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양극화 순위, 미국 제치고 한국 1위
승자독식 대통령제, 사생결단식 경쟁체제로 변질
표 싹쓸이 이유가 지역주의? 정확히는 ‘지역 이익’!
투표로 인적 물갈이 이뤄지는 ‘정치 만능’ 현상
승자독식 전쟁서 ‘내로남불’은 기본, 음모론도 불사
언론은 양극화 장사꾼의 매파… ‘정치 예능’ 심화
양극화에 천부적 재능 가진 지도자가 높은 지지
정치 양극화, 언제까지 욕하면서 사랑할 텐가
![2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b6/cc/01/67b6cc010945d2738276.jpg)
2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같은 날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앞에서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b6/cc/2e/67b6cc2e1792d2738276.jpg)
같은 날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앞에서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세계 1위가 된 한국의 ‘정치 양극화’
미국은 정치 양극화가 매우 심한 나라이지만, 미국보다 더 심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2023년 7월 국회미래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 ‘한국의 정치 양극화: 유형론적 특징 13가지’(박상훈 연구위원)에 따르면, 정치 양극화의 13가지 특징은 ①극단적 당파성에 따른 무책임한 정당정치 ②정당 내 파벌 양극화 ③정책이나 이념적 차이보다 권력 이슈로 갈등하는 정치 ④공존과 협력을 어렵게 하는 혐오의 정치 ⑤법안 폭증과 과도한 입법 경쟁 ⑥대통령 의제가 갖는 과도한 지배력 ⑦대표되지 않는 사회갈등 ⑧정당의 낮은 자율성 ⑨열정적 지지자와 반대자가 지배하는 정치 ⑩소수 지배의 강화 ⑪여론 동원 정치의 심화 ⑫양극화된 양당제의 출현 ⑬추종과 혐오의 팬덤 정치 등이다.
이 13가지 유형론적 특징이 잘 보여주듯이, 정치 양극화는 재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를 망가뜨린다. 그래서 정치 양극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이들이 비판한다. 모두가 원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사라지거나 쇠퇴할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질 않다. 오히려 더 심해지면서 번성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아닐 수 없다. 정치 양극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최근 진단이나 견해 7가지를 감상한 후에 그 불가사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 지금 한국 정치의 제1 과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최대 숙제는 정치 양극화다. 이렇게 가다가는 도저히 저쪽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망하기만 바라고 헐뜯다가 공멸할 것이다.(문희상 전 국회의장, 조선일보 2023년 1월 5일)
2. 한국의 정당들은 강성 지지층에 의해 포획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 ‘○○○부대’라 불리는 조직화된 소수가 의사결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됐다. 부정적 당파성 및 정서적 양극화가 깊어졌다.(이철희 정치평론가, 한겨레 2024년 3월 15일)
3. 미국의 퓨리서치센터에서 정치적 성향 차가 정서적 양극화로 이어지는 국가별 순위를 매년 집계했는데, 그동안은 미국이 1위였으나 현재는 한국이 1위다. 왜 투표했냐고 물었을 때 ‘이 후보가 좋아서 투표했다’면 문제가 없는데, ‘찍고 싶은 후보는 없지만 이 사람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네거티브 보팅의 비중이 한국에서 절대적으로 늘어난 것이다.(장우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경향신문 2024년 5월 11일)
4. 미국을 압도하는 양극화 수준을 보이는 한국에서 … 이제 어느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성공한 대통령은 나올 수 없다.(한규섭 서울대 교수, 동아일보 2024년 6월 11일)
5. 대통령 탄핵에도 불구하고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온 정파적 양극화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 인물만 바뀐 채 지난 10여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극단적 분열과 소모적 갈등이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는 또다시 정치의 덫에 걸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강원택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2024년 12월 17일)
6. 국민의힘이 변화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배신하고도 살아남을 방법은 딱 하나, 정치 양극화에 의존하는 것이다.(이대근 칼럼니스트, 경향신문 2024년 12월 24일)
7.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여야의 정치 환경 때문에, 윤석열의 도발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박상훈 정치학자, 중앙일보 2025년 1월 7일)
“양극화 주술에서 빠져나올 인센티브가 없다”
한국 역시 미국처럼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의 양극단에 있는 이들도 현 상황이 양극화된 상태이며, 그것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데엔 이견이 없다. 앞서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모두가 원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사라지거나 쇠퇴해야 함에도 왜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면서 번성하고 있는가. 한 걸음 더 들어간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정말 진심으로 정치 양극화에 반대하는가. 혹 ‘내로남불’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 편은 무슨 짓을 해도 정치 양극화와 무관하지만, 상대편이 하는 일은 무엇이건 정치 양극화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 그게 진실이다. 정치 양극화를 바꿀 수 있는 대안 모색은 꽤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렇다 할 힘이 실리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간 제시된 대안은 1.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 2. 다양성 보장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 3. 양극화 습속에 찌들지 않은 인력 충원을 위한 세대교체 등이었다. 하나씩 예를 들어 살펴보자.
