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콤플렉스마저 DJ를 닮은 ‘역전의 승부사’

  • 문 철 fullmoon@donga.com

    입력2005-05-04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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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국주도권을 잡으려는 여야의 격돌로 새해 정국이 얼어붙고 있다. 이런 대결정국의 한편에 김중권 신임민주당대표가 서 있다. 김대표 등장 후 여권의 강공이 시작됐고 그를 알아야 현정국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강한 여당론’의 주창자 김중권 대표는 누구일까.
    2001년 1월2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지하1층 강당. 김중권(金重權) 신임 대표최고위원이 시무식에서 열띤 목소리로 ‘강한 여당론’을 폈다. 그는 10여 일 전인 구랍 12월19일 당대표에 지명됐고, 다음날 당무위원회의에서 인준을 받은 새내기 대표였다.

    “민주당은 집권당으로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강력하고 든든하고 튼튼한 집권당이 될 때 국민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감 없고 유약하면 국민들이 믿고 지지하지 않습니다. 든든하고 튼튼한 여당, 여당다운 여당이 됩시다. 정부와 여당은 함께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공동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를 마다하거나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는 원고도 없이 일사천리로 연설을 소화했다. 조금 반복적인 표현이 있었지만 문장은 짧고 간결했고,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여러 차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고자 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최고위원과 당4역, 의원, 사무처요원 등 200여 명이 빼곡히 들어선 강당에 작은 수군거림이 일었다.

    “김대표가 원래 저렇게 연설을 잘하나?”

    “그렇대. 고등학교 다닐 때 웅변도 했다지, 아마.”



    그의 연설은 이어졌다.

    “2002년에 대선이 있습니다. 개혁의 완수를 위해 정권재창출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겠다는 의지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국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날 연설의 요지는 한마디로 ‘강한 여당론’이었고 이는 이후 김대표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정가에 알려지게 됐다. 과연 민주당은 ‘강한 여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김중권 대표는 ‘강한 여당’을 만들 능력이 있는 인물일까.

    사실 전임 서영훈(徐英勳) 대표 시대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서대표는 지갑 속에 달랑 2000원을 가지고 다니다 목격될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정치력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워낙 많았다. 서대표체제는 2000년 4·13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되는데 실패했고, 자민련과의 공조 균열로 총선 후 8개월 동안 국회 파행을 막지 못했으며, 연말 들어서는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의 ‘권노갑(權魯甲) 퇴진론’을 계기로 당이 내홍(內訌)상태로 빠져들었음에도 무기력했다.

    ‘강한 여당론’ 주창하며 등장

    김대표 체제는 이런 ‘약한 여당’의 바탕 위에서 대표에 출범했고, 그 자신은 대표 지명 직후부터 야당은 물론 당내부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한나라당의 권철현 대변인은 대표 지명일인 12월19일 곧바로 논평을 통해 ‘김중권 흠집내기’를 시도했다.

    “그 난리 끝에 내놓은 인물이 고작 구태(舊態)의 상징 김중권 대표인가? 국정쇄신책의 입장이 아니라 정권재창출에 눈이 먼 인사다. 한마디로 망사(亡事)의 극치다. ‘20억+α’의 돈 심부름꾼, 허울좋은 동진(東進)정책으로 지역감정의 골을 더 깊게 파놓은 인물이다. 선거부정의 상징, 비서실장으로 대통령의 귀와 눈을 막아 국민의 정부 개혁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당내에서조차 난리법석이 나겠는가?”

    권대변인이 비꼰 대로 당내 반발이 거세었다. 일부 중진들이 ‘비토’했고 초재선의원들이 ‘개혁노선’을 요구하고 나선 것.

    4선인 안동선 의원은 아예 21일 기자회견을 자청, “김대표 지명은 집권세력의 정통성이 전혀 없는 ‘제3의 정당’의 출현이며 국정개혁 추진을 기대했던 국민의 바람과는 거리가 먼 인사”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정범구 의원 등 10여 명의 초재선의원들은 “개혁정책을 통한 민심회복이라는 요구가 대표인선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압박했다.

    김대표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노무현(盧武鉉) 해양수산부장관이었다.

    노장관은 12월21일 저녁 출입기자들과의 송년모임에서 작심한 듯 김대표를 비판했다.

    “웃긴다.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기회주의자는 포섭대상이긴 해도 지도자로는 모시지 않는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안의원 등이 반발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맞는 얘기 아니냐. 공감한다.”

