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각하, 제 작품 ‘환상교향곡 한국’을 음악영화로 만드는 계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한국의 역사와 수려한 산하, 한국의 춤, 압제와 비극,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와 독립의 승리를 묘사할 것입니다. 스크린에서 한국의 유장한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1000명의 합창단과 200명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이 저의 작품 한국환상곡을 연주할 것입니다….”
애국가의 작곡자로 알려진 안익태 선생은 1958년 2월27일자로 된 이 편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신시네티 인디애나폴리스 찰스턴 버밍햄 오클라호마시티 덴버 등 미국 전역을 돌며 행한 연주활동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했을 때 미국 청중이 보여준 열렬한 반응을 자세히 소개하며,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도 이 작품의 영화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이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이 작품의 영화화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한국의 뛰어난 문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익태 선생은 또 이대통령 앞으로 보낸 3월17일자 편지에서는 한국에서 ‘제1회 국제음악제’를 개최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 행사에 참가할 미국측 음악인의 명단까지 적어 보내기도 했다.
한국 정부로서도 이같은 제의는 솔깃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거기에 들어갈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가난하기 짝이 없었던 나라 살림으로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출신의 작곡가 겸 지휘자가 내놓는 갖가지 제안은 ‘꿈같은’ 것일 뿐이었다.
“이곳(한국)에 있는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제안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화를 위한 대부분의 재원을 나라 밖에서 구할 수 없다면 이 계획은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안익태 선생의 제안에 대해 당시 공보처(Office of Public Information)의 오재경 처장은 이같은 내용의 답변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 처장은 이 편지에서 안익태 선생에게 워너 브라더스나 월트 디즈니같은 영화 제작자들을 접촉해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설득해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당시의 한국정부는 이런 일에 돈을 댈 처지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안익태 선생은 한국 환상곡의 영화화 뿐 아니라 다른 몇 가지 일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안을 내놓거나 도움을 요청했다. 한미문화협회를 창립하자는 제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듯하다.
이대통령은 호놀룰루와 미 본토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 영사들에게 직접 전문을 띄워 그 일이 성사되기 어려움을 안익태 선생에게 잘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알다시피 (기왕에 설립돼 있는) 한미재단의 목적이 바로 양국간 문화교류 촉진이고, 우리는 또 밴 플리트 장군이 주도하고 있는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소. 이런 마당에 양국간 문화교류를 위해 또 다른 단체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오. 이 점, 안선생의 제안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잘 설명하기 바라오….”(1958년 3월20일자,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전문)
안익태 선생은 또 자신의 미국내 연주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내 주요 연주단체에 직접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클리블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조지 셸, 필라델피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유진 오먼디,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같은 거장들이 그런 ‘대상’들이었다(1958년 5월28일자 서신).
그러나 이대통령은 이 요청도 완곡하게 거부했다. 경무대측은 안 선생에게 보낸 편지(1958년 6월12일자)에서 “대통령이 미국내 주요 도시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것은 적절치 못하며, 주미 한국대사에게 안선생의 요청을 전달해 놓았으니 주미 대사가 그 요청에 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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