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씩씩한 시골 소녀가 세계에 정보통신기술을 전파하는 국제기구의 리더가 됐다.
- 서투른 영어로 콧대 높은 미국 대학생을 사로잡고, 성실한 땀으로 세계인을 내 편으로 만든 ‘도전 전문가’의 파란만장한 대장정.
이 원장은 세계적인 ICT(정보통신기술) 전문가다. 미국 명문 조지아공대 교수(경영정보학)를 거쳐 유엔 아프리카 정보통신교육원 탄생의 산파 구실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유엔사무국 소속 기구인 apcict 초대원장으로 2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APCICT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62개국 간의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2006년 만들어졌다. 정부와 인천시가 출연한 기구로,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해 각국 공무원들에게 정보통신 교육을 실시한다. APCICT는 정보통신기술 강국인 한국의 이미지를 전세계에 전파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칼바람이 불던 12월10일 이현숙 원장을 인천 송도신도시 유엔 APCICT 사무실에서 만났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이 따뜻하다. 그는 땅콩과 콩을 갈아 직접 만든 두유를 권했다. 꾸밈없이 담백한 그 맛이 추위를 금세 누그러뜨렸다.
기자가 이 원장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단 APCICT의 성과 때문만은 아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을 오가며 도전을 거듭한 그의 인생스토리가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성공을 위한 계산이나 꼼수를 싫어한다. APCICT를 4년 넘게 이끌었건만, 그를 인터뷰한 기사를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 언론에 나오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채근에 그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 그가 5시간 동안 들려준 삶의 여정에는 통쾌한 역전과 뜨거운 감동이 있다. 화려한 장면 전환은 기본. 내용은 드라마틱했다. 아쉽다면 지나치게 모범적이라는 점일까.
“바르고 씩씩하게”
이현숙 원장은 1960년생이다. 경북 경산에서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서점을 경영하던 부친 덕분에 집안 형편은 어렵지 않았다. 집 대청마루에 걸린 ‘바르고 씩씩하게 살자’는 가훈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보수적인 경상도에서 자랐지만, 그는 한 번도 여자라고 움츠러든 적이 없었다. 그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아버지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TV를 구입한 곳이 저희 집이었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TV 대담 프로그램을 보다가 저를 부르시더니 ‘저 여성이 몇 개 국어를 하네. 너도 더 큰 세상에 나가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언젠가는 ‘앞으로 화상 통화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는 얘기를 들려주셨죠. 1970년대에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신기했어요. 앞을 내다보는 분이셨죠.”
학창시절에는 반장을 도맡았다. 웅변대회, 영어 말하기대회, 과학 경진대회까지 모든 대회에 대표로 출전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효성여고 1학년 때는 요리 실습대회까지 나갔다. 당시 그는 요리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생초짜’였다.
“요리 대회에서 이론과 실기를 모두 봤는데, 이론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뒀죠. 문제는 5첩 반상을 만드는 과제였어요. 여상 3학년 언니들이 어찌나 노련하게 상을 차리던지. 저는 행주를 깔끔하게 빨아 널어두는 등 단정한 일 매무새로 심사위원의 점수를 땄어요. ‘어떤 일을 하던 디테일하게 최선을 다하자’가 제 모토예요.”
첫 시련은 열아홉 살에 찾아왔다. 그가 전기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사업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1979년 후기로 영남대에 입학했다. 인문사회계열로 들어가 심리학을 전공했다. 낭만과 자유가 없던 엄혹한 시절, 그가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도서관이었다.
▼ 대학 때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으셨나요?
“운동에 나서지 않았지만, 웅변을 한 경력 덕분에 학생대표로 반정부 선언문을 읽은 적은 있어요. 당시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버지가 제게 품었던 희망을 실현하는 일이었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가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셨거든요. 아버지가 기대하신 대학을 가지 못해 더욱더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고 싶었어요.”
