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라크 전쟁터와 사스 광풍 속 중국을 누비며 중동·아시아 시장 개척에 열정을 쏟고 있는 최승갑 회장. 중소기업인들에게 들려주고픈 노하우가 적지 않다. 9세 ‘대박’ 아이스케키 장수, 특전사 중사, 20대 억만장자, 사업 실패로 인한 자살 기도 등 남다른 삶을 살아온 그의 ‘21세기형 무역 역군’을 향한 꿈과 도전.
그 덕분일까, 자동차와 가전제품 주문이 급증한 한편, 지난 5월에는 중동·아프리카 지역 12개국의 바이어 129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중동수출상담회’까지 열려 그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이런 분위기를 일찌감치 간파해 지난해부터 중동 시장 개척에 뛰어들어 결실을 눈앞에 둔 사업가가 있다. (주)GIG코퍼레이션(Global Industrial Group Corporation) 최승갑(46) 회장이다.
최회장은 얼굴·지문 등을 이용한 생체인증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몇몇 업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주)GIG코퍼레이션 IT연구소가 기술노하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중동 시장 개척에 나섰다. 요르단 주요 은행과 정보기관 최고위 관계자를 상대로 한 보안솔루션 수출계약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공공시설을 대상으로 한 얼굴인식시스템 판매협상은 90%가 끝났습니다. 대형빌딩과 사무실, 고급주택에 설치하는 지문 도어록 시스템의 수출 가능성도 매우 큰 편입니다. 1차 수출물량은 대략 2억~3억달러어치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올리기 위해 최회장은 죽음도 불사하고 중동 지역을 넘나들었다. 요르단 정부측 인사로부터 접촉 제의를 받은 것은 한창 전운이 감돌던 올 3월초.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터키를 거쳐 요르단으로 들어갔다.
“당시는 국내를 비롯해 세계 각국 해외상사 직원, 공관원들이 모두 중동 지역에서 철수를 할 무렵이었습니다. 미국이 대규모 포탄을 퍼붓고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 분위기가 몹시 흉흉했지요.”
그럼에도 전쟁터를 향해 날아간 최회장의 목적은 분명했다. 남들이 꺼릴 때 한 발 앞서 기회를 잡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사업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는 것입니다. 아랍지역 사람들은 신뢰를 특히 중시합니다. 어려울 때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신뢰구축에 무엇보다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요르단에 머물던 최회장은 3월20일 전쟁이 발발하자 출입허가증도 없이 요르단 거주 후배를 앞세워 이라크로 들어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합니다. 향후 전쟁특수가 일 것이 분명한 만큼 이라크 현장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바그다드 근처까지 들어간 그가 목격한 것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전쟁 시작과 동시에 미군이 펼친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중요 건물과 시설은 참담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융단폭격을 받아 불길이 치솟는 바그다드 시내를 뚫고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시민들 행렬은 끝이 없었다. 최회장은 피란민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굶주림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라크로 들어갈 때 최회장은 중동 출장에 동행했던 직원 한 명을 요르단에 홀로 남겨두었다. “내가 죽는 거야 상관없지만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최회장은 “이미 한 번 죽어봤기 때문에 나는 무서울 게 없다”고 했다. 그가 ‘죽음’을 경험한 것은 서른한 살 때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이 ‘장사꾼’이었던 최회장은 경기도 이천북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 군에 입대했다. 특전사 공수부대 중사로 제대한 뒤 중단한 학업 대신 사업을 선택했다. 제대 후 곧바로 서울에 정착한 것이 1981년,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였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사관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군 생활 동안 사병보다 월급이 많았는데, 그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았습니다. 그랬더니 제대할 무렵에 1000만원 정도가 되더군요.”
군에서 구상한 사업은 출판유통 쪽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대박’을 터뜨릴 아이템을 발견했다.
“어느 날 명동 미도파백화점을 둘러보는데 한 매장에서 희한하게 생긴 물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전거업체에서 일본 제품을 본 따 만들어내놓은 시제품이었는데, 보는 순간 ‘바로 저거다!’ 하는 감이 왔습니다.”