    하지만 파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장관은 이틀 뒤인 12월23일 사과성명을 냈다. 파문이 지속될 경우 당과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고, 결국 자신의 입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대표는 ‘악몽’과도 같은 며칠간 침묵했다. 그리고 크리마스 이브인 12월24일 성탄절 예배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처음 입을 열었다.

    “(노장관이) 취중에서 한 발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한다. 그것을 가지고 문제삼는 것보다 서로 덮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김대표는 1월10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안동선 의원을 상임고문에 임명했다.

    시련이 수그러들자 김대표는 ‘강한 여당론’ 실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과업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2001년도 예산안 처리. 국회는 이미 법정기일인 12월2일을 지키지 못했고 정기국회 마지막날인 12월9일도 넘겼다. 헌정사에 처음 있는 이런 악례(惡例)는 ‘강한 여당’의 첫 난관이었던 셈이다.

    그는 성탄절인 12월25일 아침 일찍 당사로 출근, ‘예산안 최종점검회의’를 주재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일요일에는 거의 하루종일 교회에 살았던 그가 ‘일요근무’ 특히 ‘성탄절근무’마저 불사한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김대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서울 신당동 ‘달동네’에 자리한 약수교회는 1967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교회다. 3선 의원 때도, 청와대 비서실장 때도, 집권당 대표가 돼서도 그대로 다닌다. 판사 시절인 1978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원에 입학, 1981년 신학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가 보인 집념이 효과가 좀 있었는지 예산안은 12월26일 밤 국회를 통과했다. 김대표는 얼마 후 기자에게 “사실 당 안팎에서 내가 대표가 된 데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온 것보다 예산안 처리가 내겐 더욱 큰 고비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예산안도 처리 못하는 한심한 집권당 대표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는 얘기였다.

    ‘강한 여당론’ 바람은 당 내부로도 불었다. 김대표는 연말 당 사무처를 순방한 뒤 커다란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런 자세로 정권재창출이 가능하겠는가. 눈이 살아 있어야 한다. 반짝반짝 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일을 주고, 결과를 묻겠다. 본인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 대표비서실부터 전부 바꿔야 한다.”

    김대표의 발언은 이른바 ‘동태눈깔론’으로 포장돼 당내에 회자됐다. 일부 사무처 요원들은 “우리 눈이 동태눈깔이란 말이냐.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세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제대로 일할 대표가 왔나보다”라는 긍정적 시각도 없지 않았다.

    김대표 체제가 어수선한 당내 분위기를 예상보다 빨리 다잡는 데는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김대표 자신도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김대통령과 통화했다.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대통령이 당무를 위임했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자신의 행보에 힘을 실었다. 김대통령이 민주당사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김대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예컨대 김대표의 발언은 이런 식이었다.

    “예산안과 관련해서 청와대에 보고하니 대통령이 ‘그런 얘기는 나에게 하지 말고 대표 당신이 책임지고 해라’고 말씀했다. 이제 당은 대통령만 쳐다보지 말고,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당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나가는 것이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김대표의 힘의 원천(源泉)이 DJ라는데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아니, 그에 대한 DJ의 신임은 단순한 신임 수준을 넘어 ‘총애’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정도다.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깊어진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억+α’의 인연. 즉 92년 대선 정국에서 노태우(盧泰愚) 당시 대통령이 김중권 당시 청와대정무수석에게 심부름을 시켜 김대중 당시 민주당대표에게 20억원을 전달하게 한 사건 이후 맺어진 신의다.

    김대표는 이를 이렇게 술회했다.

    “1992년 11월로 기억합니다. 본관에서 대통령이 찾는 전화가 와 올라갔습니다. 대통령이 ‘여당은 선거자금을 그런대로 꾸려가고 있는 것 같다. 정주영(鄭周永) 국민당후보는 재벌정당이니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 민주당은 정치자금법에 의한 후원금이나 또는 지정기탁금이 없어 어려운 것 같다.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관심표명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사무실에 내려와 있으니 본관에서 왔다면서 예쁘게 포장한 리본까지 달린 와이셔츠 통을 갖다 주더군요. 그것을 가지고 그날 밤 목동 처제 집에 머무르고 있던 김대통령에게 갔습니다.

