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반민족행위 핵심증거’가 총독부 관제언론 기사?

  • 홍진표│사단법인 시대정신 상근이사 jpho@chol.com│

    입력2010-01-11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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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해 2010년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또한 최근에는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에서 본격화된 이른바 ‘과거사 진상규명’의 수확기가 닥쳐 친일 열풍이 휩쓸고 지나가기도 했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4389명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펴냈고, 그 직후에는 대통령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담은 4부 25권, 모두 2만10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대통령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는 2006년과 2007년에 301명을 수록한 보고서를 냈고, 이번에 704명을 새로 추가했다. 새로 발표한 704명은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이른바 3기(1937~45년)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백낙준 전 연희전문학교 교장,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김성수 보성전문학교 교장, 박영효, 최남선, 유진오, 서정주, 유치진, 김기창, 현제명 등 각계 지도급 인사들이 포함돼 논란이 커졌다.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는 민간단체인 데 반해 반민규명위는 정부기관이기 때문에 그 권위와 영향력을 비교할 수 없어, 마치 사법부의 유죄판결과 같은 강박감을 주게 된다.

    반민규명위에 관한 논란은 그 태생 시점에 관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건국 직후 1948년 10월부터 약 1년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혐의자를 대상으로 총 570건을 특별재판부에 송치했다. 이처럼 근대적 사법제도하에서도 체제가 전환될 경우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사법제도를 초월한 과거사 단죄가 이뤄진다. 혁명적 상황으로 인정되는 이러한 특수 시기에는 소급처벌 같은 초법적 행위가 용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과거사 캐기는 체제 변화나 혁명적 상황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시기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이 같은 이례적인 과거사 캐기가 현실에서 직면한 난관은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과거가 너무 오래되어 정상적인 사법체계의 가동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친일인사 규명은 그 혐의자 대다수가 이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심문을 할 수도 없고 또 변명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위원회가 사료를 찾아 친일인사 여부를 결론내리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몇몇 사람이 국가의 권능을 빌려 당사자의 반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문서만으로 내린 결정의 신뢰성에 관해 의문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친일’이라는 단어는 매우 자명해 보이지만, 엄밀한 잣대를 대려는 순간 그 정의를 놓고 혼란을 피할 수 없다. 흔히 거론되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의 프랑스 점령은 4년에 그치지만, 일제는 무려 34년 11개월에 걸쳐 조선을 지배했다. 그 결과 일제 협력자 외에도 체제 순응자라는 영역이 발생하고, 협력자라는 범주 안에서도 적극성이나 불가피성, 강제성 등 여러 요인이 얽혀 있다. 그동안 역사 연구부터 정치적 비판, 혹은 단순한 욕설을 위해 사용됐던 친일이라는 용어는 국가기관이 개입하는 순간부터 매우 구체적인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가 생겼다. 위원회의 명칭 앞에 ‘친일반민족’이라고 규정했듯 정권 주도하의 친일 규명은 역사 연구의 차원이 아니라 사실상 범죄자를 찾는 사법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반민규명위의 관련법에는 20개 항목에 걸친 친일 규정이 명문화됐다. 예컨대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조항은, 일단 소위 이상 계급에 복무한 사람은 친일 혐의자에 오르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고등문관 이상’이라는 규정도 마찬가지다. 계급이 높으면 친일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특정계급 이하는 논외로 해도 된다는 가설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인간세상의 현실이 이처럼 쉽게 재단될 수 없음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조선인의 처지에서 일제의 폭력성을 완화시킬 여지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군과 관료에 대해 지위를 위주로 친일 기준을 세우면 일제치하에서 고위직에 오르려는 시도 자체가 반민족성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군 장교나 고등문관이 되기 위해 일본인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시험에 합격한 것이 범죄 예비자 관문을 통과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대다수 조선인이 식민지체제에 편입된 조건에서 유독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용의자 선상에 올리는 차별화는 지나친 단순화다.

    이 법의 친일 기준에는 ‘적극’‘주도’‘현저히’‘중심’ 등의 단어가 도합 10회 이상 사용된다. 이른바 주동자, 방조자, 피동자 등을 구분해 엄격함을 견지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차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를 놓고 위원회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폭을 열어준 측면도 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같은 사료를 보고서도 학자마다 각 인물의 역할 정도에 관해 견해 차이가 발생한다. 심지어 최근사인 1987년 6·29선언을 놓고도 그 아이디어를 누가 냈는지, 누가 주도적으로 추진했는지에 대해서 서로 자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존재한다. 그러나 정해진 시한 내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 반민규명위는 이 어려운 문제를 다수결이라는 간단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반민규명위가 펴낸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면 시기를 놓친 친일인사 찾아내기에 대한 우려가 상당 부분 경청할 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증거의 일면성과 빈약함이다. 반민규명위 활동의 대부분은 신문이나 잡지 등의 증거 수집과 104차례에 걸친 회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일제하 관제언론의 신뢰성

    그러나 신문 등 자료의 한계는 오류가능성을 벗어날 수 없고,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각종 전쟁지원단체를 조직하면서 대중 영향력을 고려해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실적 위주의 명의 도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보화시대이자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요즘에도 간혹 시민단체의 성명이나 연대기구 참여와 관련해 명의 도용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심리전을 위한 선전매체로 전락한 전시(戰時) 관제언론이 도덕적 영향력이 높은 사람들의 이름을 빌려 멋대로 작문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반민족행위 핵심증거’가 총독부 관제언론 기사?

