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오전 10시50분. 영종도 국제공항에 도착한 이유진씨(62)의 귀국소감에는, 26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는 기쁨과 동시에 함께 오지 못한 이들에 대한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이씨는 1963년 서울대 문리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4월 파리로 유학을 떠나 소르본대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8월 한 차례 서울방문 이후 그는 26년을 기다렸다. 파리로 향할 때는 분명 한국인이었건만, 돌아올 때는 프랑스 여권으로 외국인 출입구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온 외국인이었다.
심리학자를 꿈꾸며 전도유망했던 청년의 일생을 바꾸어놓은 사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씨가 유학을 떠날 당시 유신의 살벌함에 숨죽이던 서울과 이틀간 비행 끝에 도착한 파리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비로소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났고, 독재정권이 가려놓은 두꺼운 안대를 던져버렸다.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자 그는 곧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투사로 변신했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한국대사관에 쫓아가서 항의를 했고,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앞장서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를 위해 1975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프랑스 시민 자격으로 고향 평양을 다녀왔다. 스스로 “남들은 잘 견디는 구속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는 천성적인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이유진씨. 하지만 그가 자랑삼는 “정(情) 빼면 시체요,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인간미” 때문에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 컸다. 한 차례의 평양 방문과 79년 대학후배 한영길 망명사건으로 그는 간첩 낙인이 찍혔다.
한영길은 이씨의 서울대 후배로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부관장으로 가족(아내, 딸)과 함께 파리에 살고 있었다. 부부싸움 끝에 가출했던 한씨의 아내가 센 강에서 주검으로 떠오르며 문제는 꼬이기 시작했다. 한씨의 아내는 프랑스 경찰에 의해 자살로 밝혀졌지만 중앙정보부로부터 신분의 위협을 받은 한씨는 이씨에게 정치망명을 부탁했다. 한씨의 딸은 프랑스인 가정에 보호를 부탁했다.
그러나 한씨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두 달 반 만에 망명을 자진철회하고 한국인으로 돌아갔다. 대신 이유진씨를 간첩과 아동인질범(딸)으로 몰아세웠다. 한국신문에 대서특필된 한영길씨 기자회견 내용은 “믿었던 대학선배가 알고 보니 북괴 공작원이었다. 그 공작원한테 딸을 인질로 잡히고 3개월간 여기저기 끌려다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조국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했고 한국의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겪어야 했다.
“물에 빠진 여인이 손을 잡아달라고 애걸하는데 남의 여자 손을 잡을 수 없다며 손을 뿌리치는 게 군자인가요, 손을 잡아 구해주는 게 군자인가요? 저는 궁지에 몰려 도와달라고 애걸하는 후배를 외면하지 못하고 도와줬을 뿐입니다.”
공소시효(15년)가 지났음에도 그의 귀국을 막은 것은 소명 절차였다. 정부는 줄곧 “소명을 강제하진 않지만 희망한다”는 입장을 전했지만, 그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반성문을 쓰느냐”며 딱 거절했다. 그리고 파리 묘지에서 쓸쓸히 묻힌 이응노 선생처럼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죽지나 않을까 염려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올 봄 지난 망명생활을 정리한 자서전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를 펴낸 것이 귀국 추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간 국내 언론을 통해 이유진씨의 삶이 조금씩 알려지긴 했지만, 자서전 출간을 기념해 민가협과 천주교-불교-기독교인권위 등이 공동으로 ‘이유진 선생 귀국추진을 위한 모임’을 구성하고 그의 귀국을 적극 도왔다.
6월13일 도착하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경기도 퇴계원의 선친 묘소. 망명 중에도 언젠가 다시 뵙게 될 날만 꼽던 아버님은 끝내 자식의 귀국을 기다리지 못하고 83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묘소에 소주를 부으며 이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품에 안기며 그는 외쳤다.
“어머니 이제 악몽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