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정치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정조. 하지만 그는 소수파 정권과 ‘죄인의 아들’이라는 정치적 한계를 끝내 뛰어넘지 못하고 좌초했다. 세도(世道)는 세도(勢道)로 바뀌었고 탕평정치는 편가르기와 세 부풀리기로 변질됐다. 그가 신하를 ‘국가의 편’과 ‘역적의 편’으로 나누는 순간 개혁과 민생은 사라지고 기싸움만 남게 됐다. 외척 세도가 김조순이 회상하는 형식으로 정조의 실패 원인을 짚어보고 이를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비교해본다.[편집자]
1800년 여름은 무더웠다. 창경궁 영춘헌의 소나무도 더위에 지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6월14일, 그러니까 발병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전하께서 나를 부르셨다. 등쪽에 난 종기로 잘 주무시지 못한 탓인지 두 눈이 심하게 충혈되어 있었고, 사뭇 초췌한 모습이었다. 평소 50발 가량의 화살을 쏘고도 끄떡없던 전하를 생각해볼 때, 이번 병환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낄 수 있었다.
상(上)께서 종기로 고생하신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793년(정조17)에도 온 얼굴에 종기가 나서 며칠 동안 앓아누우신 적이 있다. 그때는 천행으로 전주 출신 의원 피재길이 지어올린 고약이 바로 효력을 발휘하여 완쾌되실 수 있었다(‘정조실록’ 17년 7월16일자, 이하는 17/7/16으로 날짜만 표기함. #표시는 음력).
그러나 이번 종기는 워낙 심중한 것인지라 피재길조차 손쓸 도리가 없어 쩔쩔매고 있었다. 전하는 나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전하의 등과 앞가슴은 물론이고 머리 쪽에도 종기가 심하게 돋아 있었다. 전하께서는 “경의 가문이 덕문(德門)이요 명망 있는 집으로서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인 데다 “경의 여식 또한 덕스런 용모를 갖추었으니” 이는 실로 종묘의 복이라고 말씀하셨다(24/2/27). 두 달 전 제2차 세자빈 간택에서 내 딸이 1순위로 결정된 것에 대한 칭찬이셨다.
전하는 또한 지난달의 ‘오회연교(五晦筵敎)’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금년 5월30일 경연에서 당신의 정국운영방식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발표하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는 “전하의 높은 성지(聖旨)를 다 헤아릴 수는 없으나, 힘껏 받들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종기로 인한 열 때문인지, 옥음(玉音)이 간간이 끊어지곤 했다.
“임금의 처지는 외롭고 위태로운 것”
상께서는 그 동안 “8년 간격으로 번갈아” 각 당파의 인재를 정승으로 임명해왔으며 “어진 선비를 중용하는 정치(右文至治)”를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도무지 그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다.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 곧장 반응이 나오는 것”처럼, “그늘에서 학이 울 때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국왕의 하교를 듣고 “의기가 북받쳐 올라 그 의리를 천명할 길을 생각하는 자”가 쏟아져나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24/5/30).
여전히 신료들은 “속된 습속(俗習)”에 따라 당을 짓고 편을 갈라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심지어 국왕 지시까지 거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습속을 바로잡고(矯俗), 서로 합력하여 “효과를 거두는 정치”를 위해서는 나 같은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이 앞장설 것(率敎)이니, 나는 따라오고 적극 지지해달라는 말씀이셨다.
“근래의 정치를 보면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지금의 이 증세도 실상 해묵은 화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관이 전하의 등쪽 고름을 한 차례 닦아냈다. “경도 알다시피, 사대부란 자들이 나라일에는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음침한 장소에서 사면팔방으로 서로 내통하다가, 조금이라도 자기 당파에 불리한 일이 생기면 머리를 치들어 대들고 있지 않은가”(24/6/16).
