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주변을 뜯어고치려는 개발계획이 쏟아져 나온다. 이미 아파트와 빌딩 숲에 익숙해졌음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정서적 풍광이 파헤쳐지는 현실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수백 년 고유의 풍광을 지켜온 산사의 숲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숲 전문가 전영우 교수와 산사의 숲을 거닐다보면, 개발 만능주의가 마수를 뻗지 못하는 신성한 보루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보현암 동편 산록에서 겸재의 시점으로 바라본 해인사 풍광.
겸재가 해인사와 가까운 하양의 현감(1721~1726)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이 부채그림에는 290여 년 전 해인사 풍경이 선면(부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인사의 가을 풍광을 담은 겸재의 해인사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절집의 가람 배치였다. 그림 속 가람 배치는 오늘날의 해인사 가람 배치와 흡사해 가장 위에 자리 잡은 장경판전으로부터 절 입구의 홍하문(紅霞門)까지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겸재의 그림에는 절집 주변의 나무와 숲과 산의 풍광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절집의 누군가에게 겸재의 부채그림을 보여주면 겸재가 그림을 그린 장소를 알려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만일 그 장소만 알 수 있다면, 숲의 변화에 대한 내 궁금증도 바로 풀 수 있기에 궂은 겨울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인사를 향한 것이다.
겸재가 그림을 그린 장소를 대강이라도 짐작해보려고 먼저 그림의 시점(視點)부터 살펴보았다. 그림 속에 나타난 홍하문에서 장경판전이 시곗바늘 방향으로 약 15。기울어진 것을 보면 그림 그린 장소는 건너편 산록으로 추정되었다. 해인사 경내는 물론이고 주변의 부속 암자들의 위치가 사실적으로 그려진 안내도를 참고해 건너편 산록의 암자들을 찾아보니 금선암과 보현암이 유력한 대상지였다. 먼저 금선암을 찾아가봤지만 큰절(해인사)과 너무 가깝고 위치도 높지 않아 제외하기로 하고, 다음 후보지인 보현암으로 향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보현암의 비구니 스님께 겸재의 부채그림을 보여드리고, 그림 속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있는지 여쭈었다. 큰 기대 없이 혹시나 하고 드린 질문이었는데 고대하던 답변이 바로 나왔다. 암자 동편의 능선 길을 따라 10분여 올라가면 그림 속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나의 어림짐작이 맞다니! 기쁜 만큼 발걸음도 빨라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능선 길을 올랐지만 빽빽한 수풀이 시야를 가려 건너편 풍광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느 순간 눈앞에는 겸재의 부채그림에 담긴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졌다. 겸재가 그림에 담은 풍광은 실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새벽같이 절집 숲을 찾아 나선 여정의 고단함이 단숨에 가셨다.
절집 숲은 전통 경관의 보고
우리 산하의 숲이 세월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막연한 호기심과 소망을 겸재의 그림이 충족시켜주었다. 사진 기술이 개발되지 않은 조선 중기에, 조선의 한 천재 화가가 그림으로 남긴 해인사의 풍광을 참고해 숲의 변화된 모습을 추적해보려 한 나의 시도는 다소 무모하기는 해도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겸재의 부채그림을 통해 29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해인사 주변 풍광은 변한 곳도 많지만 변하지 않은 곳도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천수백 년 동안 불교가 우리 문화에 미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다. 불자(佛子) 여부를 떠나 유서 깊은 명산대찰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오랜 세월 동안 지키고 계승해온 소중한 공간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산림 전문가로서 이러한 문화유산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지켜온 산사의 경관이다. 이 땅 대부분의 산사는 천수백 년 전 풍광이 아름다운 명산에 터를 잡은 이래,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려 풍토성이 높은 독특한 경관을 만들고 지켜왔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우리의 도시 경관을 생각하면 이 땅의 산사 경관이 자연유산의 보고라는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서울의 경우 5대 궁궐은 그나마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지켜오고 있지만, 도심은 물론이고 변두리에서도 20~30년 전의 옛 경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농촌의 전통 경관마저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아스팔트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렸고, 농촌 곳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우리의 토속적 풍광, 오래전부터 한국을 한국답게 나타내던 전통 경관이 차츰 사라져가는 실정이다. 