시제품이라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점원을 어렵게 설득해 물건을 손에 넣은 그는 역삼동에 보증금 100만원, 월세 15만원에 허름한 지하창고를 세내어 (주)백산을 세웠다.
“당시 역삼동은 허허벌판으로 땅값이나 집값이 서울 시내에서 제일 싼 곳이었습니다. 백산이라는 회사명은 북한 신의주 태생인 아버지의 고향마을에서 따왔습니다.”
사업장을 마련한 직후 고향인 대구로 달려간 최회장은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던 철공소로 찾아가 입수한 물건 샘플을 내놓고 그대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첫 제품이 바로 1980년대 선풍적 인기를 불러일으킨 ‘스카이콩콩’이다. 긴 쇠봉에 손잡이와 스프링이 달린 점핑 놀이기구 스카이콩콩은 신기한 생김새와 재미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사업을 시작하고 7~8개월 동안 대략 500만개를 팔았습니다. 750원 원가에 도매가가 1800원 정도였는데 그때 벌어들인 돈이 약 5억원이었습니다. 새벽 6시면 타이탄 트럭 수십 대가 회사 마당에서 물건을 싣고 전국으로 출발했습니다. 돌아올 때는 수금한 돈을 싣고 왔지요. 다음날 은행에 돈을 넣기 전에 금고를 열고 돈을 만지면서 이게 정말 내가 번 돈인가 실감이 안 났습니다. 일이 재미있어서 푹 빠졌기 때문에 돈보다 성공에 대한 기쁨이 더 컸습니다.”
첫 사업에서 채 일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엄청난 부와 성공을 거둔 최회장은 말 그대로 ‘인생역전’과 ‘대박’의 기쁨을 맛보았다. 유사제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전국적으로 200개 가까이 생겨나자 최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1980년대 초반, 조만간 영어 조기교육 붐이 일 것이라 예측한 그가 손댄 사업은 초등학생 대상 영어회화 교재 제작이었다. 이 역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88올림픽과 나라의 ‘배신’
잇따른 성공으로 기반을 탄탄히 다진 최회장은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몽땅 쏟아부어 야심찬 새 출발을 했다. 1986년 (주)진성JC를 설립해 88서울올림픽 휘장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그 무엇보다 유망할 듯했던 이 사업은 그러나 그를 철저한 몰락으로 이끌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교민회가 뭉쳐 서울올림픽교민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회장은 브라질 교민회장이 맡았습니다. 우리 회사는 후원회와 계약을 맺고 올림픽조직위원회가 보증을 선 가운데 올림픽에 사용될 등(燈)을 납품했습니다. 성화가 봉송되는 제주부터 서울 메인 스타디움까지 전국 곳곳에 태극 문양이 새겨진 등이 걸렸어요. 저희 회사에서납품한 것이었죠. 그런데 계약금만 받은 상태에서 나머지 대금이 결제되지 않았습니다. 교민후원회와 올림픽조직위원회 양쪽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상태에서 등 제작 협력업체 사장들과 보름 동안 올림픽조직위원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당시 이 사업에 최회장이 투자한 자본금은 15억원. 그 때 발행한 1억5000만원 상당의 가계수표 결제를 하지 못해 결국 회사는 도산을 하고 말았다.
“88올림픽은 흑자를 보지 않았습니까. 국가적 행사에 동참했고 올림픽조직위원회가 보증을 섰으니 당연히 조직위원회측에서라도 나머지 대금을 지불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게 물거품이 된 겁니다. 그때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최근 몇몇 신문에 최회장의 눈길을 잡아매는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월드컵이 끝난 후 어려움에 빠진 관련 기념품 제작업체들이 ‘월드컵 상품 중소기업인 피해대책협의회’를 결성하고 시위하는 모습이었다. ‘월드컵은 4강, 중소기업은 사망’이라는 플래카드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이 불거지면 책임지는 공무원이 없네요.”
자신을 자살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던 정부의 무책임한 행태가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올림픽 열기가 서서히 가시는 동안 수중에 남은 돈을 몽땅 끌어모아 ‘빚잔치’를 끝낸 최회장은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차를 몰아 경북 울진으로 향했다. 국가에 대한 배신감과 무력감, 비애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목을 죄어왔다.