내가 “어조가 과격하시어 몸조리에 해로울까 저어된다”고 말씀드리자, 전하는 잠시 숨을 고르시더니 이윽고 내 왼손을 손수 이끌어 옆에 있던 원자(元子, 나중의 순조)의 양손을 잡도록 하셨다. 상께서는 원자에게 “이 사람은 네 스승일 뿐만 아니라, 내 동기(同氣)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황황해하는 나를 돌아보시고는 “임금의 처지는 실로 외롭고 위태로운 것”이라면서, 장차 원자의 뒤를 돌보고, 또한 세도(世道)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용렬한 천신(賤臣)이 그런 대임을 맡을 수 없다”는 내게 상께서는 “경이 아니면 어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큰 그릇(大器)은 두루 통용되어 국한되지 않는 법(不器)”이라면서 앞으로의 정국운영을 내게 맡긴다고 말씀하셨다(김조순, ‘풍고집’ 별집. ‘영춘옥음기’).
세도(世道)에서 세도(勢道)로
‘정국운영을 맡긴다’는 말씀은 전연 뜻밖이었다. 당신이 손수 가르치고 길러온 초계문신 출신인 내게 ‘지지’를 당부하신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나, 정국운영을 부탁하신 것은 의외였다. 당신의 말씀마따나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 더욱이 전하께서 내게 “세도를 위임한다”는 것은 그 동안 당신이 표방해온 ‘우현좌척(右賢左戚)’의 정국운영방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불과 5년 전 화성((華城)) 행차 직후에도 전하께서는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내외척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19/3/10)를 강조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전하께서 ‘세도(世道)에 따르는 정치’를 포기하고, ‘세도(勢道)에 의한 정치’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1795년부터 지금까지 전하는 믿었던 “어진 신하들”에게 심한 배신을 느끼셨던 듯하다.
노론의 대표적인 ‘비판적 참여자’라고 할 김종수(金鍾秀)는 물론이고, “전하로부터 저토록 신임을 독점했다”(23/1/18)는 채제공(蔡濟恭)조차도 전하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작년 초에는 ‘좌(左)제공, 우(右)종수’마저도 약속이나 한 듯 열흘 간격을 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국가재정을 도맡아오던 정민시(鄭民始)가 석 달 전에 사망했을 때도 전하는 심히 허탈해하셨다.
결국 전하는 내게 ‘세도를 위임’함으로써 정국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1795년 이후 철저하게 임금을 고립시킨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세력의 강고함과, 무기력 한 소론파 이시수·이만수, 그리고 천주학 문제로 유배 가 있거나 외직에 밀려나 있는 남인의 젊은 신하들, 노론의 분열을 통한 지배, 이것이 바로 전하가 내게 기대하는 바였다. 이제 전하는 재위24년의 정치원칙을 걸고 새로운 승부수를 던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승부수는 1795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2.
1795년(정조19) 정월 초하루의 날씨는 몹시 흐렸다. 일식(日蝕)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상감의 보고가 있었지만, 해는 앞으로 벌어질 1년의 정국만큼이나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가 않았다. 전하는 여느 때처럼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시작하셨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참배하는 일은 이제 전하의 모든 거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자식이 아버지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전하는 정치적으로 미묘한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경모궁을 찾아 전알(展謁)하곤 했다(12/2/25 ; 8/7/2). 경모궁에서 나오는 전하의 침통한 표정 앞에 우리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기일(忌日, 5월13일)을 전후한 열흘 동안은 모든 정치가 멈추는 시간이다. 이 기간에 전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근신재계(謹愼齋戒)의 기간에 함부로 경모궁에 들어간 자나 제례의식(儀式)을 비판한 자는 삭직이나 유배형과 같은 엄한 벌을 받았다(6/4/20, 6/6/21). 말하자면 경모궁은 이 시대의 정치적 금기처(禁忌處)였으며, 벽파 신하들을 향한 전하의 무언의 압력이었다.
과거청산 둘러싼 신하들의 대립
사실 1795년에 들어서 우리 노론은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4년째 계속되는 전하의 ‘개혁정국’ 속에서 노론이 내부적으로 분열된 반면, 정적들의 집요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노론 벽파의 영수(領袖)인 김종수는 남인 이석하에 의해 성토당했으며(18/7/24), 같은 노론의 김이성에 의해서도 공격받았다(18/4/6). 전하는 아예 금령을 설치해 신료들의 쟁집 자체를 막아버리곤 했다. 1794년에는 당신의 재위기간 중 가장 많은 금령을 내렸다.(18회). 그것은 주로 강화도에 있는 당신의 이복동생 은언군에 대한 신하들의 성토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18/4/14 등).