따라서 중장년층들이 어릴 때부터 마음에 담아왔던 풍광은 이제 더는 쉽게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주변 자연경관으로부터 정서적, 심리적 영향을 받으며 산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태어나고 아파트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이야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중장년층들은 고향의 옛 풍경을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적 전통에 따라 마을 앞에는 들판과 시내가 흐르고 마을 뒤에는 산들이 펼쳐진 우리의 전형적 경관을 잊지 않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런 풍광 속에서 살아온 우리의 정서적 기억(mindscape)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궁핍한 시절이었을망정 이런 정서적 기억 덕분에 그 속에서 뛰놀며 자라던 그 터전(landscape)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한 나라의 고유한 경관은 그 나라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국민성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주말이면 땀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을 오르는 이유도 우리 정서에 새겨진 옛 경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욕구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정서적 풍광이 점차 사라져가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전통 경관을 고스란히 지켜온 곳이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축복이다. 바로 산사의 숲이 그렇다. 일제강점기의 산림 수탈과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산사의 숲은 비교적 온전하게 전통 경관을 지켜오고 있다. 국토의 개조가 밤낮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산사의 숲은 우리 고유의 풍광을 지켜내는 귀중한 자연유산 또는 전통생명문화유산인 셈이다.
오늘날 절집 숲의 가치와 기능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동시에 확장되고 있다. 산사의 숲이 가진 재래적 기능은 성속(聖俗)을 가르는 차폐 공간, 수행과 명상과 울력의 수도 공간, 구황식량과 산나물과 버섯 등의 임산 부산물과 땔감을 제공하는 생산 공간, 전란이나 화재와 같은 유사시를 대비한 가람 축조용 목재의 비축기지 등이었다. 생태와 환경의 가치가 중시되는 21세기에는 산사의 숲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기능이 대두되고 있다.
생태 소비의 훌륭한 대상
겸재의 해인사도
또한 절집 숲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는 우리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수도자들의 수행과 명상과 울력의 공간으로 한정되던 산사의 숲이 오늘날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가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도심의 공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절집과 그 주변 공간은 스키장이나 골프장, 놀이동산이나 자연휴양림처럼 고가의 장비나 입장료를 부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그 공간과 그 아우라를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이나 온갖 현란한 상업적 광고로부터도 자유로워 한적하고 조용하다. 덕분에 각자의 삶을 내밀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를 안겨준다.
나아가 절집 숲은 역사성을 간직한 콘텐츠의 보고다. 절집이 관리하던 율목봉산(栗木封山)은 종묘와 향교와 공신들에게 제공할 위패를 생산하던 밤나무숲이었고, 향탄봉산(香炭封山)과 송화봉산(松花封山)은 숯과 송홧가루를 생산하던 솔숲이었다. 절집에서 운영하던 이런 봉산은 왕실에서 절집에 산림을 하사하고, 절집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임산물을 생산하는 전통적 산림 이용의 지혜가 담긴 제도다. 아울러 절집 숲은 고승대덕과 나무와 숲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절집 숲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얽힌 아름다운 판타지가 살아 있고, 전설이 전승되고 있으며, 설화가 녹아 있는 공간이다.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해인사 풍경
절집 숲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다. 내가 풍광의 아름다움을 즐긴다고 해서 남에게 돌아갈 즐거움이 줄어들지 않는다. 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 달리 내가 만족한다고 해서 이웃과 친구가 배 아플 일도 없다. 이런 점이 바로 생태 소비, 자연 소비의 특성이다. 따라서 덜 소비하고, 덜 훼손하며, 덜 폐기해야 하는 생태환경의 시대에 절집 숲은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훈련하는 멋진 실습장이 될 수 있다.
