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누각(沙上樓閣)의 신화인가,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시련인가. 두바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UAE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두바이 아부다비 등 7개의 에미리트(아랍어로 왕자, 군사령관을 가리키는 ‘에미르’가 통치하는 지역)가 연합국을 구성했으며, 그중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경제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아부다비 통치자가 UAE 대통령을, 두바이 통치자가 부통령 겸 총리를 맡아왔다. UAE는 영국군이 이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한 직후인 1971년 국가로서 태동했다.
걸프만의 진주
기발한 아이디어와 리더십을 무기로 두바이와 함께 급부상한 두바이 통치자 쉐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2006년부터 작은 토후국을 다스려온 그는 두바이를 세계의 벤치마크로 만들었다. ‘쉐이크’ 는 ‘지도자’‘부족장’ 의 의미를 가졌는데, 보통의 이슬람 종교지도자도 ‘쉐이크’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름의 끝에 있는 ‘알 막툼’은 쉐이크 모하메드의 가문 이름.
알 막툼 가문이 두바이의 지도자 가문으로 등장한 것은 쉐이크 막툼 빈 부티 알 막툼이 아부다비에서 독립해 800여 명의 부족민을 이끌고 두바이로 이주한 1833년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알 막툼 가문은 지금의 아부다비 남쪽 리와 오아시스 지역을 근거지로 삼은 바니 야스(Bani Yas)족의 알 부 팔라사(Al Bu Falasah)계에서 나왔는데 아부다비의 통치자 가문인 ‘알 나흐얀’과 뿌리가 같다.
두바이는 바다를 끼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에도 중계무역항으로 이따금 등장한다. 1930년대 일본이 진주 양식에 성공하기 전까지 두바이에선 진주 채취 산업이 번성했다. 하지만 양식 진주가 시장에 쏟아져 들어온 뒤로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그러다 1950년대 영국이 두바이를 이 지역의 중심으로 선택하면서 각종 인프라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두바이는 1966년 유전을 발견했으나 매장량이 아주 적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두바이는 항만 건설에 주력했다. 아라비아 반도 끝에 위치했다는 점을 활용해 중동과 이란, 아프리카, 인도를 연결하는 허브가 되겠다는 구상을 세운 것이다. 그 성과로 1972년 ‘쉐이크 라시드 항구’가 문을 연다. 이후 규모가 더 큰 ‘제벨알리 항구’가 완공되면서 두바이는 중동의 허브로 도약할 토대를 마련한다.
1985년 두바이는 제벨알리 항구 주변을 무관세 지역(Free Trade Zone)으로 지정해 중동지역으로 가는 상품이 두바이를 거치게끔 유도한다. 제벨알리 항구는 무관세 지역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하늘길이 처음 열린 때는 1961년. 두바이 공항은 현재 이용객 수 기준 세계 7위. 두바이가 중동, 아프리카의 교통 허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상 최고의 도시
두바이 증권거래소 객장에서 시황을 보고 있는 투자자.
전세계는 두바이의 개발 프로젝트를 ‘아라비안 나이트’‘신밧드의 모험’처럼 신기하게 여겼다. 두바이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석유가 부족한 두바이는 과감한 개방 정책을 택했다. 중동 국가 중 가장 개방돼 있다고 보면 된다. 또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뛰어난 마케팅 수완을 보여줬다. 세계 경제 활황과 더불어 투자가 몰려들면서‘두바이 신화’란 말이 회자됐으며 두바이는 ‘중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신화의 뒤편엔 그늘이 있었다.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남의 돈을 너무 많이 빌려 쓴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강펀치를 맞은 두바이는 최근 두바이월드가 지급유예를 선언하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두바이의 한 시민이 메르세데스 벤츠 매장에서 승용차를 구경하고 있다.
두바이 시내의 쇼핑몰도 세계적 규모를 자랑한다. 축구장 50개 크기와 맞먹는 세계 최대 규모의 쇼핑센터 두바이몰이 최근 문을 열었고, 이외에도 실내스키장과 짝을 이룬 에미리트몰, 이집트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와피몰 등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쇼핑몰들은 UAE 각 지역에서 온 쇼핑객뿐 아니라 유럽인 관광객, 두바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로 넘쳐난다. 가족 단위 쇼핑객이 많은 게 두바이 쇼핑몰의 특징이다.
두바이의 자연 환경은 모래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두바이는 땅 밑에 관을 파묻어 시내의 풀과 나무를 관리한다. 땅을 깊게 파도 푸석푸석한 모래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기온이 50℃, 습도가 90%까지 오른다. 이처럼 척박한 환경을 지닌 터라 여름철엔 야외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한여름에도 완벽한 냉방을 제공하는 대형 쇼핑몰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놀았다.
두바이에 처음 온 사람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은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대부분이 UAE 국민이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사람이라는 점이다.
2006년 실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UAE는 노동력의 90%가 외국인이다. 이는 다른 걸프지역 국가보다 크게 높은 비율이다. 또한 전체 인구 500만명 중 외국인이 80%를 차지하는 기이한 인구구조를 가졌다. 자국민보다 외국인이 많은 것은 걸프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두바이는 그 정도가 특히 심하다.