▼ 부친이 돌아가신 후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어머니가 훨씬 엄격하게 변하셨어요. 밤 9시가 통금시간이었죠.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싶어도 집에 돌아가야 했어요. 그때는 남자 손을 잡으면 바로 시집가야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의 대학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남편 조삼광(55) 박사다. 그는 유엔ECA(유엔아프리카경제위원회) 에서 아프리카 대륙 민간 부문 개발을 책임지고 있다. 두 사람은 현재 부부가 유엔 산하 기구 고위간부라는 보기 드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영남대 경제학과 77학번인 조 국장은 이 원장보다 네 살이 많다. 그를 이 원장은 ‘형’이라고 불렀다. 늘 공기처럼 옆에 머물던 남자는 무공해 여대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편이 제게 부쩍 잘해주기 시작했어요. 3학년 2학기 때 남편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차 마시자’고 청해, 처음으로 캠퍼스 밖을 벗어나 1대 1로 데이트를 했죠. 남편이 저 때문에 공부를 했대요. 저를 만나려면 도서관에 와야 했으니까요.(웃음)”
1985년 결혼한 두 사람은 곧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OSU)에 먼저 자리를 잡고, 석사 과정을 마친 이 원장이 몇 개월 후 합류했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박사 과정까지 같은 대학에서 밟았다.
‘조건부 입학생’의 도전
파란만장한 모험은 이 원장이 전공을 바꾸면서 시작됐다.
“1986년 미국에 갔더니 컴퓨터가 일반화되진 않았지만, 다양한 업무에 사용되더라고요. ‘아! 세상이 컴퓨터를 통해 바뀌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osu에 경영정보학과라는 새로운 학과가 개설된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심리학과 컴퓨터공학이 연결된 학문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경영정보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거죠. 제가 오하이오주립대 1호 정보경영학 박사예요.”
물론 백그라운드 없이 박사과정에서 새로운 전공을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 입학 허가부터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터키인 주임 교수를 찾아가 “박사과정을 이수하면서 관계되는 경영학과 컴퓨터공학 학부 과정도 동시에 듣겠다”고 간청했다. “영어는 잘 못해도 수학은 잘한다”며 억지도 부렸다.
“제가 워낙 용감하고 씩씩해요.(웃음) 제 가능성을 보셨는지, 교수님이 ‘일단 GMAT 시험을 쳐보라’고 하시더군요. 열심히 GMAT를 공부했지만, 겨우 커트라인을 넘겼어요. 결국 1년 뒤 다시 테스트를 받기로 하고 ‘조건부 입학’이 결정됐어요.”
불안정한 입지는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경영학과 회계학, 컴퓨터공학 학부 수업을 들으며 기초부터 다지기 시작했다. 맥주 500cc 잔에 커피를 한가득 담아 마시며 밤새워 공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조건부 입학’이라 학비를 지원받을 수도 없는 상황. 돈을 아끼기 위해 늘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다.
“경상도 남자인 남편이 결혼 초기에는 집안일을 거의 도와주지 않았어요. 살림은 여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웃음) 영어를 잘 못하니 매일 밤 수업 내용 녹음을 다시 듣고, 다음날 예습을 하느라 바빴어요. 그러다보니 조금씩 실력이 늘더군요.”
인종 차별은 그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박사과정 학생들이 함께 사용하는 연구실에서 그는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펜을 잃어버린 한 백인여성이 그를 도둑으로 몰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외국에 나가면 가슴에 태극기를 달지 않습니까? 저는 그 사건을 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어요. 억울했죠. ‘모욕 준 것을 사과하라’고 그 친구에게 요구했어요.”
이 원장의 특별한 자질 중 하나는 ‘돌격 앞으로’ 하는 기질이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주저하는 법이 없다. ‘안 되면 어떡하나’ 조바심 내지도 않는다. ‘조건부 입학생’의 신분으로, 그것도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수업조교(TA)가 되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사건이 단적인 예다.