법보사찰이 끌어안은 국보급 숲
해인사는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화상이 서기 802년에 창건한 가람이다. 해인사 창건기는 신라 애장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최초의 절집이 세워졌다고 밝히고 있다. 해인사는 한국의 3대 사찰로 일컬어지는데, 부처의 불법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이기 때문에 얻은 명예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삼보사찰은 법보사찰 해인사와 함께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불보사찰)와 수많은 국사를 배출하여 승맥을 잇고 있는 송광사(승보사찰)를 일컫는 별칭이다. 해인사의 위상은 팔만대장경판과 그 판각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국 불교의 성지라는 위상에 걸맞게, 해인사는 국보와 보물 등 70여 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귀중한 국보·보물급 문화재와 함께 해인사가 소유한 산림면적(3253ha)도 상상 이상으로 넓다. 해인사가 이처럼 넓은 산림을 보유하게 된 사연은 희랑대사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 말기에 희랑대사가 왕건의 목숨을 구해준 공덕을 보답하고자, 고려를 건국한 후 태조가 가야산 일대의 모든 산림을 해인사에 귀속시켰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렇게 넓은 절집 숲에서 과연 어느 곳을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을까? 시간이 허락하면 매표소에서 홍류동계곡을 따라 소나무가 가득한 4km의 길을 걷거나, 동서쪽에 자리 잡은 산내 여러 암자를 탐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건각이라면 가야산을 오르며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먼저 경내를 둘러보고, 동편의 지족암과 희랑대와 백련암의 숲길을 걸은 후, 농산정의 솔밭을 찾는 순서를 권하고 싶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다면,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숲길을 걸은 후, 장경판전 뒤편의 솔숲을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1. 경내 숲
1)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진입로 숲
일명 불이문(不二門)이라고 하는 일주문에 이르면, 우리 앞에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뒤로 젖히지 않고는 한눈에 넣을 수 없는 장대한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우리를 맞이한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길 주변의 숲은 1000년 수도 도량의 역사를 그 자태로 뽐내려는 듯 당당하다. 양 길가에 선 아름드리 전나무와 회화나무, 느티나무는 평소 하찮게 보아오던 나무들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함을 갖춘 장엄한 모습이다.
자연이 연출하는 장대함은 우리 각자의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만들고 긴장감을 갖게 한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확인시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숲이 내뿜는 세월의 무게와 신성한 기운을 직접 체험하면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별로 길지 않은 이 숲길에서 우리는 어느덧 수도자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숲이 바로 선종(禪宗)의 정원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더불어 봉황문의 현판에 걸린 ‘해인총림’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길 여유도 누린다. 이처럼 숲은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바꾸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백련사로 오르는 동편 암자의 숲길
2) 장경판전 뒤편의 솔숲
해인사 경내에서 둘러봐야 할 또 다른 숲은 장경판전 뒤편의 솔숲이다. 이 솔숲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해인사의 가장 귀중한 장경판전을 수호신장처럼 옹위하고 있는 형상 때문이다. 장경판전은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경판을 봉안하기 때문에 사격(寺格)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만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판전 건물은 일주문, 봉황루, 해탈문, 구광루(九光樓)를 차례로 거치고 부처를 모신 대적광전(大寂廣殿)을 지나 해인사 경내의 맨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풍수 지식이 짧은 사람도 장경판전 뒤편에 모신 수미정상탑에서 보현암을 품은 건너편 산록을 보면, 해인사가 풍수적으로 얼마나 멋진 터에 자리 잡고 있는지 금세 알게 된다. 가람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장경판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풍수적 해석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아무래도 산림 전문가인 탓인지, 나는 해인사의 상징인 장경판전을 지키는 솔숲으로까지 그 풍수적 해석을 확장하고 싶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겸재의 해인사도에 쏠린 나의 관심은 가람 배치도 가람 배치지만, 그보다는 절집 주변의 풍광에 더 기울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곳이 바로 장경판전 뒤편 솔숲이었다. 해인사도에는 겸재 특유의 T자 형태로 형상화된 소나무들이 장경판전 뒤편 산록에 묘사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장경판전 주변 솔숲이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무성할까? 해인사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를 옹위하는 솔숲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겸재의 해인사도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어쩌면 이런 의문을 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현암 동편 산록에서 해인사를 바라보면서 쾌재를 부른 이유도, 겸재의 그림과 오늘날의 풍광을 비교했을 때 큰절 주변의 풍광은 적잖이 변했지만, 장경판전 뒤편의 솔숲은 변함없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산림
그 이유는 소나무가 생기와 길지를 불러낸다는 믿음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의 말씀을 모신 장경판전의 터는 풍수적으로 해인사 경내에서 최고의 길지(吉地)이고, 그 길지에 생명의 기운을 끊임없이 공급하고자 소나무 숲을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이다. 조상들은 예로부터 생명의 기운(生氣)이 왕성하도록 양택과 음택에 소나무를 식재했다. 소나무로 생기를 얻는다는 믿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왕릉 주변을 감싼 솔숲을 통해 금세 확인된다. 장경판전의 솔숲은 그 전형적 사례인 셈이다.