이에 앞서 1793년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이른바 ‘천토(天討)상소’를 올려, 노론 벽파의 마음을 철렁하게 했다. 이전의 두 차례에 걸친 ‘영남만인소’(1792년) 사건 때 보인 전하의 남인에 대한 전향적 태도에 힘입어 그는 사도세자 사건 관련자 처단을 요청했다. 그는 “천지간에 극악무도한 자들의 지친(至親: 父子·兄弟)과 인척들이 모두 벼슬아치의 대장(臺帳)을 꽉 메우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사도세자를 “참소하고 무함”했던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사도세자의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낼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17/5/28).
1792년 봄 경상도 유학(幼學) 이우 등이 1만57인의 연명상소를 가지고 올라왔을 때 우리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선대왕(영조)의 본심을 받드는 것”(16/4#/27)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상께서는 “소리 내어 상소를 읽게” 한 뒤에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영조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내려보냈다. 부자의 윤리(孝親: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군신의 윤리(忠義: 영조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하의 반응은 집권 초의 태도와 비교해볼 때 크게 달라진 것이다. 즉위년에 영남 유생 이응원이 사도세자 사건 관련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전하는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으로 간주하여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大逆不道)”로 처벌했었다(00/08/06). 그런데 16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이 난처한 문제를 자신의 입으로 드러내어 밝힐 수는 없다는 전연 뜻밖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임금의 변화된 태도를 감지한 영남 유생들은 1차 때보다 더 많은 유생이 연명한 제2차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들은 “먼저 사실을 확인한(先分辨) 다음에 처벌할 것(後誅討)”(16/5/7)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상은 “감히 말할 수 없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던 제1차 만인소 때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 사도세자 사건을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16/5/7)로 부각시키는 한편 “부자간의 윤리가 있은 연후에야 군신간의 분의(分義)도 있다”(16/5/22)고 말한 것이다.
“임금이 소인들에 의해 고립됐다”
채제공의 ‘천토상소’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채제공의 상소는 전하까지 “등에 땀이 흐르고 마음이 오싹”(17/05/28)해질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벽파의 신하들이 느낀 위기의식은 대단한 것이었다(17/08/09). 아마 몽오(夢梧, 김종수의 호)의 몸을 내던진 공격적인 대응이 아니었다면 우리 노론 내부의 분열과 이탈은 훨씬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몽오는 채제공의 ‘천토상소’가 “국시(國是)를 뒤바꾸려는 책략”에서 비롯되었다고 규정하고, “영남사람 만여 명을 즉각 불러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채제공이야말로 “반드시 변괴”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몽오는 나아가 채제공과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있을 수 없다”며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다. 전하가 어렵사리 조성한 남인-노론-소론의 보합(保合)체제를 와해시켜버린 것이다. 그는 또한 국왕 즉위년의 다른 역모사건과 연관지어 채제공을 역공하는 노련함을 보였다(17/5/30).
3.
내가 1785년(정조9) 약관(弱冠, 20세)의 나이에 정시 문과에 급제했을 때, 상께서는 “김상헌의 자손이 등과했다”며 크게 기뻐하셨다. 이 자리에서 전하는 내 이름을 “조순(祖淳)”으로 바꾸어 주시고는(원래 이름은 낙순(洛淳)),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주셨다(김조순, ‘풍고집’ 부록 풍고김공신도비명 408).
전하께서 주신 이름과 호를 풀어보면 “조상이 순량한 너는 궁중에 심어진 단풍나무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순임금 때의 고요(皐陶)와 같은 신하가 되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날 퇴정(退廷) 후 이 말씀을 전해들은 아버지(김이중)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당신의 친구이자 내 사부이기도 한 이사문·김홍운 선생은 물론이고 연암 박지원까지 초청된 이 자리에서 사부님께서는 나의 글을 일일이 검토하시고 “새로운 시(新詩)”요, 근래에 “보기 드문 글(新文)”이라고 칭찬해주셨다(‘풍고집’ 권9 제오산김문공).