“아버지의 유산을 차마 쓸 수가 없었어요. 학부생을 가르치는 수업조교가 되면 학비와 약간의 생활비를 벌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강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과장님을 찾아갔죠. 처음엔 학과장님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어요. ‘지금 네 말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데, 학부 기초 수업을 듣는 네가 어떻게 강의를 하겠느냐’는 반응이었죠. 저는 ‘1학기만 맡겨달라. 1명이라도 불평이 나오면 그만두겠다’고 과감하게 ‘배수의 진’을 쳤어요. 기꺼이 도전하겠다는 저의 의지를 인정해 학과장님이 기회를 줬어요.”
“이 교수는 미국의 자산”
그는 경영학 전공 학생의 필수과목인 재무회계를 가르쳤다. 각각 30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27개 클래스 중 3개 반을 맡았다. ‘나는 한국의 대표선수’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대망의 첫 수업. 정말 잘 가르치고 싶었다. 그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온 수 리(Sue Rhee)입니다. 영어를 잘 못합니다. 혹시 제 말을 못 알아듣겠으면, 알려주세요.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면 칠판에 쓰겠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미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운 상황.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일치시켰다. 두 번째 수업부터는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한 명씩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의 애정 어린 관심에 학생들은 놀라워했다. “교수와 학생은 단순히 지식을 주고받는(knowledge transfer) 관계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respect) 사이”라는 그의 얘기에 이들은 공감을 표현했다.
‘자신을 던지는’ 유머는 학생들을 무장해제하는 또 다른 장기. 그는 딱딱하고 어려운 과목인 회계를 누구보다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애썼다. ‘버라이어티한’ 영어 실수담은 유머의 단골 소재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가 r과 l을 그리고 b와 v를 잘 구분해 발음하지 못했어요. 하루는 고무 밴드가 필요해 비서에게 ‘Do you have rubber?’라고 물었는데, 비서가 ‘Yes. But I didn‘t bring him today’라고 답하는 거예요. 비서가 ‘rubber’라는 제 발음을 ‘lover’라고 들은 거죠. 이 얘길 들려줬더니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그런데 한 남학생이 수업 끝난 후 찾아와 제게 말하는 거예요. ‘Do you have rubber?’라는 표현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제가 그 이유를 묻자 학생이 빨개진 얼굴로 답했어요. ‘교수님, rubber는 콘돔을 의미한다고요!’”
그는 대학 수업에 ‘한국형 스파르타식 과외’도 접목했다. 시험을 치르기 전 보충반을 만들어 주말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험을 대비하는 새 노트도 만들어 나눠주었다. 학생들은 기쁜 마음으로 이 강행군에 동참했다.
결과는 놀라왔다. 시험 결과, 그가 지도한 세 클래스가 전체 27개 반 중 1,2,3위를 휩쓸었다. 두말없이 그에게 계속 강의가 맡겨졌다. ‘조건부 입학생’이라는 딱지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열정적인 수업 덕분에, 그는 뛰어난 수업조교에게 주는 ‘최우수 TA상’을 한 번도 빠짐없이 거머쥐었다.
이현숙 원장은 “정보통신기술이 개발도상국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당시 학생들의 강의 평가 코멘트를 모은 책자를 가보(家寶)처럼 간직하고 있다. “이 책자를 오랜만에 꺼내봤다”는 그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학생들이 정성스럽게 손으로 써내려간 글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재무회계는 참 어려운 과목이라 지난 학기 F를 맞았다. 하지만 이 교수님을 만나 내가 A 스튜던트가 됐다.’
‘이 교수님은 누구보다 재미있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다.’
‘이 교수님은 오하이오주립대는 물론 미국의 소중한 자산이다.’
조지아공대 교수가 되다
1991년 오하이오주립대는 ‘총장상’의 첫 주인공으로 이 원장을 선정했다. ‘총장상’은 가장 큰 공헌을 한 학생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상이다.