외국인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까닭에 두바이는 안정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UAE 국적은 ‘금수저’에 비견되곤 한다. 국민을 배부르게 하는 게 국가의 목표인 터라 두바이는 고용안정, 보조금 혜택, 복지제도가 굉장히 잘 꾸려져 있다. 그러나 금수저를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외국인이 UAE 국적을 얻기는 상당히 어렵다. 두바이를 포함한 UAE에 30년 넘게 거주한 이들 중 극히 일부만 국적을 취득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외국인이 UAE 국적을 얻더라도 두바이 원주민이 받는 금전적·비금전적 혜택의 대부분을 누리지 못한다. 외국인은 영원히 이 사회에서 이방인인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시스템은 앞으로 두바이가 직면할 불안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두바이에 살다보면 신기한 게 참 많다. 신경을 써서 지은 건물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롤렉스, 오메가, 보메 메르시에 등 사치품 브랜드의 벽시계가 걸려 있다. 벽시계가 롤렉스라면 부자들은 어떤 시계를 손목에 찰까? 쇼핑몰에 가면 파텍필립, 브레게 같은 고가 시계 매장이 즐비하다. 1대당 1500만원이 넘는 휴대전화를 파는 베르투(VERTU) 매장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바이를 비롯한 중동지역 사람들의 과시욕에 기인한다. 두바이 시내엔 벤츠, BMW, 벤틀리 같은 고급차가 즐비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재생 타이어를 사용하는 예가 많다. 재생 타이어는 두바이에서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최고가 제품이 잘나가지만 최저가라야 잘 팔리기도 하는‘가격에 민감한 곳’이 두바이다. 최고가, 최저가 제품이 시장에서 공존하는 모습은 ‘급격히 발전했으나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듯한’ 두바이의 현주소를 압축해 보여준다.
부동산에서도 극단적인 이중성이 나타난다. 겉모습은 멋지지만 속은 엉망인 경우가 많다. 눈에 띄게 질이 떨어지는 내장재를 썼거나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이 허다한 건물이 많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일 때는 이렇듯 겉과 속이 딴판인 집과 사무실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부동산업자와 함께 집을 둘러보는 10분 사이에도 그 물건을 임차하려는 사람들의 전화가 걸려올 만큼 수요가 많았다.
꼭대기거나 바닥이거나
두바이의 마천루 숲.
한국에선 필수품 격인 내비게이션이 두바이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길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장착된 소프트웨어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도시 개발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호시절은 금융위기로 끝났다. 자금줄이 끊기면서 다수의 개발 프로젝트가 취소됐으며 2009년 초부터 건설 경기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한국엔 두바이의 부동산 및 건설경기가 바닥으로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선 밤새워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메트로(지하철)도 2009년 9월 개통했다.
사막에 그림을 그리는 데는 능했으나 기초체력 격인 물감이 부족했다고나 할까? 축적 자본이 부족한 두바이는 외부 자본에 의존해 개발에 나섰다가 내실에 비해 거품이 심한 상황에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어느 나라든 개발의 이면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두바이는 사정이 조금 달라 보인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비단 건물뿐이 아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내실은 부족한 게 두바이가 아닌가 싶다. ‘겉만 번지르르한 곳’이란 표현이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타고난 상인 기질
두바이가 야심차게 건설한 야자나무 모양의 거대한 인공섬‘팜 아일랜드’.
제조업 발달은 부진하다. 정부 차원에서 제조업 육성에 나섰지만 세계시장에 내놓을 만한 제조업체와 상품이 전무하다.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처지다. 이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기질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연환경이 척박한 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아라비아인들은 과거에도 생산보다는 상업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동방의 진귀한 물품을 유럽에 판매해서 먹고산 것이다.
두바이에선 지금도 시간과 노력을 꾸준히 투입해야 성과가 나타나는 제조업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물건을 또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부를 창출하는 걸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두바이는 아라비아인의 상인 기질을 듬뿍 물려받았다.
두바이의 미래가 암울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두바이는 자신들만의 강점을 활용한 개발 노하우를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1985년 제벨알리 항구를 완공한 뒤 물류·운송·항공 허브를 구축한 것은 두바이의 저력을 보여준다. 비슷한 입지를 가진 걸프 연안국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투자를 꺼릴 때 두바이는 과감한 투자를 통해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무모하다고 할 만큼 공격적인 방식으로 시장을 선점해나갔다. 수요를 보고 인프라를 구축한 게 아니라 인프라를 구축해 수요를 끌어오는 역발상으로 타 국가들보다 앞서나간 것이다.
한동안 두바이 경제를 떠받쳐온 건설과 부동산 부문에선 과거와 같은 활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바이가 자체 자본 동원에 한계를 보이자 투자자들은 두바이를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아이디어 위주의 개발 사업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각 변동 : 아부다비의 부상
2009년 이후 UAE의 건설시장은 아부다비 쪽으로 중심축이 넘어갔다. 서구 자본의 관심도 아부다비로 집중하는 형편이다.
친척 격인 두바이가 전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아부다비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묵묵하게 기초체력을 키워왔다. 아부다비는 고유가를 이용해 오일머니를 축적했으며 자산규모가 7000억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국부펀드를 굴린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지간이지만, 미묘한 긴장과 선의의 경쟁을 벌여왔다. 석유와 자본력을 가진 게 아부다비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아부다비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종합 도시건설 계획인 ‘플랜 2030’과 녹색 친환경도시 건설을 목표로 한 ‘마스다르 시티’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도 아부다비는 신규 개발 수요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두바이는 형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아부다비가 두바이월드 지급유예 사태와 관련해 두바이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 아부다비 앞에서 두바이가 체면을 제대로 구긴 것이다. 두바이는 물류 허브와 개방화를 중심으로 재도약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