전하께서 특별히 나와 우리 가문에 관심을 기울이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시(庭試), 즉 홍국영(洪國榮) 잔존세력인 이율 등의 역모를 토벌한(1785년 2월) 기념으로 특별히 과거를 설행(設行)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하의 권좌는 즉위한 지 1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임금이 소인들에 의해 고립”되었고 이제 “노론은 다 죽게 되었다”(9/2/29)는 역모 주동자들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노론 신하들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전하는 우암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추배하면서 우암을 “우리 사문(斯文)의 대현(大賢)”이라고 극찬하거나, 세손 시절 당신이 주희와 송시열의 글을 편집하여 만든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소개하기도 했다. 당신이 노론의 도통을 이토록 존중하고 있다는 태도였다(0/5/24).
“신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론의 신하들은 전하의 정치를 집요하게 부정했다. “전하가 정치하는 것은 근본을 버려두고 말단만 다스리려”는 것에 불과하다거나, 국가를 “조종하는 방술(方術)이 부족”하다(0/11/21 정언 한후익)는 비판, 임금 자신의 뜻만 내세우고 “신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4/3/8 서장수)는 비판, 그리고 국왕이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신하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다(13/11/17 김종수)는 비판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한나라나 당나라의 중등 군주”보다도 못하다(18/5/22 이병모)는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
1795년 정월에 있었던 권유(權裕)의 상소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전하가 즉위한 지 “15, 16년이 지나면서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고 민지(民志)가 날로 미혹되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르고 말았다”(19/1/11)고 진단했다.
아울러 그는 화성행차를 앞둔 가운데 “형벌을 받아 복주(伏誅)되는 것”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정치적 비리를 폭로했다.
정조가 말년에 정국운영을 맡겼던 김조순. 김조순의 세도(勢道)는 정조의 개혁정치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당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동년 회갑을 맞아 생부 사도세자의 존호를 올리는 한편 화성에서 베풀 연회 준비가 한창인 때였다. 따라서 이러한 비리폭로는 벽파세력에 의한 흠집내기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께서는 권유의 지적이 “정말로 타당”한 것이며, 당신 스스로를 “반성”한다는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그리고 귀근으로 지목된 정동준(鄭東浚)에 대해서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임금의 위세와 권력을 훔쳐 농단한 죄’로 자결하게(19/2/22; 19/2/28) 하였다.
4.
1795년 윤2월9일 아침, 상과 혜경궁을 태운 가마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종루(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하고 노들(노량)배다리에 이르렀다. 전하가 직접 참여해 48척의 배를 동원하여 11일 만에 완성한 배다리를 이용해, 일행은 한강을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었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그리고 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구경꾼들(觀光民人)이 몰려들었으나, 상은 이들의 구경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 때문에 구경꾼들은 축제분위기 속에서 행렬을 ‘관광(觀光)’할 수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군복(軍服)으로 갈아입은 상은 지금까지 타고 온 뚜껑 없는 가마(輿) 대신 말로 갈아타고 장승백이 고개(長牲峴)를 넘어 번대방평(蕃大坊坪)으로 향했다.
여기서 행차는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서 시흥현 문성동길을 지나 이날 밤 유숙지인 시흥행궁에 이르렀다. 원래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으로 가는 길은 시흥 방향이 아니고, 사당리를 지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야 했다.
그러나 상은 이 해부터 이 길을 피하고 새로이 만들어진 시흥길을 택했다. 전하는 남태령길이 험하고 닦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나, 인덕원 가는 길의 찬우물점 근처에 김약로(사도세자 죽음에 깊이 관여한 김상로의 형)의 무덤이 있어서 상께서 그것을 싫어하신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당신께서는 시흥길을 택하고 싶었을 것이다.
화성 건설과 왕권강화
전하는 이 행차에 앞서 화성 건설에 비판적 태도를 보여온 노론의 이병모를 직위해제하고 대신 그 동안 화성 성역화와 ‘사도세자 신원(伸寃)’을 주도해온 채제공을 발탁하는 등 정계개편을 단행했다(19/1/26). 뿐만 아니라 이틀 후에는 유언호와 채제공을 불러 “천명(天命)의 돌보아줌이 바야흐로 새로워지고 인심의 지향하는 바가 바야흐로 절실해지고 있다”면서 “마음 단단히 먹을 것”과 “백성이 원하는 정치를 위해 거침없이 진입할 것”임을 말하였다(19/1/28).