1.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 고려대 교수 정재관은 “정치 양극화 극복을 위한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제목의 세미나 발표를 통해 현행 권력구조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정치 양극화 문제를 악화시켜 한국 민주주의 퇴행의 제도적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출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는 ‘지면 감옥 간다’는 사생결단식 경쟁 체제로 변질된다”며,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2. 다양성 보장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 연세대 교수 최아진은 “대통령제와 양당제가 결합하면서 정치 양극화가 가속화한 측면이 있다”며 “궁극적으로 다당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다당제를 하기 위해서는 소선거구제에서 중선거구제로의 변화 등 선거제도 개혁이나 정치문화 개선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3. 양극화 습속에 찌들지 않은 인력 충원을 위한 세대교체: “전문가들은 한국이 당면한 난제를 해결하려면 올해 총선에서 여야 모두의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고 봤다. 과거의 문법에 매달린 정치인들을 교체하지 않고서는 극단적 양극화 등 한국 정치의 병폐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조선일보 김태준 기자, 2024년 1월 1일)
이런 대안들은 대체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이견도 없진 않다. 예컨대, 승자독식인 소선거구제가 정치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에 대해 민주당 의원 김한규는 이런 반론을 폈다. “동의하지 않는다. 소선거구제의 장점이 있다. 51%를 얻으려면 30%에 해당하는 중간지대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덜 극단적인 정치를 이끄는 측면도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30%의 지지층 표만 얻어도 당선되기 때문에 지금보다 선명성 경쟁을 더 할 수 있다.”
이런 이견은 본격적 논의 과정을 통해 해소할 수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각 대안에 대한 정당 간, 정당 내에서의 계파 간 이해득실이 달라 합의에 기반한 강력한 추진 동력을 얻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양극화의 다른 요인에 대해선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로 대변되는 디지털 혁명은 늘 양극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선 수용자들이 ‘미디어 리터러시’ 등으로 무장해 스스로 알아서 대처해야 할 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환경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렇듯 양극화의 대안은 약한 반면 동력은 매우 강하다. 서울대 교수 유홍림이 잘 지적했듯이, “열렬 지지층을 갈망하는 정치인들, 시청률과 클릭 횟수에 촉각을 세우는 언론이나 뉴미디어, 권투 시합을 응원하듯 정치 무대를 관람하는 유권자들 모두 정치적 양극화의 주술에서 빠져나올 인센티브가 없다.”