시상식은 깜짝쇼였다. 풋볼 오프닝이 열리던 날, 그는 학교로부터 “오하이오주 상·하원의원이 함께하는 런천 행사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때마침 한국에서 온 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그 자리에 갔다. 별생각 없이 행사를 지켜보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대학 총장의 멘트였다.
“여기 지구 저편 한국에서 온 한 놀라운 여학생이 있습니다. 영어는 서툴고, 중간에 전공도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학부생이 그녀를 ‘최고의 스승’으로 꼽았습니다. 그녀의 공헌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오하이오주립대가 최초로 제정한 총장상을 드립니다.”
예상치 못한 수상에 그와 가족은 더 큰 기쁨을 맛봤다. 생애 최초로 사이드카 호위를 받으며 축구장에 들어가는 호사도 누렸다.
“그 순간 어머니가 옆에 계신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제가 한 유일한 효도였으니까요. 아버지 산소에도 이 상을 들고 찾아갔어요.”
미국 잡 마켓(job market)이 불황이던 1993년, 그는 미국 명문 조지아공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외에도 다른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오하이오주립대가 보증한 인재’라는 든든한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제가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던 건 다 학생들 덕분이에요. 저와 인연이 된 학생을 힘껏 가르쳤고 또 제 학생들이 그 마음을 알았던 거죠. 어려운 시기에 취업이 되는 걸 보면서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됐죠. 어떤 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더라고요.”
그의 도전은 교수가 되는 데 멈추지 않았다. 1997년 그는 유엔 아프리카 본부의 인트라넷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았다. 인생의 행로를 수정한 데는 남편의 영향이 크다. 경제학 박사인 남편이 1996년부터 유엔ECA에서 근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발 이슈에 관심이 많았던 조삼광 박사는 한국의 유엔 가입 후 실시한 첫 공채시험을 통해서 유엔에 들어갔고, 아프리카 근무를 자원했다.
유엔 apcict가 여러 나라 말로 제작한 교재 ‘정부 리더를 위한 정보통신기술 아카데미.’
진입은 쉬웠지만, 뿌리내리긴 어려웠다. ‘웬 아시아 여자가 특채로 들어와 큰 프로젝트를 담당하느냐’는 싸늘한 시선이 쏟아졌다. 유엔은 아프리카에서 유력 인사 자녀들이 근무하는 최고의 엘리트 직장이었다. 해외 명문대 출신인 이들은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를 TV 채널 돌리듯 구사하며 그를 ‘왕따’시켰다. 직원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인트라넷을 구축하려면, 먼저 각 디비전(division) 간에 의사소통 흐름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처음 6개월은 아침, 저녁으로 계속 티 브레이크(tea break)를 가지며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매달렸죠. 주말도 없이 일했고요. 그러자 사람들도 제가 단순히 남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프리카에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정보통신기술이 빵을 주는가
이 원장의 승부처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유엔ECA에서 전 직원을 상대로 한 발표를 진행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 그는 인트라넷이 직원들의 ‘워크 라이프(work life)’를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지 재미있는 스토리를 곁들여 직원들에게 보여줬다. 여행 승인을 받고자 남자 직원이 여러 차례 서류를 작성해 여자 보스에게 쩔쩔 매며 내미는 장면은 폭소를 자아냈다. 이후 이 원장을 돕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급선회했다.
“사람들이 ‘인프라넷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인력이 대거 투입됐어요. 6개월 동안 전혀 진척시킬 수 없던 일을 3개월 만에 끝냈죠.”
모두가 이 원장을 배척할 때, 그의 든든한 지지자가 돼준 이도 있다. 암살당한 가나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탄자니아 대통령의 수양딸로 큰 르에마모씨가 주인공.
“르에마모 아주머니는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요. 그분은 가나에서 한국인 의료봉사단의 활약을 아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당신도 그들과 비슷할 것’이라며 저를 응원해주셨죠.”