노론의 유언호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의 화성행차는 사실상 벽파의 신하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즉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전에 먼저 현륭원(사도세자 능)을 방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행차는 33년 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희생된 생부 사도세자에 대한 당신의 ‘애통한 마음’과 그에 대한 노론 벽파의 책임을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상은 이번 행차 도중에도 백성을 직접 만나려고 애썼다. 왕의 가마가 이동할(動駕) 때는 위외(衛外)에서 격쟁(擊錚)하거나 상언(上言)하여 각종 억울한 일을 고할 수 있게 했다. 이번 행차 때 판하(判下: 임금이 문서를 결재하던 일)된 상언만도 무려 127건에 달했다.
사실 임금과 백성이 직접 만나는 것이야말로 노·소론을 떠나 우리 신료들이 가장 꺼리는 일이었다. 왕이 백성을 직접 만나는 일이 많을수록 그 사이에 있는 우리 신료들의 힘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자칫하면 중간에 있는 신료들의 잘못이 들춰질 위험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왕권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재위 5년에 형조판서 김노진이 기강의 해이를 들어 “함부로 격쟁한 사람에 대해서 충군율(充軍律)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5/7/16)이나, 재위 15년에 병조판서 김문순이 통구대로(通衢大路: 통운교·혜정교·파자교 등 상언·격쟁 지정 장소)에서 상언·격쟁하는 것을 통제하자고 제안한 것은(‘일성록’ 정조 15/2/29)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은 화성의 세심대에 올라 꽃을 감상하게 하고, 신하들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셨다. 상께서는 행차길에 지은 시 한 수를 읊으셨다.
“혼정신성의 그리움 다할 길 없어/ 오늘 또 화성에 와 보니/ 궂은 비는 침원에 부슬부슬 내리고/ 이 마음은 재전을 끝없이 배회하누나/ 어찌하여 사흘밤을 잤던고/ 아버님 영정을 모셨기 때문일세/ 더디고 더딘 걸음에 고개 들어 바라보니/ 오운이 저 멀리서 일어나누나”(정조, ‘홍재전서’ 제5권 詩).
대신과 각신들의 화답시가 이어지고,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상은 이윽고 이른바 ‘갑자년 구상’을 말씀하셨다. 즉 사도세자의 결혼 60주년(回婚)이 되는 10년 뒤 갑자년에 다시 화성에 와서 연회를 베풀기 위해 “수라(水剌)에 사용하는 기명(器皿) 등속을 그냥 수원본부(本府)에 놔두도록 했다”는(19/3/7) 것이다.
소수파 정권, ‘죄인의 아들’
전하의 ‘10년 구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화성을 건설하는 과정에 어떤 사람은 ‘천도’를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나는 화성이 ‘10년 구상’과 관련해 축조되었다고 본다.
즉 세자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화성 등지에 머물며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한편, 정치를 보좌하겠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정치적 소수파로서, 그리고 이른바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열등감으로 늘 괴로워했던 전하로서는 이런 방식으로 왕권의 기반을 닦으려 했던 것이다.
5.
상께서 나를 가까이 두려 했던 것도 소수파 정권이라는 사실과 “죄인의 아들”이라는 열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거두였던 청음(김상헌)의 후손이자, 부자(父子) 영의정을 배출한 김수항·김창집 가문의 자손인 나를 근처에 둠으로써 노론세력의 지지를 끌어내는 한편 옥좌의 권위도 높여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급제한 다음해에 청요직(淸宦과 要職)인 예문관 검열(檢閱)에 발탁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788년에 규장각의 대교(待敎)가 되는 등 고속 승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곧이어 그 다음해에 나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전하께서는 규장각신으로 중국에 가게 된 나와 서용보를 위해 특별히 술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상께서는 특별히 나를 당신의 왼쪽 자리에 앉게 하고는 “연연(戀戀)한 마음”을 표현하셨다. 전하께서는 “사람이 사내자식을 낳으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천지사방에 쏘는데, 이것은 뜻을 널리 사방에 두라”는 뜻이라면서,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다(16/10/20).
