질이 부족한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삶의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유’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물질이 넘칠수록 영혼은 빈곤해질 수 있다. 페기는 비록 가진 것은 남부러울 것 없었으나 불행한 가정사로 고통 받으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페기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전통적인 유대인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는 남북전쟁 기간 연방군의 군복을 만드는 일로 부(富)를 쌓았다. 행상인이었던 친할아버지 구겐하임은 전세계 구리광산을 사들이는 재벌이었다. 1898년 페기가 태어나던 해 친가와 외가는 뉴욕 유대인 사회의 거목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계(家系)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외가가 심했다. 페기가 잘 따랐던 이모는 상습적으로 도박을 했고 결벽증이 있었다. 이모부는 자살했다. 외삼촌들 역시 허랑방탕했으며 돈이 떨어지면 아버지(페기의 외할아버지)를 협박했다. 그 중 한 명은 결국 권총 자살했다. 외할아버지 주변에는 정부(情婦)가 끊이지 않았다.
페기는 뉴욕 이스트 69번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훗날 어릴 적을 회고하면서 “어떤 종류의 즐거운 추억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가정교사에게 홈스쿨링을 받은 페기에게는 친구도 없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고상한 취향을 물려주고 싶어한 아버지 덕분에 박물관 등을 다니며 고전미술에 대한 심미안을 획득했고 유럽 역사를 배웠으며 대문호의 작품을 읽었다.
사생활이 방탕한 아버지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였다. 페기는 일곱 살 때 저녁 식사 중에 “그렇게 여러 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애인이 있지요?”라고 물었다가 식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주식과 채권투자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투자가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일탈로 힘들어했다. 페기에게 존경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그만 타이타닉 호 침몰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