아모아코 사무총장 역시 공식 회의석상에서 한국의 저력을 거론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IMF 외환위기 당시 한국인의 ‘금 모으기 운동’ 소식을 전하며, “한국은 정부도 잘하지만 국민도 정말 훌륭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오랜 세월 여러 대륙에서 살며 한국 위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어요. 1980년대만 해도 제가 도둑으로 몰렸는데, 1990년대 아프리카에서 한국은 ‘배울 점이 많은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은 더 대단한 나라예요.”
1년 계약이 끝났지만, 유엔ECA에서 그를 붙잡았다. 아모아코 사무총장이 “아프리카에 정보통신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해온 것이다.
“처음 에티오피아 공항에 내려 유엔▼ ECA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목격한 수많은 빈민의 모습이 계속 가슴에 남았어요. ‘과연 정보통신기술이 저들에게 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죠. 하지만 일을 할수록 정보통신기술이 국가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조지아공대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센터 설립에 매달렸죠.”
그는 1999년 유엔 아프리카 정보통신교육원(유엔ECA ITCA)을 설립해 이 지역 53개국 공무원에게 정보통신 교육을 시켰다. IT기술이 농업과 국민 건강 증진등 여러 분야에 어떻게 활용되는지 이들에게 보여줬다. ‘에이즈’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키오스크를 만든 것도 기억에 남는 사업 중 하나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문맹률이 높아 ‘에이즈’가 어떤 병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들이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키오스크 버튼을 누르면 에이즈 예방법에 관한 영상이 나오게 만들었어요. 에이즈에 대해 잘못 알려진 상식도 바로잡았고요. 키오스크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하는 수단이었어요.”
20개국의 지지 발언
2001년 그는 텍사스주립대 교수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에게 또다시 새로운 도전이 찾아왔다. 한국에 설립된 유엔 아시아태평양 정보통신교육원(APCICT)의 원장직 공모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2006년 6월 서울대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에 머무르던 중 뉴스에서 우연히 유엔 APCICT 개원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아프리카에서 설립한 센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구가 한국에 생겨서 반가웠죠. 그런데 7월 즈음 유엔에서 이곳의 원장을 맡을 사람을 찾고 있다고 제게 연락이 온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원장으로 내정된 미국인이 그 당시 송도의 외국인 자녀 교육 여건이 어렵다며 취임을 포기했어요.”
인생의 전환점에서 그는 갈등했다. 다시 학교를 떠난다면, 교수로서의 커리어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 무릎을 꿇고 가장 낮은 자세로 기도를 올렸다. 한참이 지난 뒤 결심을 굳혔다.
“한국인으로서 아프리카 53개국을 위해 일했잖아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유사한 기구를 만드는 데 제가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어요.”
이 원장은 2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딸을 그리워하던 팔순 모친은 동네 경로당에서 자장면을 돌리며 축하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모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원장이 주말도 반납하고 일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설이나 추석 연휴에는 해외 출장을 떠나는 일도 잦았다.
유엔 APCICT 설립 초기 마음고생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근거 없는 루머가 돌자 원장직을 포기할까 생각했을 정도다.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원장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제 자리를 원하는 분들이 계셨더라고요. 저는 원장직 자체를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다만 이곳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제가 떠나야 하는지 몇몇 지인에게 상의했더니 ‘한국 정부가 이 기구를 유치한 데는 큰 뜻이 있다. 끝까지 헤쳐나가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도망을 가서 문제를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의 성실한 땀은 ‘안티’를 잠재웠다. APCICT는 2008년 6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에서 대표 교육 프로그램인 ‘정부 리더를 위한 정보통신기술 아카데미(Academy of ICT Essentials for Government Leaders· 이하 아카데미)’를 론칭했다. 한국의 전자정부 및 정보보호 사례 등을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은 개발도상국 공무원의 교육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저희 교재를 공무원 시험 교과로 채택했어요. 남태평양군도와 몽골, 베트남, 티모르레세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공무원 교육과정에 도입했죠. 인도네시아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대학 석사과정이 만들어질 예정이에요.”