    몇 번 기회를 보다 말을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이 김대중이가 정표(情表)는 감사해 하더라고 말씀드려라. 받을 수 없다’고 펄쩍 뛰더군요. 어색한 순간이 흘렀습니다. 그것을 다시 들고 나올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 번 간청했습니다. 김대통령은 밖에 있던 비서관을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것을 풀었지요. 100만원짜리 수표 100개를 묶은 20다발이 통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었습니다. 20억원이었습니다. 그 이후 권노갑씨를 만났더니 ‘관심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는 말을 하기에 그 돈이 당에 입금된 것을 간접적으로 알았습니다.”

    김중권과 DJ는 닮은꼴

    그리고 1996년 ‘4·11’총선에서 당시 신한국당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이 ‘20억+α’의혹을 제기했지만, 김대표는 ‘선물상자의 비밀’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었고 이것이 DJ의 신뢰를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게 정가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김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내가 DJ에게 20억원을 전달한 장본인이어서가 아니라 국회 법사위원장 시절 한번도 날치기를 하지 않고 모든 사안을 여야 합의 하에 무리없이 처리하는 모습을 인상깊게 본 것 같다”고 말한다. 김대표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할 때 DJ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는 게 김대표의 기억이다.

    어쨌거나 그는 15대 대선을 불과 40여일 앞둔 시점에서 국민회의에 입당, 처음으로 DJ와 한 배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국민회의 대통령후보였던 DJ는 1997년 11월11일 “한번 만나고 싶다”며 그를 서울 서교호텔로 불러냈다. 이 자리에서 DJ는 “당에 들어와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김대표는 이를 잡았다. 그리고 김대표는 대선기간 ‘대선자문회의’ 의장을 맡아 조세형(趙世衡) 전총재대행, 이종찬(李鍾贊) 전국정원장, 이해찬(李海瓚) 최고위원 이강래(李康來) 의원 등 당의 최고 선거참모들과 ‘DJ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했다. 서울 마포의 ‘홀리데이 인서울’ 호텔에 차려진 그의 비밀사무실은 당시 국민회의의 대선전략에 관한 한 최고의 기구로 그 존재 자체가 대선 뒤에야 알려질 만큼 은밀한 공간이었다.

    JK(김대표의 애칭)에 대한 DJ의 총애를 두 사람의 인간적 공통점에서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DJ를 잘 아는 동교동계 인사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확실히 DJ와 JK는 ‘닮은 꼴’이다. 두 콤플렉스가 두 사람의 친밀감을 높여주고 있다. 하나는 ‘변방 콤플렉스’다. DJ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라는 외딴 섬에서 태어났고 JK는 서울에서 차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경북 울진군에서 태어났다. DJ는 이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목포나 광주 같은 ‘지방도시’를 건너 뛰어 ‘서울정치’를 시도했고 김대표는 TK(대구-경북)의 중심인 대구와 자신을 일체화하려고 애썼다. 특히 JK의 고향인 울진이 한때 강원도에 속해 있었던 점이 그를 TK 중심 지향적인 인물로 만든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비명문교 콤플렉스’다. DJ는 목포상고-건국대학교 출신이며 JK는 울진의 후포고와 고려대 법대를 나왔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DJ는 학벌은 잘 따지지 않는 대신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수성가형 인물을 아낀다. JK는 고려대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가 고려대 출신을 끔찍이 아끼고 챙기는 사실은 정가에 널리 알려져 있다.”

    ‘김중권식 정치’가 100%의 DJ의 후광으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국민들 사이에 김대표의 이미지는 아직 대통령 한 분을 받들어 모시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미지를 별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실제로 그에게는 ‘참모형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가 당대표가 된 후 보여준 정치는 적어도 그런 이미지와 꽤 거리가 멀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 있으려고 했고, 정국을 주도하려 한 ‘매우 적극적이고 강한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심고 있다.

    실제로 그는 지난 연말과 신년 벽두를 달군 대치정국에서 늘 뉴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먼저 ‘DJP공조’ 복원을 선언했다. 12월29일 당4역 회의에서 “자민련과의 공조가 복원됐다. 12월22일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를 방문했을 때 ‘민주당과 자민련이 힘을 합쳐 국민의 정부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DJP공조’의 필요성을 확인했다”고 치고 나갔다.

    이튿날 민주당의 배기선(裵基善) 송석찬(宋錫贊) 송영진(宋榮珍) 의원이 탈당, 자민련으로 이적하는 이른바 ‘의원 꿔주고 받기’가 기습작전처럼 순식간에 이뤄졌다. 우당(友黨)인 자민련이 교섭단체 구성요건(20석)을 갖출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국민여론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당연히 민주당내에서 아무도 ‘의원 꿔주기’의 정당성이나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짐을 김영환(金榮煥) 대변인에게만 떠넘기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김대표는 달랐다.

