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구자가 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1960년의 4월혁명이다. 그 이전까지는 고시에 응시해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에 취직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던 가난하고 평범한 농촌 출신 학생에 불과했는데, 4월혁명이 나를 사회에 대하여 눈뜨게 했다. 다시 말하면 4월혁명을 계기로 소시민 생활을 지향하는 인간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정치적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인간이 소시민적 인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 한순간에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의 계기는 한순간에 주어질 수 있다 해도, 그 변화를 굳히는 데는 생활상의 변화를 동반해야 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전쟁 이후의 학생운동은 4월혁명이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정치적 각성은 4월혁명으로 촉발되고 학생운동 속에서 성장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류인 학생운동은 1961년의 군사혁명으로 시작된 근대화운동보다 선행했다. 그럼에도 학생운동은 근대화운동이 주어짐으로써 그 방향을 잡을 수가 있었다. 학생운동은 그 자체로서는 제대로 된 ‘국가 건설의 비전’을 갖지 못하고, 기존 정권의 체제적 결함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운동의 주된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 학생운동의 성격은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 식민지하 독립운동의 기본 성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현채 선배와의 만남
하여간 정치적 인간이 된 내가 쉽게 학생운동에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니, 학생운동에 말려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앞장서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 이전에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공부밖에 모르던 학생이 4학년 내내 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냈다. 나는 모교의 교수가 된 이후에도 나이가 50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 운동에 관여해 왔다. 이른바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서.
그러나 나는 그다지 ‘정치적’이진 못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어본 일이 없다. 좋게 말해 운동의 구성원이나 조언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 운동에 대한 내 관심은 남다른 바가 있어서 항상 이 운동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이 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은 운동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지적 탐구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이 본래 관리나 회사원을 지망하던 나를 연구자로 변신케 했다.
나는 1962년에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그 무렵은 마침 4월혁명과 군사혁명 직후여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데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4월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격랑 속에서 대학 교원 자리에 많은 공백이 생겼고, 군사정권이 근대화정책을 시작하면서 연구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던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아니지만, 이때에 비로소 연구소라는 게 생기기 시작해서 대학원생에게도 밥벌이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던 해에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연구소에 조수 자리를 얻어 3년간 근무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나는 막연히 연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국의 장래에 대한 것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은 강렬했지만, 막상 어떤 분야를 전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던중 나는 우연히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의 조수 공모장에서 박현채(朴玄埰) 선배를 만났다. 박선배는 내 인생에 있어 결코 잊지 못할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를 통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박선배가 나의 인생행로를 바꾸어놓았다고 착각하는 일이 많다. ‘착각’이라고 한 것은, 지금 회고해보면 내 인생행로는 스스로의 생활리듬에 따라 정해졌다는 것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영향으로 나의 학문적 진로를 결정했다면 나는 결코 한국근대사를 전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미친 영향은 나로 하여금 마르크스 경제학에 눈뜨게 하는 데 그친 게 아닌가 한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면서 한국 근대경제사 연구를 지향한 것은 결국 본래의 관심, 즉 한국의 장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1965년 11월에 한국경제사 전공으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한국경제사 전공자로서 발령받으려면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아시아문제연구소 조수로 있는 동안 했던 일제시대의 무역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대신했다.
그후 이 방면에 관한 연구로서는 일제시대의 국제수지와 자본 유출입에 관한 연구가 있지만, 다시 읽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글일 뿐이다. 국제수지나 자본에 관한 개념도 명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료의 수집과 정리도 너무나 조잡했다. 그래도 그것이 독자들의 주목을 조금이나마 끌 수 있었다면 거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는 강렬한 민족주의 의식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주의 연구로 外道
나의 첫 연구가 그렇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한국경제사라는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스승 중에도 한국경제사 전공자는 없었다. 당시 한국경제사에 관한 교과서나 연구서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변변한 것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 나아가 당시의 대학에는 전공을 무엇으로 정하며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일정한 관행이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암중모색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학계의 형편이 그러한 가운데 나의 연구 관심은 일제시대의 무역과 국제수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로 전환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제사 연구자의 어처구니없는 외도(外道)지만, 당시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한국의 장래에 대한 지적 욕구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단순한 비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전공은 역사학에 두었지만 한국이 장래에 지향해야 할 국가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가 학문적 관심의 출발점이었다. 지금도 이러한 관심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학문과 현실을 너무 직접적으로 연결해 버렸다는 논리적 결함에 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단재 신채호(申采浩)의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였다. 우리나라의 지도적 사상가에 관해 연구해 보면 민족이 나아가야 할 미래가 올바로 설정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해와 단재의 민족주의는, 그 내용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중적 민족주의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많이 다르지만,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로 크게 변색된 동아시아적 마르크스주의와는 상당한 친화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점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민족주의, 민중주의 및 마르크스주의가 뒤범벅이 되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까닭이기도 하다. 당시에 펴낸 나의 저서 ‘3·1운동’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사실상 저항적 민족주의다. ‘근대국민국가’를 구상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한다는 성격을 갖는 데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러한 민족주의가 꾸준히 인기를 얻어왔던 것일까.
내가 보기로는 식민지 상황에서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현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뤄질 수 없다는 사정이 아시아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그렇게 고정시킨 게 아닌가 한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자와 민중주의자들도 현실이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보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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