유권자는 정치인의 농간에 휘둘리는 바보인가
게다가 우리는 정직하지도 않다. 양극화의 원인이 유권자에게 있는 경우에도 정치인을 탓하는 쉬운 길을 택한다. 유권자는 어떤 선택을 하건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정치인의 언행이 결정되는 게 현실임에도 말이다. 지난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대구·경북 전 지역구(25석)를, 민주당은 호남 28석을 싹쓸이했건만, 이마저 정치인을 비난할 이유가 된다. 유권자의 일상적 삶에선 지역주의가 사라졌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건 정치인들이 정치를 분열주의로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는 유권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유권자가 지역 몰표로 어떤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는 따져보지 않은 채 그들을 정치인의 농간에 휘둘리는 바보로 여기는 게 무슨 유권자 존중이란 말인가. 일단 유권자를 탓해야 그들이 왜 그러는지 심층 분석으로 들어가 진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모두 다 “유권자는 착하지만, 정치인은 나쁘다”는 주술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양극화를 촉진하는 여론조사는 흘러넘치지만,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는 유권자를 대상으로 그 이유를 묻는 여론조사는 없다. 여론조사는 출구가 없는 갈등의 회로를 만들어놓고 그 회로에 갇힌 사람들의 일희일비(一喜一悲)를 숫자로 바꿔 팔아먹을 뿐, 그들을 회로에서 해방시켜 진심을 털어놓을 기회를 제공할 뜻이 없다. 이런 ‘유권자 모독’부터 깨부숴야 정치 양극화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도 열리지 않을까.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2024년 4월 10일 서울 동작구 성남고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사무원들이 개표하고 있다. [뉴시스]](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b6/cc/f0/67b6ccf01e15d2738276.jpg)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2024년 4월 10일 서울 동작구 성남고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사무원들이 개표하고 있다. [뉴시스]
겉으로 드러난, 또는 드러나기 쉬운, 정서나 생각을 수치로 측정해 발표하는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는 상대편에 대한 반감을 키움으로써 정치적 양극화를 촉진할 뿐이다. 그 정서나 생각의 근원까지 드러내거나 시사해야 양극화 자체뿐만 아니라 그 해법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다. 정치적 양극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게 승자독식이라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승자독식은 이상하게도 선거제도와 관련해서만 논의될 뿐 그것이 광범위하게 유권자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매우 약하다.
아니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건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정치적 생각과 의지가 궁극적으로는 이익과 관련된 것임에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국가·국민·민주주의 등과 같은 큰 대의를 부르짖어야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동시에 자신이 돋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가 옳고 그름의 차원으로 환원됨으로써 의견 일치의 접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국민의힘은 대구·경북 전 지역구(25석)를, 민주당은 호남 28석을 싹쓸이 한 4·10 총선 결과를 다시 음미해 보자. 이런 싹쓸이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감정? 아니다. 지역주의? 애매하다. 지역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역 이익’ 때문이다. 물론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생겨난 맹목적 정서나 관성 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것마저 따지고 보면 이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남의 경우, 이는 약 30년 전 ‘김대중 몰표’ 현상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땐 민주화라는 뚜렷한 명분과 더불어 호남 차별로 인한 한(恨)이라는 게 있었지만, 지금은 명분이나 ‘한’과는 좀 다른 이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익 추구가 더는 피해를 보지 않겠다는 방어적 성격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호남이 영남 출신 노무현과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데 이어 또 영남 출신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 김대중이라는 ‘거물’이 사라진 호남의 정치적 열세를 넘어서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하지만 이런 지역적 몰표 현상은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연쇄효과를 낳음으로써 정치 양극화의 극복을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의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다수 국민을 ‘양극화’로 끌고 가는 ‘승자독식’
선거에서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투표를 하는 건 자연스럽거니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이익이 계급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역적인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한국인 전체의 책임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사라졌지만, 정권의 이익 분배 방식은 구태의연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당위가 아닌 현실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정치는 원칙의 경쟁으로 위장하는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선거에서 이긴 정권의 이익 분배는 인사와 예산을 통해 잘 드러나지만, 그 효과는 정치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심지어 중간지대 역할을 해야 할 시민단체·지식인에서부터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영 패거리를 지어 ‘밥그릇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어떤 정권, 어떤 지방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정치적 가치와는 무관한 곳에서까지 인적 물갈이가 이뤄지는 ‘정치 만능’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정치와 직간접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수백만 인구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아니 그 이상이다. 기존 승자독식 체제는 한국 특유의 연고 네트워크와 결합하면서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양극화 소용돌이’로 끌고 들어간다.