“평소 주량이 소주 대여섯 병이었는데 그 날 바닷가에서 스무 병을 마셨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예비군훈련통지서를 지갑과 함께 모래사장에 파묻었어요. 그리고 차에 탄 채 깜깜한 밤바다를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지요. 한순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지만 이미 늦었지요.”
자살 기도, 그리고 재기
바닷가 해안초소에서 경비를 서던 군인에 의해 구출된 그가 깨어난 것은 3일 후 인근 군 의무대 병실에서였다.
“눈을 뜨는 순간 허탈감이 몰려오는데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차라리 죽지 왜 살아났나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바다에 빠질 때는 살고 싶다가 막상 살아나니까 또 죽고 싶고,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합디다.”
울진에 사는 선배가 마련해준 하숙방에 틀어박혀 룸펜처럼 세월을 보냈다. 십수억원을 주무르다 하루아침에 무일푼의 처지로 추락한 삶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어설 기운도, 기댈 곳도 없이 매일 바닷가에 나가 술로 마음을 달래며 일년을 보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그렇게 한 일년 허송세월 하고 나니까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눈을 돌린 것은 물건을 생산해도 마땅한 판로가 없어 애를 먹는 중소기업이었다. 수많은 중소기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협상을 벌였다. 공장에 쌓인 물건들을 팔아주는 대신 마진을 최대한 챙기는 쪽으로.
“차 한 대 장만할 돈이 없어 청소기, 전기밥솥, 다리미 같은 가전제품을 지게에 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번에 열 개 정도 질 수 있었는데 무거운 줄 모르고 뛰었습니다.”
거리행상으로 떠돌던 어느 날, 청주에서 옛 부하직원을 만났다. 그는 회사가 망한 뒤 미련을 접고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동안 복받친 설움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 최회장은 옛 직원을 부둥켜 안고 끝도 없는 울음을 쏟아냈다고 한다.
난생 처음 지게를 지는 고생 끝에 승합차 한 대를 마련했다. 이후 1990년대 초 GE 등에서 생산한 백색가전이 국내에 수입되면서 (주)그린월드를 설립하고 지방판매 대행에 나섰다. 말이 주식회사지 처음엔 사무실 한 칸에 전화로 주문을 받는 여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혹독한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최회장은 현재 (주)GIG코퍼레이션 외에 건물종합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NKTS(New Korea Total Service), 경호서비스를 제공하는 NKSS(New Korea Security Services) 등 세 개의 업체를 이끌고 있다.
“건물종합관리 서비스 분야는 성장 잠재력이 상당히 큽니다. 초기 투자금은 많지 않으면서 안정된 수익을 낼 수 있지요. 예전처럼 한 곳에 전부 투자해 한꺼번에 잃는 실패를 겪지 않으려 안전망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른 최회장은 “배운 것도 짧고, 이렇다 할 학벌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장사꾼 기질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말한 장사꾼 기질이 ‘싹’을 보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홉 살 장사꾼의 집념
최회장은 1958년 대구시청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의 한 달 월급은 쌀 반 가마 값 정도였습니다. 어머니 월급까지 합쳐도 위로 세 형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집안 형편은 늘 쪼들렸습니다. 아침에 밥 한 그릇을 받으면 아침과 점심 두 끼로 나눠 먹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신암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 집 근처 칠성시장을 헤매던 그는 자장면 냄새에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어릴 땐 졸업식이나 특별한 날 아니면 꿈도 못 꿀 고급음식이 자장면이었습니다. 3원인가 4원을 했는데 주머니에 돈은 없고,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부모님껜 말도 못 꺼낼 형편이었고, 내가 벌어 사먹자 하고 아이스케키 장사에 나섰습니다.”
그와 함께 공장에서 아이스케키를 받아 파는 10대 아이들이 60명이나 됐다. 보통은 두세 명씩 어울려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최회장은 수익이 쪼개지는 것이 싫어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혼자 메고 뛰었다.
