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부터 국정원의 공작팀과 안가관리팀, 탈북자를 전문으로 조사하는 팀이 교대로 방에 들어와 최인수를 조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최인수는 골동품 값은 받아주지 않고 왜 조사를 하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고 성격마저 억센 최인수는 마구 대들었는데 이것이 화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얄밉게 봐온 국정원측이 손을 보기로 한 것이다.
최인수는 상당한 구타를 당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자 최인수는 자살할 생각으로 마침 자기 앞에 있던 가스 라이터를 삼켰다. 1998년 7월16일 A일보를 찾아왔을 때 최인수의 뱃속에는 이 라이터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렇게 버티는 사이 최인수는 적잖은 거짓말을 둘러댔다. 확인 결과 최인수의 말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자 국정원 팀은 고문의 강도를 좀더 높였다. 최인수는 억울하다고 버티며 거짓말을 하고, 국정원 팀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며 폭행과 고문의 강도를 올리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국정원이 최인수에게서 뽑아내려고 한 정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시간이 흐르자 국정원은 최인수를 잘못 데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인수는 애초 그들이 기대했던 정보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국정원 측은 최인수를 신문할 의지를 잃어갔고, 자연 최인수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졌다.
1998년 7월15일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이날 밤 국정원 직원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최인수를 조사실에 혼자 두고 어디론가 몰려나갔다(단체로 저녁 회식을 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최인수의 몸을 묶어놓지도, 조사실 문을 잠그지도 않았고, 안가의 문도 잠그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때 상처투성이인 최인수는 반바지와 러닝셔츠만 걸치고, 발에는 슬리퍼를 꿰고 있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사라진 것을 안 최인수는 조사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짙게 어둠이 깔린 1층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크게 긴장한데다 어둠마저 짙었으므로 최인수는 마당에 떨어지는 순간 발을 헛디뎌 한쪽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슬리퍼마저 잃어버린 최인수는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안가를 둘러싼 담 쪽으로 접근했다. 안가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신기하게도 담장 한쪽에 있는 문이 열려 있었다. 최인수는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와, 논틀밭틀을 지나 끊임없이 자동차 불빛이 달리고 있는 도로가로 접근했다.
최인수는 비록 서울은 초행이지만,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해온 관계로 택시를 세워 탈 줄 알았다. 운 좋게도 그는 야밤 도로를 질주하는 빈 택시를 잡았다. 한국 형편에 대해 대충 알고 있던 최인수는 야당 당사로 가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나라당으로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의도에 있는 한나라당 에 도착했을 때 당사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자 최인수는 다시 “A일보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최인수는 왜 A일보로 가자고 했을까.
기자는 2차 취재를 하며 처음으로 A일보 이모 기자를 만나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기자는, 기자가 취재해온 것을 설명하며 “이런 일이 있지 않았냐?”고 물을 때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여부만 확인해줄 뿐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기자는 “최인수는 왜 A일보를 찾아갔냐?”란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도 궁금해서 최인수에게 물어보았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최인수가 A일보로 찾아온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왜 택시기사에게 A일보로 가자고 했냐’고 물어보았다. 최인수의 설명은 ‘북한에서 가장 큰 언론은 조선중앙방송이고 중국에서는 중앙전시대(中央電視臺·CCTV)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A일보가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해, A일보로 가자고 했다’고 설명하더라.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A일보를 찾아온 게 아니라, 언론사로 피신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판단해, A일보로 온 것이었다.”
A일보에 도착했을 때 최인수는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의 맨발이었므로 일전 한푼 없었다. 최인수는 A일보 경비원을 붙잡고 “조선족인데 억울한 사정이 있어 기자를 만나러 왔다”고 사정했다. 경비원은 차비를 대신 내주고, 그를 편집국으로 데려갔는데 이때가 대략 7월16일 새벽 3시쯤이었다.