진영 논리의 본산은 승자독식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정당이다. 거대 정당들은 서로 원수처럼 싸우지만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일에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 협력을 잘한다. 이들은 정당의 힘을 키우기 위해 온 사회를 정치판으로 만든다. 한국에서 실제로는 중도의 비중이 꽤 높음에도 중도가 지속적 정치세력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거대 정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영향력·자리·계급을 보장받는다는 걸 반세기 넘게 보아온 집단적 학습효과다. 입으론 무슨 미사여구를 늘어놓건 거대 정당들이 암묵적으로 사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늘 단순명료하다. “우리에게 줄 서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한국처럼 정치 과잉인 나라에서 그 메시지는 절대 어겨서는 안 될 철칙이 되고 만다.
공익적 목적을 위해 진정한 의미의 참여를 원하는 사람일지라도 정당에 줄을 서지 않고선 기회를 얻기 어렵다. 각종 공적 조직의 대표, 이사, 위원의 문호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걸 전제로 만인에게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진영에 대한 충성도와 친밀도로 결정된다. 정당의 힘을 빌려특정 자리를 차지했더라도 자신의 독립적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이론적으론 열려 있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다. 한국에선 자주 ‘법’보다는 ‘문화’가 더 무섭다.
줄서기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는 무관하지 않으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질 않다. 민주화로 이른바 ‘TK 패권주의’가 큰 타격을 받았을 때 TK의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건 그간 자연스럽게 용인돼 왔던 수준의 청탁이나 정보 획득을 위해 전화할 수 있는 곳이 사라졌거나 크게 줄어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병원 청탁 문화가 아직 건재하듯이,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런 청탁을 ‘사람 사는 정(情)의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즉 ‘일상적 삶의 정치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 하는 건 그들의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양극화 장사꾼’에 너그러운 언론
미국의 승자독식이 악명 높다곤 하지만, 한국의 승자독식은 미국의 승자독식보다 훨씬 더 심하고 악성이다. 미국은 주(州)마다 정치체제와 방식이 다른 연방제 국가라 승자독식의 완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초강력 일극주의 국가로 어떤 완충 효과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자독식 전쟁에서 이성과 양심은 독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내로남불’은 기본이고, 마타도어와 음모론도 불사해야 한다.
지지자들까지 그런 전쟁에 참전하게끔 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상대편에 대한 증오·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 언론은 논평을 통해선 그런 ‘증오 마케팅’을 비판하지만, 보도의 형식을 빌려 열심히 중계한다. 그게 독자들의 클릭 수를 높일 수 있는 첩경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른바 ‘양극화 장사꾼(polarization entrepreneurs)’에게 너그럽다. 그들의 과격 발언이나 정략적 독설을 보도의 형식을 빌려 또 한 번 팔아먹는 매파 노릇을 함으로써 한국 정치를 누가 더 강심장이거나 후안무치(厚顔無恥)인지를 겨루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구경하는 재미는 뛰어나다곤 하지만, 그건 정치의 죽음을 희생으로 삼은 잔혹한 ‘정치 예능’인 셈이다.
