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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而不同 정신 살려 러시아·중국·북한 ‘안보 바이러스’ 막아야”

한국통 외교관 궈청카이 주부산 대만 총영사

  • 부산=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입력2023-11-10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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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愛憎 교차하는 한·대만, 노랫말처럼 서로 이해해야

    • 1992년 한·대만 단교 후 한국어 성경으로 독학

    • 韓 유학 시절 도서관서 마주친 여성과 타이베이서 재회, 결혼

    • 부산-대만 가요슝 첫 번째 자매결연 도시

    • 한국·대만 잇는 가교 역할 충실하고파

    궈청카이 주부산 대만 총영사. [박해윤 기자]

    궈청카이 주부산 대만 총영사. [박해윤 기자]

    1993년 대만 타이베이(臺北), ‘대만 외교관의 요람’으로 불리는 국립정치대(國立政治大) 졸업을 앞둔 한 학생이 있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파 외교관을 꿈꾸던 그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묵묵히 공부했다. 직전 해 여름, 한국은 오랜 우방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수교했다. 단교 후 한국과 한국어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지만 마땅한 교사도 교재도 없는 형편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지만 ‘우리를 배신한 나라 언어를 왜 배우려 드느냐?’는 따가운 시선만 돌아올 뿐이었다.

    일찌감치 선택한 한국 전문 외교관의 길

    대학 졸업 후 제1 항도(港都) 가오슝(高雄) 해군육전대(해병대)에서 군 복무를 마친 그는 한국 유학을 택했다. 고려대 대학원 졸업 후 대만 외무고시에 2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어 전공으로 합격했다. 주한타이베이대표부 3등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한국과장, 주한타이베이대표부 정무팀장, 외교부 동아시아·태평양국 부참사관, 외교영사사무국 주임비서(심의관)를 거쳐 지난 5월, 주한타이베이대표부 부산사무처(駐韓國臺北代表部釜山辦事處) 책임자로 부임했다. 궈청카이(郭承凱) 처장(총영사)이 그 주인공이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와 동시 이뤄진 한·대만 단교로 인해 서울 명동의 대사관, 부산 총영사관은 폐쇄됐다. 이듬해인 1993년 일본 오사카회담에서 비공식 외교 기구 설치에 합의한 후 이듬해 1월, 서울에 주한타이베이대표부가 개설됐다. 단교 12년 7개월 만인 2005년 3월, 주한타이베이대표부 부산사무처가 문을 열었다. 대표부(代表部)는 대사관, 사무처(辦事處)는 총영사관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과 대만은 상호 이해 증진을 통해 상호 협력 공간을 넓혀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궈청카이 처장과의 만남은 대만 국경절(쌍십절) 다음 날인 10월 11일, 부산시 중앙로 부산사무처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가오슝에서 군 복무를 한 그는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며 함박웃음 지었다. 가오슝은 부산의 첫 자매도시. 1966년 자매결연 후 올해 57주년을 맞이했다. 서울과 타이베이의 자매결연보다 2년 앞선다.

    한국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동부 화롄(花蓮)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학창 시절 휴일도 없이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어야만 했죠. 마을에 유명 대리석 공장이 있었는데 서양 관광객들이 즐겨 찾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렇게 사는 인생도 있구나. 나도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으로 이어졌고요. 대학 입시에서도 국립정치대 외교학과 단 한 곳만 지망했습니다. 대만 최초(最初)이자 최고(最高)이며 유일한 외교학과니까요.”



    국립정치대는 외국인 유학생, 그중 한국인 유학생이 많은 학교다. 궈청카이 처장도 재학 시절 한국인 유학생들과 친분을 쌓았다.

    “한국인 유학생들과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방학이나 연휴 때는 제 고향집에 초대하기도 했고요. 한국과 인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졸업할 무렵 대만과 한국은 단교했습니다. 외교학 전공자로서 감회는 어떠했나요.

    “대학 졸업반에 올라갈 무렵인 1992년 8월, 대만은 한국과 단교했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요. 3학년 때부터 선수(先修) 과목으로 ‘동북아지역연구’를 수강하기도 했는데 단교 이후 한국에 대한 관심은 더 커져갔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단교 후 마땅한 한국어 학습 방법이 없던 궈청카이 처장은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 옛 어투로 된 개신교 ‘성경’이 독학 교과서였다.

    한국어 ‘성경’으로 한국어를 공부한 것으로 압니다.