    2009년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개최한 친일인명사전(전3권) 발간 기념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수록내용을 보고 있다.

    친일단체와 전쟁지원단체 주도자를 규명하는 일도 문서만으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지금도 많은 사회단체가 명망 있는 인사들을 공동위원장이나 고문으로 추대해놓고 실무자들이 일을 주도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일제하의 관제단체들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음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언론에는 당연히 외형상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기사화되고, 그중에서도 더 알려진 인물이 우선시된다.

    반민규명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 후반기 친일인사로 규정한 사회·문화 분야의 유명인은 예외 없이 여러 단체에 동시에 소속돼 있다. 그만큼 일제에 의해 이름이 이리저리 동원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당사자와 증언자의 부재는 반민규명위가 보도의 공정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일제의 관제언론에 의존해 결론을 내리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반민규명위는 스스로 반민특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홈페이지 연혁란에 이를 표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주관적인 희망에 불과하다. 반민특위는 광복 후 3년 만에 조직되어 사건의 현장에 근접해 있었고, 검찰의 기능만 담당하고 판결은 재판부에 맡겼으며, 당시 기소된 사람들은 생존 상태여서 변론이 가능했다. 반면 반민규명위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서 역사 연구의 사료를 갖고 판결까지 내렸다. 그 명분의 당당함에 비해 방법은 매우 초라했다.

    반민규명위는 관련법에 의거해 조사대상자가 고인일 경우 그 후손들에게 이의신청의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는 당사자 부재의 보완장치가 되기 어렵다. 후손이라고 해서 선대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고, 기록에 의한 반론이 아니면 인정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총 1052명의 조사대상자 가운데 접수된 이의신청이 124건에 불과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사료에 의존한 반민규명위의 작업으로는 일제의 강제성이나 지식인의 고뇌와 같은 생생하고도 중요한 당대의 현실 요소를 고려할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본격화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았다. 이 때문에 식민지 조선은 광복 전 10여 년을 전시체제에 묶여 있었다. 이때 일제는 교육계와 문화예술계의 유명 지식인들을 전쟁홍보에 동원했고, 기왕에 관료가 된 사람들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색지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명단 1005명 가운데 무려 70%에 해당하는 704명이 이 시기에 집중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규명위의 잣대를 들이대면 초야에 묻히지 않고 체제 내에서 삶을 지속했다는 자체가 죄가 된다. 이들 나약한 지식인들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투철한 혁명가나 순교자의 수준을 모두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가혹하고 비현실적이다.

    항일이냐 친일이냐의 이분법은 기업인에게도 적용됐다. 군수품 제조업자와 일정규모 이상의 전쟁지원금을 낸 사람은 자동적으로 친일인사에 포함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의 패전국 전범 처벌과정에서도 기업인들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가해자인 식민지 본국의 기업인들은 단죄되지 않았는데 피해자인 식민지의 기업인들이 그 후손들에게 범죄자로 규정된 것이다. 기업가가 너무 세속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챙겼다는 죄를 물은 셈이다.

    한 시대의 역사에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 개인의 삶 또한 굴곡과 공과(功過)가 함께한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으며, 포용력을 갖고 그의 인생 전반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반민규명위가 친일로 규정한 인사들 중 일부는 한때 항일운동에 앞장섰거나 광복 후 건국과 산업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장기간의 식민체제에 일시 순응하는 행위가 있었다고 해서 이들을 친일인사로 규정하고 나면, 예컨대 백선엽 장군을 6·25전쟁의 영웅으로 존경하면서도 ‘반민족’을 떠올려야 하는 정서적 분열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적주의와 이해관계

    국가권력이 직접 나서서, 발견가능한 문서만으로, 오래된 범죄자를 찾아내겠다는 시도의 약점을 더욱 극대화한 것은 반민규명위의 인적 구성이다. 2005년 5월31일 출범한 반민규명위는 위원장을 포함한 위원 11명이 대통령(4명), 국회(4명), 대법원장(3명) 추천을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 노무현 정부와 가까운 인사가 다수를 차지했고, 위원 임기제 때문에 활동마감까지 그 구도가 바뀌지 않았다. 활동기간 중간에 임기가 만료돼 교체된 위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연임했고, 총 7명이 출범부터 종료 때까지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와의 친화성 여부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그룹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초대위원장 강만길, 2대 위원장 성대경, 위원회 전 기간에 상임위원을 지낸 노경채, 후반기 위원을 지낸 임경석, 김경일 등은 모두 역사문제연구소의 고문 또는 연구위원으로 활동해왔다(역사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따르면 박헌영 전 남로당 당수의 아들인 원경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마치 다수의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를 주심판사를 포함해 한 분파가 장악한 것과 다름없는 이 같은 구도는, 사건 조사와 기소를 담당하는 검찰의 기능과 판결을 내리는 법원의 기능을 양손에 쥔 반민규명위의 권한이 다수결제도를 통해 다시 특정그룹에 의해 독점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나라당 추천으로 활동했던 한 위원은 “토론이나 표결을 하게 되면 늘 9대 2, 또는 8대 3으로 나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반민규명위의 실적을 보면 1052명의 조사대상자 중 46명만이(홍난파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빠졌다) 친일혐의를 벗는 바늘구멍을 통과했다. 이 46명 가운데 9명은 이의신청에 의해 제외된 사람이고, 위원회의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혐의를 벗은 경우는 36명뿐이다.