그러나 일부 열성 지지자들을 제외하곤 유권자들이 그런 ‘증오 마케팅’에 일방적으로 놀아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승자독식 전쟁’의 결과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가장 중요한 게 지역적 이해득실의 문제다. 지역감정까지 가세했던 과거에 비해선 훨씬 나아졌다곤 하지만, 지역주의적 투표 성향이 여전히 건재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그런 이해관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순 없기 때문에 상대편 정당을 욕하고 싫어하는 증오·혐오의 표출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안무치는 장점이다. 승자독식 당파싸움이 불러온 정치적 양극화 때문이다. 지지자들이 반대편 사람들을 증오하는 상황에선 우리편의 후안무치는 악덕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된다. 후안무치 실력이 뛰어난 정치인일수록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으며 스타 반열에 오른다. 이걸 본 다른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누구 얼굴이 더 두껍나” 경쟁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이런 ‘후안무치 정치’는 국민의 인성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그 나름의 대비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모든 정치적 갈등을 선(善)과 악(惡)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면 간단히 해결된다. 악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반드시 청산해야만 한다. 청산 대상을 악마화하면 청산 주체의 후안무치는 정의로운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후안무치가 나쁘다는 정도의 분별력은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건 없지만, 그런 선악 이분법에 장기간 중독된 사람은 인성마저 변하기 마련이다.
보수도 진보도, 승자독식의 노예가 된 나라
우리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미련할 정도로 과도한 승자독식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중앙의 지방 식민지화 덕분에 성공한 나라라서 그런가.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독재정권의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승자독식 자체를 문제 삼는 법은 거의 없다. 게다가 승자는 독식만 하는 게 아니라 패자에 대한 보복도 잘한다. 그래서 대선은 열정의 수준을 넘어 목숨을 건 전쟁이 되고 만다.![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건의하며 눈물을 닦는 참석자를 보고 있다. [뉴시스]](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b6/cd/10/67b6cd1021a4d2738276.jpg)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건의하며 눈물을 닦는 참석자를 보고 있다. [뉴시스]
그 순간엔 감동적이었겠지만, 쇼치고는 ‘저질 쇼’였다. 오늘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가 어떻게 됐는지 포털에서 검색해 보시라. 그건 명백한 사기극이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더더욱 불가능한 꿈이다. 정규직이 모든 걸 독식하는 관행에 브레이크를 걸고 비정규직에 훨씬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끔 하는 게 현실적 해법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이걸 인정하거나 수용하지 않는다. 대부분 정규직이 되겠다는 꿈만 꾸니, 권력도 사기 치는 줄 알면서도 그걸 정책으로 팔아먹는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꿈을 지향하면서 “승자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먹고살게만 해달라”는 외침엔 ‘노력하라’거나 ‘기다리라’는 답만 해줄 뿐이다. 정규직의 고용안정성과 비정규직의 고임금을 양자택일할 수 있게 한다면,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절규하는 사람은 사라지거나 크게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작게나마 나눠 먹는 꿈을 꾸기보다는 고용안정성과 고임금을 동시에 누리는 승자독식을 꿈으로 삼으면서, 그걸 개혁이요 진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한국과 같은 초강력 중앙집중 체제에선 다수결에 의한 승자독식을 기반으로 삼는 정치의 속성이 최악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익 배분이 ‘죽느냐 사느냐’라는 이분법에 의해 이뤄지는 곳에서 타협은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이치를 미국의 사회운동가 사울 알린스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문제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져야만 사람들은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100% 천사의 편에 있으며 그 반대는 100% 악마의 편에 있다고 확신할 때 행동할 것이다. 조직가는 문제들이 이 정도로 양극화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어떤 이슈건 싸우는 양쪽의 정당성 비율은 ‘6대 4’이거나 ‘7대 3’ 정도이건만, 양쪽 모두 지지자 동원을 위해 ‘10대 0’의 싸움처럼 선명한 편가르기를 시도하는 게 정치의 기본 문법이 되고 말았다. 즉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아예 타협의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는 식의 전선을 형성하는 게 버릇이 됐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버릇이나 습속에 의해서건 이익을 위해서건 정치 양극화는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됐으니 말이다. 우리는 그걸 욕하면서도 사실상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니 정치 양극화로 몰아가는 데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지도자로 높은 지지를 누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윤석열이 정치 양극화의 저주로 몰락한 건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만, 누가 또 그 뒤를 이어 양극화의 기수로 나서 큰 재미를 본 후에 나라를 망가뜨릴 것인가. 그걸 지켜만 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가.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外

신동아 3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