최회장이 중동 지역에 수출을 추진 중인 생체인증 제품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뛰어난(?) 전략 덕분에 한 박스에 200~300개 가량 들어가는 아이스케키를 그는 하루 10통씩 팔아치웠다. 남들은 하루 두세 통 파는 게 고작이었다. 아홉 살 나이에 그가 한 달 동안 번 돈은 1만5000원 안팎. 당시 공무원이던 아버지 월급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어느날은 아이스케키 때문에 중요한 서류를 망쳤다고 직원에게 끌려가 매질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머리와 뺨으로 정신 없이 주먹이 날아오는데 얼굴이 얼얼했습니다. 그래도 태권도 도장에 다니면서 맞는 덴 이골이 나 있어 괜찮았어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서러운 생각도 없었어요.”
다만 매를 맞느라 지체된 시간 때문에 하루 목표량을 채우지 못할까봐 조바심 냈던 기억만 남아 있다고 했다.
해외 네트워크·역발상·틈새 공략
그는 학창시절 내내 아이스케키 장사, 신문배달, 우유배달로 돈을 벌었다. 체력과 함께 타고난 것이 부지런함이다. 요즘도 새벽 6시 반이면 집을 나서 한 시간 동안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한 뒤 걸어서 회사에 출근한다.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면서 어학능력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2~3개월 전부터 영어회화 공부도 하고 있다.
“지금 세계 무역시장은 총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신무장이 안되어 있는 기업은 살아남기 힘듭니다.”
회사 구성원을 통틀어 가장 부지런한 최회장에게 직원들이 붙여준 별명은 ‘독종’이다. 사업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내던지는 통에 직원들은 혀를 내두른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인 이라크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중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사스(SARS) 특수’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초 사스가 창궐할 당시 중국을 다녀온 최회장은 체온계와 사스 방지 마스크를 수출해 20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실적은 미미하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중국 바이어들의 신뢰와 기업 이미지 향상이라는 큰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기업의 직원들이 한창 철수할 때 들어갔으니 바이어들이 고마워할 수밖에요.”
최회장은 (주)GIG코퍼레이션을 중동·아시아 지역의 특화된 컨설팅업체이자 무역전문회사로 키우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해당 지역을 돌며 시장 분석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동지역 개척은 아랍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때문에 그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해 현지 바이어들을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최회장의 충고다. 이에 바탕한 최회장의 사업전략은 광범한 해외 인적자원 활용, 신뢰구축, 틈새시장 공략, 역(逆) 발상 시장개척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 해외 7개국에 8명의 후배가 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태권도로 인연을 맺어 절친한 사이인데 이들 대다수가 중동지역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있어요. 중동에서 태권도 사범은 민간외교관과 마찬가지입니다. 후배들이 각 나라 왕자나 국가 고급공무원 등 최고위층 사람들을 제자로 둔 경우가 많은데, 아랍사람들은 스승에 대한 예우가 깍듯합니다. 중동시장 개척 때 후배들이 발벗고 나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왜 요르단이 중요한가
이라크 전후 복구사업을 발판으로 많은 한국 기업들이 MENA(Middle East and North Africa) 지역으로 불리는 중동과 아랍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중동의 경우 국가별로 분리해서 따지면 시장 규모가 크지 않지만, 전체 아랍시장을 하나로 보면 세계 어느 지역보다 무궁무진한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최회장의 분석이다.
한편 최근 중동국가들은 유럽연합(EU)을 모델로 역내 자유무역지대화 등 경제공동화에 나서고 있다. 점진적으로 관세단일화, 단일통화 추진, 공동전력망 구축 등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지역은 한눈에 이해하기 힘든 시장입니다. 우선 국제유가의 등락에 경제가 크게 좌우되며, 현장실무 정보가 별로 공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국 오피니언 리더들과의 안면과 인맥이 중요하며, 지하경제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또 고가품과 저가품의 구매층이 양극화된 시장이기도 합니다. 사업분야에서 볼 때 국영부문은 대량발주, 민간부문은 소량다품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회·경제·문화 전반을 모르고 중동에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코트라(KOTRA)가 집계한 중동지역 2003 회계연도 GDP 성장예측률은 5.1%다. 2002년의 3.9%, 2001년의 4%와 비교할 때 꾸준한 성장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향후 소비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개발, 수요가 필요함을 뜻한다.