    위원회를 독점한 그룹은 오래전부터 친일 규명을 활동목표로 삼았다. 강만길 초대위원장은 친일진상규명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반민규명위의 탄생을 추동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진실을 밝히는 데 중점이 있어야 옳다. 그러나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했다”는 그들의 역사인식은 ‘더 많은 악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피하기 어렵다. 억울한 피해자를 가려내야 한다는 세심한 배려가 끼어들기는 어려운 것이다.

    과거사 관련 국가기구가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 바로 이러한 실적주의다. 긴 기간의 정치적 논쟁과정을 거쳐 정권의 핵심적인 개혁과제로 주창된 과거사 파헤치기가 막상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내게 되면 정치적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조직의 이해관계도 발생한다. 어떤 기구라도 일단 만들어지면 그 존재이유를 증명하고자 더 많은 일을 만들어내는 속성을 피하기 어렵다. 법원이 더 많은 유죄 또는 더 많은 무죄를 만들어야 할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과거사위는 피의자의 유죄입증에 이해관계가 있는 검찰 혹은 경찰 비슷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자신들이 직접 판단까지 맡았다는 점에서 문제를 피하기 어려웠다.

    비이성의 극단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대중가수 백년설의 흉상이 최근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반민규명위의 친일명단에 오른 소설 ‘탁류’의 저자 채만식은 이미 고향 군산에서 기념사업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친일 규명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들은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를 주장하고 진상 규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일종의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벌어지고 만다. 예술가의 작품이 모욕당하고, 고인들의 업적인 기업과 학교가 친일 시비에 시달린다. 대체로 경쟁관계에 있는 이들이 이러한 공격에서 적극성을 띠거나 때로는 정파적 이해관계도 얽히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과거사 중에서도 특히 친일이라는 주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논리를 앞서는 정서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비이성의 극단은 친일로 규정된 인사들의 후손에 대한 책임 추궁이다. 수년 전 서울대 총장선거 입후보자가 경쟁자 측에 의해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공격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학자는 이씨라는 이유로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날조된 글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부모가 자식의 과오에 대해 책임을 느낄 수는 있지만 후손이 선대의 행위에 따라 사회적 평가를 받는다면 이는 연좌제나 다름없다. 친일 규명이 이를 악용하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사회갈등을 야기하는 사례들은 과거사 바로잡기가 공동체의 화해와 통합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가설을 비웃는다.

    한국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등 6개 학술단체는 2009년 11월30일 기자회견을 열고, 반민규명위의 활동에 대해 “식민지배를 경험한 민족으로서 일제의 잔재와 협력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정리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지지를 표명했다. 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 국가 주도의 역사 평가 작업이 과연 환영할 만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본질적으로 역사 연구의 자유를 제한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의 자유이며 이를 위해 어떠한 기성의 학문적 권위도 비학문적인 힘에 의해 보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원칙 아니었던가.

    일제강점기에 관한 연구에서도 개방성은 생명 같은 덕목이어야 옳다. 그러나 반민규명위의 보고서는 국가의 개입을 통해 비학문적 정설을 만들어냈다. 학문적인 논쟁이나 추가적인 연구에 맡겨져야 할 숱한 논쟁적 사안이 ‘국가의 결정’이라는 형식으로 못질당했다. 이후 일제시대 연구를 하는 학자가 이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학문적 진보가 처음 형성될 당시에는 이단으로 몰렸다는 역사적 경험을 감안하면, 반민규명위의 탄생에 가장 비통해야 할 사람은 역사학자여야 맞다.

    변화는 대화를 요구한다

    빠르게 변화해온 한국 사회의 특성 때문에 과거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포용력의 빈곤이 새로운 문제가 된다. 아무리 가까운 과거라도 지금과는 다른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면, 현재의 잣대로만 해석하려고 해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봉건왕조 시대에 민주주의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부적절하듯, 과거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처지와 지배적 문화, 고뇌까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다가가야 한다. 친일 문제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의 속도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한국이 그 어떤 나라보다 심한 세대갈등을 겪고 있는 것 역시 과거와 현재가 서로 손가락질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 관용 없는 변화는 진정한 진전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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