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 등장 이후, 적어도 남북관계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관계의 성과를 독점하거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리를 범한 것도 사실이다.
그중에 하나가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2000년 4·11 총선 당시에는 선거일 직전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하여 선거에 이용한 바 있으며, 그 후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한 공로를 활용하여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국내 정치 강화나 유지에 남북관계를 이용했던 역대 정권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북관계의 전개 과정에서 야당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야당에게 남북관계에 대한 충분한 정책적 협의의 기회를 제공하고 초당적으로 야당의 협력을 이끌어내도록 이제라도 노력해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인한 자율적 정책 수단의 제약, 내정의 실패로 인한 지지도의 급격한 하락 등이 나타나는 현 상황에서 2차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과제를 실현해야 하는 김대중 정권의 처지에서 야당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은 더욱 절실한 일이다.
외세가 일방적으로 규정하던 냉전 시대의 국제 질서가 해체되고 이제 막 민족 자율 공간이 확장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지도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구체적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와 지지가 절대적 요건인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빌리 브란트에서 헬무트 콜로 이어지는 독일의 지속적인 동방정책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합의 도출 노력 속에서 가능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이 진심으로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려 한다면 남북관계를 활용하여 자신의 임기 내에 정계 개편이나 개헌 등을 시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대선 과정에 불가피하게 대두될 수밖에 없는 개헌 논의를 정략적으로 방치하거나 이용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정을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정권의 임기 내에 국가의 장기 발전 전망에 입각한 개헌 논의는 있을 수 있되 개헌 그 자체는 없으며, 내년 대선을 통해 각 정치 세력이 개헌과 관련된 견해를 국민에게 제시하여 평가받고, 대선 직후에 여야 합의로 개헌하여 차차기 정권부터 이를 실행하는 식의 구체적 일정을 확정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회창 총재, 김정일 답방 지지해야
또한 1차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거둔 남북관계의 성과를 한층 진전시켜 제도화의 수준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남은 임기 동안 이 문제에 몰두하겠다는 자세와 각오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 김대중 정권이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는 올해가 거의 마지막이며, 그 수단은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거의 유일하다. 만약 남북한이 2차 정상회담을 실현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한반도 정책을 극복해낼 수 있다면, 한반도의 화해 협력 기조는 오히려 클린턴 행정부 시기보다 더욱 탄력을 얻게 될 것이다. 2차 정상회담의 연내 개최 실현은 그만큼 중대한 과제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올해를 넘길 경우 거의 불가능해 질 수도 있다. 대선이 있는 내년에 정상회담을 시도할 경우, 불가피하게 정략적 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해 안에 내외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2차 정상회담을 실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야당과 국민의 지지와 협조를 구하는 진심 어린 노력과 접근이 필요하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내정의 실패를 솔직히 시인하고, 민주당 총재직을 떠나 남북문제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길이 퇴임 이후에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모든 점에서 그렇지만 특히 남북관계에서도 야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정권의 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하고, 민족 자율 공간이 위축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야당이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남북관계 발전을 뒷받침하려는 노력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이, 2차 남북정상회담의 연내 실현이 정파를 초월하여 남북관계 진전의 획기적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를 둘러싼 야당 역할의 중요성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만약 현재의 조건에서 야당이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면, 그 실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김대중 정권의 총체적 실패로 귀결되어, 야당이 단기적인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한 부담은 집권기간 내내 커다란 족쇄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민족 자율 공간의 위축 또는 소멸로 인해 장기적 전망이 사라지는 상황이 도래할 경우, 비전 없는 국가를 이끌고 가야 하는 집권측의 어려움은 권력을 획득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이회창 총재는 2차 남북정상회담을 매개로 한 남북문제의 전개 과정에서 장기적이고 대범한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즉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한 정파의 지도자에서 벗어나 스케일이 큰 민족의 지도자로 국민 앞에 다가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정치공학적 측면에서도 ‘포용력이 없다’는 이회창 총재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대범한 지도자의 풍모를 심어줌으로써, 집권 가능성을 확실하게 넓혀주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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