    2001년 정월 초하루 서울 북아현동 김대표 자택. 김대표는 한복 차림으로 쉴새없이 몰려드는 정치인과 기자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새해 첫날 그는 덕담만 하려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거실을 가득 채우면 “할 말이 있다”고 정색을 하고 자신의 주장을 폈다.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총선 민의에 대한 배반이 아니냐는 말이 있습니다. 총선 민의가 무엇입니까. 핵심은 어느 정당에도 과반수를 주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야합의로 대치정국을 막고 생산적인 국회를 만들어달라는 것이 총선 민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총선 이후 8개월 동안 어떻게 됐습니까. 국회는 파행되고 대치국면으로 가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은 국회의 정상적인 운영을 바랍니다. 한나라당이 우리에 대해 ‘일대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하는데 누가, 누구를 사기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총선 민의를 거스른 것도, 국민 기만극도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어쨌거나 김대표 체제가 출범하자마자 ‘DJP 공조’가 복원됐고 자민련 교섭단체 문제도 해결된 것은 사실이었다. 당내에서는 “전임 서영훈 대표 때 같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공과를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김대표의 추진력만큼은 다시 봐야 한다”는 소리들이 나왔다.

    ‘김중권식 정치’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새해 벽두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 사건이 터지자 그는 96년 총선 당시 신한국당 선대위의장이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겨냥, “이총재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면서 이총재의 연루 의혹을 처음 제기했다. 그의 논지는 이랬다.

    “선대위의장은 선거를 책임지고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다. 선대위의장이 자금의 세세한 흐름을 보고받았을 것이고 최소한 큰 흐름이라도 보고받았을 것이다. 액수가 크니까 이총재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국민은 오히려 선대위의장이 세세한 자금흐름을 다 파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너무 앞서간다” 비판도

    김대표는 또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안기부로부터 돈 받은 사람들의 리스트가 완전 확인됐다는 말을 들었다. 수사를 통해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본다”고 ‘리스트의 존재’를 처음 언급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안기부 자금 지원 명단 및 내역’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과정에서 김대표에 쏟아진 비난도 적지 않았다. 당내에서조차 “김대표가 너무 앞서가 청와대나 검찰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은 “검찰수사를 촉구하는 기본적 입장엔 변화가 없지만 정치불신을 초래하는 정쟁화를 막고 진상규명에 장애가 되는 것을 조성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고 신낙균(申樂均) 최고위원 등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김대표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검찰이 진실을 밝힐 문제로 정치쟁점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근본적으로 정치권의 문제”라며 “한나라당이 관련된 문제인데 정치권이 함구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직무유기”라고 쏘아붙였다. 확실히 그는 매사에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처럼 김대표는 본래 강인하고 철저한 정치인이었을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보낸 2년(1997년12월∼1999년11월)을 들여다보면 분명 그런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청와대 비서실장에 취임했을 때 취임사 요지는 이랬다.

    “청와대 비서관은 대통령의 혼(魂)을 닮아야 한다. 청와대 비서관도 물론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관이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비전을 이해하고 체화(體化)시키지 못하면 그 국정철학과 비전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또 비서실 월례조회 때마다 “여인네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바치고,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며 좌고우면(左雇右眄)하지 말고 대통령을 보좌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재임기간 청와대 비서실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비서관들에게 확실하게 일해줄 것을 주문했고,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거의 모든 보고는 그를 거쳐야만 했다. 그는 동교동계의 청와대 진입에 비판적이었고, 이로 인해 동교동계와는 늘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지론은 ‘청와대는 국정운영과 관련된 곳이므로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YS정권 때 민주계가 나서면서 정권이 엉망이 됐다. 동교동계가 나서면 DJ정부도 어려워진다. 공보수석과 정무수석 정도는 동교동계가 해도 좋지만 남보다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면 다른 분야의 진출은 자제해야 한다.”