하지만 전하께서 우리에게 늘 온화한 모습만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술자리를 한 다음날 조정을 떠나 중국으로 가고 있는 내게 전하는 파발을 띄워 반성문을 요구하셨다. 전에 내가 이상황과 함께 예문관에 숙직하면서 당송(唐宋)시대의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이라는 책자를 읽다가 전하께 발각된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잘못을 꾸짖으셨다는 것이었다.
5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 와서, 그것도 사행길에 오른 시점에 새삼스레 자송문(自訟文)을 작성해 올리라는 말씀이 적이 의구했지만, 상황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되었다. 즉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이 순전히 소설체로 되어 있었으며, 초계문신 남공철도 대책문에서 “골동(古董)”과 같은 패관문자를 사용한 것을 전하가 보시고 그들을 처벌했다는 것이다(16/10/24).
젊은 정치엘리트 육성
사실 전하께서는 나와 같은 젊은 관료들의 문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문풍(文風)이 세도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장은 한 시대의 체제가 있어서 세상의 도(世道)와 더불어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 문장을 한번 읽어보면 그 문장을 낳은 세상을 논할 수 있다. 주나라의 도가 쇠퇴하자 모사(策士)들이 자유분방한 문장을 구사하였고, 한나라의 위업이 크게 일어나자 서경(西京=前漢)의 문체가 바르고 우아해졌다”(正祖, ‘홍재전서’ 권50, 책문)고 한 전하의 말로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는 전하의 문풍 혁신운동의 중심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40세가 되면 교육을 면제함)의 재주 있는 젊은 문신들을 뽑아 올려(抄) 규장각 주관하에 사서삼경과 역사책을 교육(啓)하는 제도다. 이와 함께 규장각의 신료들도 전하의 높은 관심 대상이었다. 주로 당신의 정책에 협조적인 시파 인물을 규장각신으로 선발하여, 각종 정책 아이디어를 내놓도록 했다.
규장각을 시파 세력의 거점지로 인식한 벽파의 신하들이 “규장각은 곧 전하의 사각(私閣)이지 나라 안의 공공(公共)의 각(閣)이 아니”(6/5/26)라고 비판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규장각은 국왕 지지세력의 결집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일대의 영재들”이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누리는”(16/2/11) 새로운 정치엘리트들이 한 곳에 모여 중국과 조선의 고전(古典)을 연구하고, 당면한 현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밤늦도록 토론하는 풍속은 세종대왕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부활된 것이었다. 우리는 경쟁하듯 서로를 자극하고 격려하면서 고전을 연찬(硏鑽)했고, 조선을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정책방안들을 제시했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고증학 같은 새로운 학문과 ‘사고전서(四庫全書)’와 같은 방대한 편찬사업의 결과물, 그리고 북경의 천주당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문물도 사고의 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들어온 이덕무나 박제가, 그리고 유득공과 같이 서얼 출신이지만 매우 박식한 사람들과의 진지한 대화는 젊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곤 했다. 다음날 전하께 올릴 시책(施策)을 마련하기 위해 고제(古制)를 찾고, 그 실천가능성을 놓고 함께 검토하고 토론하면서 밤을 새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치의 무기력화, 통치의 무사안일화
사실 우리들 각자는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진,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그러저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이 일단 한 곳에 모여서 고전의 지혜를 바탕으로 주어진 정책과제를 진지하게 토론하자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대안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흩어져 있던 숯불을 한 곳에 모으자 놀라운 기세로 활활 타오르는 것과도 같았다.
전하는 늘 우리들에게 “당세(當世)의 인재를 통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의 정책대안을 실현하려고 애쓰셨다.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실제적인 학문’, 즉 실학(實學)이 될 수밖에 없었다.
6.