    “1993년 여름 대학 졸업 후 가오슝 쭤잉(左營)의 해군육전대(해병대)에서 군 복무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와중에도 한국과 한국어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습니다. 전역 후에는 해외 대학원에 진학해 한반도 문제를 공부하려 했죠. 국교도 끊기고 인터넷망도 없던 시절 한국어 교재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어 학습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오슝한국교회(高雄韓國教會)에 가서 한국어 성경을 구해서 읽고, 때로는 목사님 설교를 워크맨으로 녹음해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오슝항에 한국 선박이 입항하면 달려가서 한국 신문이나 잡지를 받아와서 읽고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원문 그대로 외웠죠.”

    옛 한국어투로 된 개신교 성경으로 한국어를 독학한 탓에 궈청카이 처장은 이상한(?) 한국어를 구사하게 됐다.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한국 대학원에 진학한 후였다.

    한국 유학 시절 한국어 때문에 유명 인사였다고 들었습니다.

    “1996년부터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학기 첫 발표 수업이 있었죠. 너무나 긴장됐죠. 저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했습니다. 성경 어투대로 예를 들어 ‘한스 모겐소 가라사대 국제정치의 본질은 헤게모니라 하느니라….’ 식으로 이야기했더니 교수님이 ‘무슨 장난이냐?’고 하셨죠. 학생들 사이에선 폭소가 터졌고요. 저는 당시에는 성경식 표현은 일상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줄 모르고 진지하게 발표했습니다만…. 돌이켜 보면 재미있는 일이죠.(웃음)”

    한국은 연인(戀人)의 나라

    한국어를 전공하지 않은 궈청카이 처장에게 대학원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도서관 붙박이’가 됐다.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대학원 전공 과목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2년 반 동안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가장 일찍 도서관에 가서 가장 늦게 나오는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개방형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수업 시간 외에는 늘 붙어 있었죠.”

    궈청카이 처장에게 도서관 열람실은 학습 공간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인연(因緣)’을 맺어준 곳이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만난 분과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연을 이야기해 주세요.

    “당시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 열람실이 부족한 편이었죠. 시험 기간에는 더 했고요. 저는 늘 하던 대로 제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다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그사이 어떤 여성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앗! 여긴 제자린대요’라고 하자 그 여성이 ‘어멋! 죄송해요’라며 자리를 비켜줬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학생이었는데 그 후로 저는 도서관에 늘 있다 보니 오가며 마주쳤죠. 대학원 졸업 후 귀국했고 외무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외교·국제사무학원(국립외교원 해당)에서 국내 연수를 받던 어느 날 타이베이역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그 여성을 마주쳤습니다. 서로 알아보고 ‘어! 당신 누구잖아’라며 인사했죠. 그 여성도 석사 논문 완성 후 2박 3일 일정으로 타이베이를 찾았던 것이었죠.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그 후로 국제전화로 연락을 이어갔죠. 2000~2001년 미국 아이다호대에서 해외연수를 했는데 많지 않던 수습 외교관 월급 대부분이 국제전화 요금으로 나갔죠. 그러다 2001년 결혼했고요. 외교관으로 임용도 되고 했으니 ‘한 사람쯤은 책임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죠. 그래서 결혼하자 했습니다.”

    도서관 열람실 그의 자리를 잠시 점거(?)했던 그 여성은 심명주(沈明珠) 박사다. 현재 대만 국립양명교통대(國立陽明交通大)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만은 어머니의 나라, 한국은 연인(戀人)의 나라”라고 말하는 궈청카이 처장은 반려(伴侶) 외에도 수많은 한국인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 가운데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과 인연으로 9월 5일 부산광역시의회에서 개최된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 세미나’에 특별 초청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인연은 어떠한가요.

    “한국 유학 시절 현직 대통령이었죠. 거의 매일 TV에 나오던 분이셨고요. TV를 통해 접하던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제게는 아득히 먼 분이었어요. 2001년 미국 연수를 마친 후 외교부 동아시아·태평양국에 발령받았는데 처음 모신 손님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해 7월, 김 전 대통령 내외가 천수이볜(陳水扁) 당시 대만 총통 초청으로 타이베이를 방문했습니다. 유학 시절 TV에서나 보던 대통령 내외를 수행하고 통역도 하면서 감개무량했습니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고요. ‘외교관은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각별한 사이라고 하던데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만 방문 시 주한중국대사관이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대만에 가시지 않는 게 좋겠다. 중국에 오시면 더 잘 대접해 드리겠다’는 식이었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념과 의지가 강한 분입니다. ‘대만은 한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우방이다. 반드시 대만에 가겠다’고 말씀했죠.”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

    1992년 한국·대만 단교 후 양국 간 현안은 직항 항공편 복항(復航) 문제였다. 단교 후 항공협정 폐기로 한국-대만 간 국적기 취항이 불가능해졌다. 양국 국민은 제3국 국적기나 전세기를 이용해야 했는데 항공편은 적고 요금도 단교 전 보다 2~3배 비싼 형편이었다. 궈청카이 처장은 복항 문제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덧붙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복항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양국 국민 교류에 도움 되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 작은 일이라도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치가로서 국민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감동했습니다.”