    김대표는 비서실장 취임 후 겨우 몇 달 사이에 ‘신주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당시 집권당인 국민회의의 김영배(金令培) 총재대행, 한화갑(韓和甲) 사무총장과 더불어 ‘3각 편대’로 불리며 정권의 신실세로 군림한 것. 반면 권노갑(權魯甲) 전최고위원으로 상징되는 ‘구주류’, 특히 당시 공보수석이었던 박지원(朴智元) 전문화관광부장관과는 여러 차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DJ는 그를 밀어줬다. DJ는 취임 초 고려대 강연에서 그를 ‘이 정권의 2인자’로 추켜세웠고, 다른 자리에서는 ‘국정의 2인자로 내가 신뢰하는 나의 오른팔’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시절 김대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쥐고, ‘동서화합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TK(대구-경북) 공략에 주력했다. 한화갑 최고위원과 함께 ‘DJP+TK’로 차기정권을 창출하겠다는 이른바 ‘동진(東進)정책’을 밀어붙인 것. 그러나 결과적으로 동진정책은 실패했다. 2000년 ‘4·13’총선에서 민주당은 영남권에서 단 한 석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 탓에 반대 세력이 그에게 퍼부은 비판에는 독기마저 서려 있다.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다 권력교체시기를 기회로 포착, 변신을 거듭해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까지는 백 번 양보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비서실장 재직시 ‘동진정책’ 등 수구 기득권 세력과 명분 없는 타협을 주장했고 ‘옷로비 축소은폐사건’ 때도 대통령을 잘못 보좌해 개혁을 좌초시킨 사람이다.”

    사실 그의 정치적 뿌리는 5,6공이며, TK이고, 보수세력이다. 1972년부터 판사로 일해 온 그는 1979년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는 모친을 모시고 고향 관할인 대구지법 영덕지원장으로 낙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1년여 동안 근무하면서 ‘보통 판사답지 않게’ 지역활동을 열심히 했고 이것이 11대 총선 경북 청송-영덕-울진 선거구에서 당선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신군부는 민정당을 창당하면서 전국적으로 면밀한 현지조사를 실시, 평판이 좋은 인사를 공천자로 결정했다. 이때 그가 눈에 띤 것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13대까지 내리 3선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92년 14대 총선 때 울진 원자력발전소 5,6호기 추가건설과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반발로 고배를 마셨다. 1996년 15대 총선 때는 무소속으로 나섰으나 다시 낙선했다.

    그는 5,6공 당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1988년에는 민정당 제1사무차장으로 여소야대 상황에서 강원 동해, 서울 영등포을, 대구 서갑 등 세 곳의 보궐선거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모두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당시 노대통령은 “당신은 3선이면서도 6선의원급”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3선이면서도 6선의원급”

    1990년 3당 통합 뒤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일할 때나, 노태우정권의 마지막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됐을 때 그에 대한 언론의 인물평은 좋은 편이었다. 그는 늘 ‘이론을 겸비한 합리주의자’ ‘언행이 신중한 사람’으로 통했다. 그럼에도 영원히 그를 따라다닐 ‘5, 6공 인사’라는 꼬리표는 그의 향후 정치 행보에 적지않은 부담으로 작용하리라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김대표는 1999년 11월 청와대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 이듬해 4·13 총선에 고향인 경북 봉화-울진선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영남 싹쓸이’ 벽을 넘지 못하고 16표 차이로 한나라당 김광원(金光元) 의원에게 패했다. 평민당→국민회의→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이른바 ‘DJ당’ 간판으로는 사상 최고의 득표율을 올렸지만 패배의 충격은 컸다. 14대 이후 내리 3연패로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게 아니냐”는 주위의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 자신도 훗날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낙선 후 그는 정치를 계속할 것인지를 놓고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변호사 시절 단국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경력도 있어서인지 몇몇 대학으로부터 총장직을 제의받기도 했다. 그는 변호사 복귀와 대학총장직, 정치 재개 등 세 갈래 갈림길에서 다시 정치를 선택했다.

    김대표는 민주당 ‘8·30’전당대회를 재기의 무대로 활용했다. 그는 ‘전국정당화’와 ‘영남역할론’을 내세우며 최고위원 경선 캠페인을 벌였고 예상을 뒤엎고 3등을 했다. 2위인 이인제(李仁濟) 최고위원과는 불과 93표(약 1%) 차이였다. 1위를 한 한화갑 최고위원과의 연대가 위력을 발휘했고 경선 막판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청년조직인 연청을 통해 표를 몰아줬다는 얘기도 들렸다.

    어쨌든 호남세력이 주축인 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에 단신으로 뛰어든 그는 비서실장 시절 동교동계의 포위망에 굴하지 않고 정권의 2인자로 나름의 역할을 했다. 또 총선에서의 낙마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원에 당선되는 등 만만치 않은 ‘정치적 생존력’을 보여줬다.

    이런 강인함과 승부사적 기질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환경의 도전에 응전하며 터득해 온 자산인 듯하다.