“국내 기업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중동지역의 각 산업분야에는 이미 미국을 비롯한 유럽 기업들이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서방 기업들은 중장기 마케팅 전략을 세워 현지 기업과의 제휴, 파트너십 구축, 현지 에이전트와의 신뢰 형성 등에 발빠르게 나서고 있습니다. 석유화학, 건설, 플랜트 등 대규모 기간산업은 이미 이들이 시장을 선점한 상태고, 생활용품 등 소비재는 저가의 중국상품이 밀려와 기대할 만한 시장이 못 됩니다.”
그에 따르면 요르단 시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산 제품이 대량유입되면서 중저가시장에서 치열한 가격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를 염두에 둔 생필품과 가전시장의 경우 중국, 일본 업체가 일찌감치 뛰어든 상태고, 국내 업체는 대기업들이 건설, 플랜트 등 대규모 기간산업 분야에서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정도다. 따라서 중소기업이 뚫고 들어갈 여지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국내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중소기업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중동지역의 전쟁특수를 놓치지 않으려면 발빠른 틈새 공략을 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살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최첨단 IT기술 분야는 도전해볼 만합니다. 우리 회사가 집중 공략한 요르단은 인구가 500만에 불과한 데다 비산유국으로 외채와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단점을 지닌 나라입니다. 하지만 지리적·외교적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등 중동시장 진출의 전진기지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중동지역 무역과 교통의 허브로서 중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르단 시장을 뚫는다면 중동의 다른 나라에도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다.”
“달러 벌어들이는 것이 나의 애국”
올해 이미 50여 일을 해외출장으로 보낸 최회장은 전쟁터와 전염병 창궐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자신의 행보에 대해 “위험을 즐기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공수부대 시절 경험한 군 생활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는 것이다.
“특전사 공수부대는 훈련과 군기가 센 곳으로 유명합니다. 첫 낙하훈련 때는 1200피트 상공에서 엉덩이를 걷어차여 엉겁결에 비행기에서 뛰어내렸어요. 잘못하면 죽는다는 엄포를 워낙 많이 들어서 땅에 발이 닫는 순간 ‘아, 살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훈련도 지독했지만 구타를 견디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매일 밤 12시면 연병장에 팬티바람으로 집합해 매타작을 당해야 했으니까요.”
어쩌다 연병장으로 끌려나가지 않은 밤은 정말 행복했다는 최회장. 그는 공교롭게도 1979년 10·26사태가 터질 당시 청와대 경비실로 차출돼 외곽 경비를 맡고 있었다.
“사건 직전까지 이상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박대통령이 저격당한 날, 밤늦게 경비초소 숙소에 머물다 상관한테 연락을 받고 알았습니다. 처음엔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전혀 실감이 안 났습니다. 사건 전말은 며칠 뒤에야 들었어요.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구나 싶었지요. 그 뒤 일주일 동안 비상대기에 들어가 무척 고생했습니다.”
지난날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리라 결심했던 최회장은 첫 사업 이후 지금까지 23년간 역삼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허허벌판이던 곳이 빌딩 숲으로 변했고,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젊은 날 쏟은 땀과 눈물, 희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바로 ‘그곳’에서 다시 성공하리라던 자신과의 약속을 그는 지켰다. 그런 최회장의 꿈은 여전히 ‘장사꾼’이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국내가 아닌 해외, 중동·아시아 지역을 향하고 있다는 것뿐.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제품을 내다 팔 해외판로를 개척해 원 없이 달러를 벌어들이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를 1960~70년대 수출산업 일선에서 뛴 무역종합상사처럼 키우고 싶어요. 장사꾼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게 물건 많이 팔아 달러 벌어들이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또 하나의 꿈은 유한양행 고 유일한 회장처럼 땀 흘려 번 돈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월급을 집에 반밖에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밀가루를 사 당시 즐비하던 판자촌 사람들에게 나눠주셨어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초등학생인 저를 꼭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때 본 아버지의 모습과 동네 광경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