이처럼 실제적인 학문이 중시되는 풍토에서 문화와 경제는 번창하고 있는 데 비해, 유독 정치만은 ‘삼류’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규장각에서 공유했던 공동체 의식도 일단 가문이나 붕당의 이익과 연루되면 맥없이 무너졌다. 대신들과 언관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관료들 역시 자리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삼류정치’의 배경에는 전하의 독단적인 정치운영이 있었다. “신하를 가르칠 수 있는 상대로 삼기 좋아하시어 기를 꺾고 윽박지르는 위엄이 간혹 간신(諫臣)에게까지 행해지고, 신하들을 싫어하고 박대하시어 업신여기는 뜻이 귀근에까지 드러납니다. …이 때문에 대관(大官)들은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을 힘쓰고, 관료들은 임금의 명에 달려가 순종하기만을 일삼아, 진퇴를 명하는 대로만 하여 자신의 지조는 돌아보지 않고, 아첨이 풍습이 되어 충직(忠直)을 바치는 사람이 없습니다”(12/1/23)라는 오익환의 비판은 전하의 정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임금은 모름지기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자를 신하로 삼기 좋아해야”(好臣其所敎) 하는데(맹자), 전하는 정반대로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신하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말을 다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다”(13/11/17)는 김종수 대감의 비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하가 자신의 총명을 믿고 자만하여 “신하들을 가르칠 상대”로 보고 비판과 조언을 받을 상대로 보지 않은 결과는 ‘정치의 무기력화’와 ‘통치의 무사안일화’였다. 즉 1798년(정조22) 여름에 헌납 임장원은 “이로써 오늘날 전하의 정치가 지금 당장 무기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일을 경계하셔야 되리라고 느끼고 있고, 전하께서 오늘날 나라를 통치하시는 것이 무사안일에 빠졌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의 일을 두려워해야”(22/8/26) 한다고 비판했다.
1795년 이후 강화된 금령(禁令), 즉 언로(言路)의 통제는 전하의 정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전하는 인사문제나 역적토벌과 관련하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해당사항에 대해 금령(禁令)을 설치하여 신하들의 상소나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에서 언급하지 못하게 하곤 했다.
그해 여름에 은언군을 불러 창덕궁 북쪽의 훈련도감에 머물게 할 때도, 상은 금령을 설치하여 쟁집을 차단했다. 상은 일년 전에 신하들과 했던 약속도 깨뜨렸다. “당시에는 결말을 짓기에 급급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19/06/21).
화성 전도. 정조는 경기 화성에 새로운 성을 세워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민생, 개혁과 무관한 기싸움
그해 10월까지 은언군을 둘러싸고 전하와 신료들 사이에 줄다리기가 계속됐지만 이는 민생이나 개혁과는 무관한 기(氣)싸움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은언군을 만나는 과정에 불법적인 방법과 기만적인 조치를 사용하면서 이것을 권도(權道)라고 부르는 전하에 대한 불신감은 깊어만 갔다. “권(權)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도 곤란한 법인데 더구나 두 번 할 수가”(19/7/7) 있느냐는 김희의 비판이 그것이다.
노론이면서도 사도세자 사건 처리에서 시종 전하의 편(시파)이었던 김희가 이탈한 것이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상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한마디로 전하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19/6/2)는 고백이나 “나 혼자서 1000칸의 창고를 지키는”(22/5/12) 격이라는 당신의 탄식은 이 같은 상황을 드러내주는 말들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전하의 독단적인 태도에 대한 노론의 저항도 거세졌다. “명령이란 명령은 모조리 따르라는 하교는 아마도 십분 지당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의 조정에서도 명령을 거부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라고 반박한(21/6#/11) 예나,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는 못하겠다”(23/3/7)고 저항한 것 등은 이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7.
지금 전하는 그런 노론 벽파들에게 ‘자수’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들이 만일 살고 싶다면 어찌 감히 그처럼 강경하게 고집을 피울 수 있는가?” 종기가 악화될 수 있으니 고정하시라는 약원(藥院) 도제조 이시수의 말이 있었지만, 한번 높아진 옥음(玉音)은 낮아질 줄을 모른다. “아무개가 어디에서 이런저런 작태를 벌인 것에 대해 나도 익히 들은 것이 있다. 엄히 조사하여 한번 행동으로 옮기면 금방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24/06/16)라고 한 것은 좌의정 심환지를 겨냥한 말이다.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심환지를 향해 다시 상이 쏘아붙인다. “경이 하는 일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 같은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달라고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나를 나약하다 생각하고 감히 이렇게 하고 있으나 조만간에 결말이 날 것이다. 비유하자면 종기에 고름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반드시 그것이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지만, 그들이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24/6/16).