“잃어버린 사람 있소”
이 시간이면 조간신문 편집국은 시내판 마감을 끝낸 뒤라 매우 조용하다. 편집국장을 대신한 야간 데스크와 기자들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한두 명만이 바둑을 두거나 외국 TV를 시청하며 아침을 기다린다. 최인수를 맞은 것은 이렇게 날밤을 새던 기자들이었다. 최인수는 기자들에게 골동품 장사를 하는 조선족인데 억울한 사연이 있어 찾아왔다고 밝혔다고 한다.
기자들은 북한전문 기자인 이기자를 불러들일 생각을 했으나, 새벽에 이기자를 깨울 만큼 급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인수를 한쪽 회의실로 안내한 후 담배와 음료수 등을 갖다주고 아침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 전화를 해, 오전 7시쯤 이기자가 편집국에 도착해 최인수를 만났다. 이때부터 약 3시간 가량 이기자는 최인수를 여러 각도로 취재했다. 국정원 관계자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때 이기자는 고문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된 최인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3시간 동안 취재를 하고 난 이기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국정원의 안가를 탈출했다는 최인수의 주장만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정원측에 “잃어버린 사람이 있냐”고 전화를 걸었는데, 그 순간 국정원은 “있다”며 반색을 했다.
그 직후 해외공작을 담당하는 모(某)국 요원과 공보 관계자들이 A일보로 달려와 최인수를 데려가려고 했다. 당황한 것은 A일보와 이기자였다. 국정원측은 최인수를 데려감과 동시에 A일보에게 이 일을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때 국정원장은 정치인 출신의 이종찬(李鍾贊·65)씨고, 북한과 해외를 담당하는 제1차장은 학자 출신인 나종일(羅鍾一·61)씨, 최인수를 한국으로 불법납치해온 팀의 국장은 공군장교 출신의 C씨였다. 최인수의 신병을 인수한 국정원은 즉시 공보보좌관을 중심으로 회의를 열고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A일보로부터 최인수 사건을 보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국정원은 다른 언론사가 이 사실을 알고 보도하는 것을 막는데 진력했다. 이를 위해 국정원은 주요 언론사의 편집·보도국장을 강북 롯데호텔로 초청해 간략히 “공작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인을 데려와 조사했는데 잘못돼서 이 자(者)가 탈출해 A일보를 찾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북한인을 데려온 것이 알려지면 국익에 큰 손해가 일어나니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보도 막은 국정원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는 타사 국장들은 국정원이 대북공작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국정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채 5개월도 되지 않은 때라 언론과 정부 사이는 비교적 원만했다.
최인수 사건을 모르는 다른 언론사라면 몰라도 A일보의 이기자만은 그후에라도 이 사건을 보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기자는 “최인수 사건을 보도하고 싶지 않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도, 예외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국정원의 북한인 불법 납치와 고문, 그리고 북한인의 탈출 사실을 보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그때 최인수가 신동아로 뛰어들었다면, 신동아는 최인수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최인수 사건을 특종으로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시기가 시기니만큼 특종으로 보도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국정원이 최인수를 데려갈 때 이기자는 국정원측에 두 가지를 부탁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최인수는 살기 위해 A일보로 뛰어든 사람이다. 그러니 최인수를 데려가되 그의 신변안전을 보장해 달라, 또 최인수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알려달라.”
국정원측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으나 불행히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정원은 최인수의 신변을 끝까지 보호해 주지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후 국정원은 최인수를 귀순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귀순을 시키더라도 최인수는 고(故) 이한영(李韓永)씨처럼 나중에 언론사를 찾아가 “나는 국정원에 의해 불법으로 납치돼 왔다”고 떠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 국정원은 6개월 후 서울로 데려올 때의 역순(逆順)으로 최인수를 은밀히 선양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 얼마후 최인수는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그후 최인수에 관한 소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러자 선양에서는 “최인수는 북한에 끌려가 그곳에서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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