3) 학사대와 서편 동산 위의 솔숲
해인사 경내에서 잊지 말고 둘러봐야 할 곳은 학사대(學士臺)다. 학사대는 큰 가람마다 전해 내려오는 지팡이 설화의 현장이다. 독성각 뒤편 서쪽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학사대의 전나무(천연기념물 215호)는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거꾸로 꽂아둔 전나무 지팡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학사대에서 언덕길을 곧바로 내려오면 서쪽 동산 위에 아름드리 소나무로 채워진 멋진 솔숲을 볼 수 있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은 간이의자도 마련되어 있으니 이 동산 솔밭에서 잠시나마 소나무와 벗해보는 게 좋다. 마침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라도 듣는다면 해인사 숲을 찾은 목적을 반쯤은 충족한 것으로 여길 만하다.
예술원 회원인 박희진 시인은 별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만 솔바람 소리의 참된 맛과 멋을 음미할 수 있다고 했다. 바람과 소나무가 조우해서 만들어내는 단순한 솔바람 소리에도 우주의 영역으로까지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꽉 찬 머리로는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없다.
2. 동편 암자로 이르는 숲길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큰절만 보고 돌아간다. 큰절이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해인사의 숨은 풍광을 체험하고 한순간이나마 세상사에 얽힌 집착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동편 산록의 암자로 이르는 숲길을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동편 암자의 숲길은 국일암을 거쳐 지족암과 희랑대 순서로 걷는 것이 좋다. 인적이 드문 숲길을 마음 놓고 걷는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국일암 못미처 갈지(之)자로 크게 굽이치는 경사진 길의 건너편 숲 속에선 부도의 고졸함을 감상할 수 있다. 백련암에 이르는 숲길은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우리 고유의 수종들이 만들어내는 풍토성 높은 풍광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이런 숲길에서는 꽉 찬 머리를 비우거나 움켜쥐고 있는 욕심을 놓아버릴 일이다. 어떻게 비우고 어떻게 놓아버릴까? 보현암 동편 산마루를 내려서다 만난 비구니 스님이 그 실마리를 일러주었다. 포행(布行·천천히 걷기)에 나선 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후 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여쭈었다. 스님의 대답은 명료했다. 동안거의 참선 중에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걷는 행위가 바로 포행이라고 했다. 머릿속에 꽉 찬 잡념을 버리는 것을 불가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한다.
용기를 내어, 부질없는 욕심이나 삿된 욕망을 어떻게 버리는지 다시 여쭈었다. 인간의 욕심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종국에 화를 불러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므로 그 집착을 놓아버리는 행위가 바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세속인만큼 크지는 않을망정, 수행자 역시 사람이라 걱정과 집착과 욕심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면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고 새로운 화두를 붙잡는 한편 이처럼 포행에 나선다고 한다.
직업의 특성상 남보다 자주 숲을 찾아야 했던 나 역시 스님들이 포행으로 생각의 고리를 끊고 마음을 비워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곤 했다. 숲(자연) 속에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 순간 그 장소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기쁨, 감동, 즐거움 등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뿐 원색으로 날뛰던 도회의 세속적 욕망(명예와 출세와 물욕)은 쉬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숲이 제공하는 다채로운 변화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은 마치 수행자의 기도와 절과 화두처럼 일상의 삿된 잡념을 잠시나마 비워낼 수 있도록 마음을 순화시킨다. 숲을 찾으려면 먼저 도회의 일상으로 꽉 찬 머리(탐·貪·탐욕, 진·瞋·분노, 치·癡·어리석음)를 비우고, 대신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담을 수 있는 감성의 그릇을 준비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편 암자로 이르는 숲길 중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은 암자는 희랑대와 지족암이다. 희랑대와 지족암엔 해인사의 대대적 중창에 기여한 나말여초 희랑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다. 희랑암이란 명칭 대신에 희랑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연유는 금강산의 보덕굴처럼 기기묘묘한 지세 위에 세운 암자이기 때문이다. 지족암은 두 암자 사이를 가르는 작은 골짜기 건너편 급경사지 위에 자리 잡은 암자다. 따라서 기암괴석과 소나무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풍광의 이들 암자는 상대편 암자에서 바라봐야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에서 바라본 풍수적 지세 못지않게 희랑대의 안장바위에 걸터앉아 원당암으로 내려다본 지세는 풍수에 까막눈인 내게도 좌청룡 우백호, 내수와 외수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기막히게 좋았다.