아카데미 프로그램은 21개국이 개발과정에 함께 참여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각 나라에 필요한 맞춤형 케이스와 솔루션을 담는 데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국가별 전문가들의 ‘다단계 리뷰’를 통해 콘텐츠 품질도 관리했다.
“아카데미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어, 러시아어, 바하사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이 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했죠. 향후 몽골어, 캄보디아어, 우즈베키스탄어, 미얀마어 등으로도 이 과정이 소개될 예정이에요. 각 나라가 아카데미를 APCICT만의 프로그램이 아닌 ‘우리의 프로그램’으로 인정해준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국제기구 평가를 전담하는 캐나다의 한 컨설팅회사는 APCICT에 대해 “가장 우수한 유엔 기관의 하나로 다른 기구에서도 이곳의 성공요인을 분석·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간의 성과는 다른 나라의 마음을 움직였다. 2010년 제66차 유엔 아태경제사회위원회(ESCAP) 총회에서 회원국의 적극적인 지지로 APCICT 상설화가 결정됐다.
“2004년 ‘한국에 APCICT를 만들자’는 안건이 일부 국가의 반대로 부결됐습니다. 일본과 인도에 비슷한 성격의 기구가 있으니 재원을 그쪽에 투입하면 된다는 논리였죠. 2005년 이 안건을 재상정했는데, 일부 국가의 반대가 계속됐죠. 결국 유엔이 송도에서 한시적으로 운영해보고 그 성과를 봐서 상설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어요. 제 박사과정 시작처럼 APCICT도 조건부 기구로 출발했죠. 상설화를 결정짓는 2010년 총회에서는 20개 나라가 APCICT의 활동과 실적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발언을 해주었습니다. 또 APCICT 상설화 의결서에 13개 나라가 협력국으로 서명했어요. 하나의 안건에 대해 이해관계를 떠나 이렇게 많은 국가가 지지해주는 것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어요. 다만 처음부터 반대를 주도한 한 나라는 APCICT를 평가하는 문구에서 ‘성공적인(successful)’을 ‘긍정적인(positive)’으로 바꿔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하더군요.(웃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유엔 직원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서 일한다’는 서약에 서명을 한다. 하지만 국가 간 이해가 상충할 때는 모국의 편을 드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 그는 “유엔 직원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내가 ‘대한민국 대표선수’라는 걸 한시도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와 한국 기업이 대외적인 이미지를 높이는 차원에서 APCICT를 잘 활용하면 좋겠어요. APCICT가 개발도상국에 한국의 우수한 정보통신기술 운영 사례를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이제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아프리카, 중동, 남미의 유엔 대륙본부에서까지 APCICT의 프로그램을 활용하려고 합니다.”
이 원장은 젊은 세대가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위기에는 정면으로 맞서기를 당부했다.
“얼마 전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어요. 시골에서 자란 제가 어떻게 세계 대륙을 누볐는지 들려주며, ‘좁은 세상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한 반의 친구들과 경쟁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리더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봤어요. 우연히 드라마 ‘대물’을 봤는데, 극중 여주인공이 불의에 맞서 사표를 던지고 나가더라고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소신은 좋지만, 진정한 리더라면 그 어려움까지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도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 바로 자녀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사회 환원’이라는 가치에 천착하는지 모른다.
“자식을 낳아 잘 키우는 것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쉽고 빚진 기분이 있어요. 그만큼 제가 더 열심히 살아야죠. 나이가 든다는 것 참 괜찮아요. 내려놓아도 억울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 모퉁이를 돌 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는 살아야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끊임없는 도전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답으로 들려주던 ‘수타니파타’의 경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던 그의 삶을 연상시켜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