    단교 31년을 맞이한 한국과 대만은 공식 외교관계는 회복하지 못했지만 비(非)정치 분야 교류는 더 활발해졌습니다.

    “지난해 통계 기준 한국-대만 무역 총액은 564억 달러로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습니다. 대만은 한국의 6번째, 한국은 대만의 5번째 무역 대상국입니다. 1992년 단교 당시 무역 총액이 34억 달러였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 발전이죠. 관광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직전에는 양국 상호 방문객 250만 명을 달성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7월까지 대만을 방문한 한국인은 36만 명, 한국을 방문한 대만인은 51만 명입니다. 이러한 수치가 양국 관계 발전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봅니다.”

    단교 이후 한국은 대(對)중국 일변도 외교를 펼치면서 대만을 소외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궈청카이 처장은 요즘 한국에서 트로트가 대유행이라며 가수 손빈아가 리메이크한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번’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미워도 다시 한번, 사랑도 다시 한번’이라는 트로트 가사가 있잖아요. 여기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대만과 한국을 ‘애증(愛憎) 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서로 더 이해하고 그 속에서 상호협력 공간을 발견해 가야 한다고 봅니다.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입니다. 예술은 정답이 없는 분야로 작가의 상상력과 의지에 따라 무한한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죠. 외교가 예술이라면 어떤 그림을 구상하고 그리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한국·대만 관계도 좋은 구상을 하고 천천히 그림을 그리면 분명 멋진 그림이 나오겠죠. 외교관으로서 저의 소명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협력 공간을 발굴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고요.”

    한국·대만의 실질 관계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양국의 상호 이해가 증진될 때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일 것이라 봅니다. 30년 넘게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20년 이상 외교관으로서 현장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국가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대만의 국제사회에서 외교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궈청카이 처장은 반론을 폈다. 국제사회의 대만에 대한 관심은 유례없이 커지고 구미(歐美) 국가를 중심으로 대만해협 평화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취지였다.

    “공식 수교국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대만을 지지하는 각국의 목소리는 높아졌습니다. 중화권 유일의 완전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만을 국제사회가 지지하는 것이죠. 올해 4월, 윤석열 대통령도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말씀했고요. 차(茶) 맛을 결정하는 세 가지는 △찻잎의 질 △찻물 온도 △시간입니다. 이를 이해해야 차를 제대로 즐길 수 있죠. 외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 가지가 핵심이죠. 첫째, 국제질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둘째, 업무에 대한 열정입니다. 열심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조성돼도 소용없습니다. 셋째, 타이밍입니다. 적시(適時)에 적절한 처방을 내리며 대응해야 합니다. 코로나19 대유행, 반도체를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 사슬망 중요성 대두 등 글로벌 환경이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로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국가도 국제사회에서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됐습니다. 대만에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의 창(窓)이 열린 것입니다.”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라나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국제사회는 글로벌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코로나19는 진정세이지만 새로운 바이러스가 인도·태평양 역내(域內) 평화·번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권위주의 국가가 진원지가 된 ‘안보 바이러스’입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라는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고 산업화-민주화-선진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임을 성공적으로 이행해 온 대만과 한국은 역사적 경험 면에서 유사합니다. 아울러 권위주의 체제의 위협에 노출돼 있죠. 대만과 한국은 다방면에서 더욱 긴밀히 협력해 역내 평화·번영에 기여해야 합니다.”


    궈청카이 처장이 집무실 벽에 걸린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친필 휘호 ‘和而不同(화이부동)’ 족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궈청카이 처장이 집무실 벽에 걸린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친필 휘호 ‘和而不同(화이부동)’ 족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궈청카이 처장은 집무실 벽에 걸려 있는 ‘和而不同(화이부동)’ 액자의 의미를 설명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2001년 초년병 외교관 시절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주신 친필 휘호입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절인데 ‘군자는 화합하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굽히면서까지 남의 의견에 동조하지는 않고, 소인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의견에 동조하고 무리를 짓지만 화합하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뜻입니다.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늘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국제관계에서는 ‘화(和)’ 즉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이를 유지하는 것은 규칙과 질서입니다. 국제사회 구성원이 이를 지키면 평화라는 보너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만과 한국이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로운 국제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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