희랑대에서 활엽수림 속으로 난 길을 500m쯤 올라가면 성철스님이 만년에 주석하신 백련암에 이르게 된다. 백련암에서 희랑대와 지족암을 거쳐, 넓혀진 찻길 대신에 왼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큰절의 선원에 이르게 된다. 가야산 호랑이 성철 큰스님이 학승들의 참선 수도를 독려하고자 매일같이 이 지름길을 따라 백련사와 해인사를 오르내렸을 생각을 하며 오솔길을 천천히 걷는다. 8년 동안 눕지도 않았다는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일화를 간직한 선승의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숲을 거닐다 보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기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숲은 이처럼 선인들을 만나게 해주는 사유의 공간인 것이다. 성철 큰스님이 조계종의 제7대 종정으로 취임하며 발표한 취임 법어는 요즘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이 사방에 두루 비추니 고요한 상태는 사라지며 없어지는 것은 둘이 아니며, 보이는 온갖 세상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요 들리는 소리는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소리인지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여기에 모인 법우님들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을.”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는 이 숲길에서 탄생했을지 모른다. 백련암 고심원 기둥의 주련에 새겨진 성철 큰스님의 열반송(涅槃頌) 또한 산사의 숲을 찾는 이들이 가슴에 새기고 싶을 만큼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닿고 수미산을 덮었다.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고 한 바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렸도다.”
백련암은 해인사의 산속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매화산을 비롯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시야가 탁 트였다. 백련암은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라 일컫는 기암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그 기암들 사이에 아름다운 노송들이 자라고 있어 가야산 제일의 절승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백련암이 400년 전에 중건된 이후로 줄곧 산중 어른들의 주석처였던 만큼 초입의 늙은 느티나무의 풍모마저 의젓하다.
3. 홍류동과 농산정 주변의 솔숲
홍류동 농산정의 솔숲
바위 더미를 미친 듯 달려 첩첩의 산봉우리 울리니/ 사람들의 말소리를 지척 간에도 분별하기 어렵네/ 항상 세상의 시비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산을 둘러막았네.
狂奔疊石吼重密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고운집 권1)
이 시는 고산 최치원이 홍류동계곡에 독서당을 지어놓고 소일할 때 쓴 작품이다. 가야산이 세상의 시비를 싫어해 이 우렁찬 물소리를 산에다 둘렀다고 넌지시 말하면서 자신도 바로 그런 연유로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농산정 주변의 솔숲은 홍류동의 백미라 할 만큼 빼어나게 아름답다. 해인사 숲의 마지막 여정을 이 농산정 솔숲으로 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모든 것을 벗어두고 어느 순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는 고운의 자취처럼 우리도 잠시나마 생활의 묵은 때와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무상무념의 순간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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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숲을 거닐다가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는다. 우리 주변의 절집 숲은 천년의 세월까지 거슬러 올라가 옛 선인들의 체취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구나. 가깝든 멀든 간에 오랜 세월 절집을 지켜온 그 숲은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계속해서 지켜져야 할 그 우렁찬 숲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명문화유산으로서 숲이 인간의 삶에 숨결을 불어넣어가며 땅과 자연의 역사를 이어왔건만, 어리석은 인간이 그 역사의 숨통과 핏줄을 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절집을 지켜온 숲, 숨어서 인간과 사람의 마을을 지켜온 숲, 그 생명유산은 영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