    그는 1939년 경북(당시는 강원) 울진에서 7남매(4남3녀)중 다섯째,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정부 배급품 판매업을 한 덕에 생계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맏형이 6·25전쟁 중 사망하면서 불행이 한꺼번에 닥쳤다. 부모는 이때의 충격으로 거의 폐인이 됐고, 살던 집은 불타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청상과부가 된 형수와 함께 미나리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아침에는 신문배달, 방과후에는 드럼통 휘발유장사로 아르바이트도 했다.

    중학교 졸업 후 서울의 한 명문고에 시험을 쳐 합격했으나 유학할 돈이 없어 고향에 있는 후포고에 들어갔다. 수석으로 합격해 등록금을 면제받았고, 고려대는 고학으로 마쳤다. 행정관료를 하다 기회가 오면 정치를 해보겠다는 생각에 행정고시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갑자기 행정고시가 폐지돼 사법시험으로 관심을 돌렸고 대학졸업 후 3년 뒤에 합격했다.

    최고위원 3등 당선에서 또다시 도약, 당대표에 ‘등극’한 김대표를 이제 대권주자 후보 반열에 올리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드물다. 민주당내 영남대표주자로서의 입지도 구축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차기대권에 대해 관심이 없다”며 속마음을 드러내길 꺼려한다. 지난 연말 당대표 취임 인사차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를 방문했을 때, 그리고 연초 세배차 YS를 면담했을 때도 비슷한 소리만 했고, “지금은 여당을 여당답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교과서적인 얘기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고위원 당선 후 그의 ‘강연정치’를 대권욕심과 연관지어 보는 이들이 많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20여 차례 특강을 했다. ‘동서화합과 남북화해’라는 메뉴를 들고 서울과 대구·경북은 물론 광주와 전남·북, 제주 등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선 후보경선에 뛰어든 후보자의 전국투어를 연상케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는 영남에서는 “여권 불모지에 집권당 최고위원으로서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열심히 홍보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고, 호남에서는 “국민화합의 다리로서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이제 영호남의 갈등은 없어져야 하고 다음 대선후보는 영호남의 고른 지지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주대연합론에 맞서는 ‘TK연합론’

    특히 지난해 10월13일 전주MBC방송 대담에 출연했을 때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영남출신 정치인이 호남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것은 김중권 최고위원이 처음”이라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광주MBC, 여수MBC의 특별토론회와 특별대담에도 출연하는 ‘영광’을 안았다. 물론 그 바탕에는 DJ에게 헌신해 온 그에 대한 호남인의 감사가 깔려 있는 게 사실이나, 이제 그가 호남에서 인기있는 정치인이 된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김대표의 대권행보에 가장 유리한 정치지형은 ‘DJP와 TK의 연합’이다. ‘당대표 김중권+경선1위 한화갑’이 포기치 않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바로 ‘TK연합론’이다. DJP공조만으로 정권재창출이 어렵기 때문에 ‘DJP+α’가 절실하고 α는 바로 TK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일단 ‘4년중임제 및 정·부통령제’ 개헌을 합창하며 러닝메이트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개헌이 물건너가면 대선공조를 모색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TK연합론’을 가시화하려면 먼저 이인제-권노갑 진영의 ‘민주대연합론’이라는 강력한 상대를 돌파해야 한다. 김대표는 사실 DJ가 YS와 손잡는 ‘민주대연합’ 구도에선 설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인제 최고위원이나 노무현 장관의 부상이 불 보듯 훤한데다 YS와의 개인적 관계도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YS에 대한 반감이 나름의 뿌리가 있다는 평이다. 정무수석 시절 그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YS 대세론’을 주입시킨 인물의 하나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YS는 96년 15대 총선 때 지구당위원장 자리를 박탈했다. 그는 공천 탈락과 선거 패배 후 일본에서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김대표는 대권후보로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편이다. 무엇보다 당내에 적극적 지지자들이 거의 없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張誠珉) 의원과 한겨레신문 기자출신으로 대표비서실장을 맡은 김성호 의원 정도가 측근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황태순(黃泰舜) 이형록(李炯錄) 이헌태(李憲泰)씨 등 소수의 비서진만이 그를 보좌하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김대표가 의원들을 따로 만나 귓속말을 건네며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대세’를 얻지 않는 한 세불리기는 난망(難望)해 보인다.

    그러나 워낙 ‘덕인(德人)’스타일이어서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 것이라는 게 측근들의 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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