갑자기 덮친 종기와 울화병
‘어쩔 수 없이 나서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빨리 시파로 전향해 오라’는 전하의 위협에도 심환지 대감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매한 서민이라도 그 누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또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라고 하여 노회한 방식으로 전하의 추궁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전하는 화를 참을 수 없는지 내약원(內藥院)의 진찰을 받으시라는 대신들의 청도 거절하셨다. 아마도 너희들 벽파와 싸우느니 차라리 옥체에 난 종기와 싸우는 것이 낫다는 뜻일 게다. 그런 전하도 병세가 심해지자 5일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약원의 진찰을 허락하셨다(21일). 종기가 연적(硯滴)만큼 커졌음이 확인되었다(23일).
24일부터는 다른 약들이 효험이 없어서 연훈방(烟燻方)을 써보기로 했다. 그 때문인지 25일에는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에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만 거의 몇 되가 흘러나왔다. 이시수 등은 종기의 근이 녹아내렸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걱정이 되었다. 병환이 심해진 후로 열흘 이상을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데다, 무더운 한여름에 연훈을 위해 방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온갖 장기(臟器)가 수은(水銀)에 중독될 위험도 있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구미가 전혀 당기지 않는다”거나 “입맛이 완전히 변해 찻물도 마실 수 없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실제로 피고름의 실체는 종기의 근이 녹은 게 아니라 “더운 피가 위로 올라와 그것이 터져서 따라나온 것”(25일)으로 밝혀졌다. 다음날부터 전하는 대화하기도 어렵게 되었고(26일), 연훈방을 계속 처방하는 가운데 마치 주무시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었다(27일).
상이 28일에는 영춘헌에 거동하셔서 서정수와 나, 그리고 서용보·이만수를 부르셨을 때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급히 의관에게 진찰하도록 했는데 상께서 “수정전(壽靜殿)” 세 글자를 들릴락말락하게 말씀하셨다. 이때 혜경궁께서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한다”면서 신하들에게 잠시 물러나 기다리게 했다. 혜경궁이 돌아간 다음에, 수정전에 있는 왕대비(정순왕후)의 지시로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올려드렸다.
그러나 약이 입 속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 나오기도 했다. 의관이 진맥을 해보더니 “맥도(脈度)도 거의 끊어진 상태”라고 하여, 모두들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이때 왕대비가 건너와서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 있으라”고 하셔서, 모두들 물러가 문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방 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24/6/28).
전하의 죽음,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무려 82세까지 장수하신 영조대왕을 바로 앞에 모셨던 탓일까. 우리는 상께서 48세라는 결코 많지 않은 나이에, 그것도 겨우 스무 날 사이에 발병하여 돌아가시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정국구도를 밝히시고, ‘10년 구상’을 얘기하던 분이 아니던가. 병환 중에도 당신 스스로 약재를 처방, 조절하시며, 간간이 노론 벽파들을 위협하던 분이 아니시던가.
남인과 경상도 유생들이 심환지 대감을 지목하여, “어약(御藥)을 과도하게 써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고 의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가 노론을 제거하겠다”고(‘순조실록’ 0/9/23) 일어섰다가 진압되었다.
전하가 떠나신 지금, 나는 되묻는다. 상은 1795년 이후부터 당신의 뜻에 부합되는 무리를 “우리 당의 선비(吾黨之士)” “국가를 위하는 편”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속(矯俗)의 대상” “역적의 편”이라(24/5/30) 하여 회유하고 위협하곤 했다.
그런데 당신께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면서도 기어이 받아내려 했던 노론 벽파의 ‘전향’이 당신의 “탕탕평평의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신료들을 속이고, 언로를 차단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당신의 ‘고집’(종친의 보호)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상께서 ‘국가의 편’과 ‘역적의 편’으로 신료들을 나누는 순간, 이미 ‘탕평의 정치’는 설 곳을 잃었다.
편 가르기와 세력 부풀리기를 넘어서서 ‘정치의 중심(皇極)’을 바로세우는 데 ‘탕평정치’의 본령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 그대로 그것은 “텅 빈 거울과 같고 공평한 저울대”(19/10/12)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상께서 스스로 “우리 당의 선비” 편에 들어간다면, 그리고 반대세력을 역적으로 몰아세운다면 누가 거울을 닦아내고 누가 저울대를 조정하겠는가. 전하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 주인 없는 경모궁의 아침이 쓸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