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복되게 생각하며 감사해 할까. 돈이 많은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까, 이 땅에 태어났기에 서로 만나 행복을 기약하며 결혼하는 젊은 부부들일까,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그밖에 보호와 혜택을 많이 받은 계층일까, 아니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들일까. 도대체 우리 중에 몇 퍼센트나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복되게 생각할까.
요사이 뜬금없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36년간의 대학강단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자유의 세상에 직면하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고 옛 스승과 친구들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땅에 태어나 복된 이유
1947년 초등학교 6학년 국어교과서에 ‘자유의 종’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자유의 종이 울렸다’로 시작해서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로 끝맺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은 이 시로 시범수업을 하셨다. 장학사들인 듯한 외부 손님들이 수업을 참관했다. 선생님은 나이도 지긋하고 대범하며 소신 있는 분이라 예행연습 같은 것은 하지 않고 그저 평소의 국어시간처럼 수업을 이끌어가셨다.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수업 마지막 무렵에 선생님은 “질문할 것이 있는 사람은 질문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복된 우리’라는 대목에서 왠지 분노 같은 열기를 느꼈고, 이를 참지 못해 손을 들고 일어나 격앙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선생님,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복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대우를 받았고, 하고 싶은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겨우 해방이 되고 나선 남북으로 허리가 잘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큰 범죄를 저지른 범인처럼 몰래 38선을 넘어야 하게 된 것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인데 복되다는 말씀입니까?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형벌이지 결코 복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나는 평양에서 해주로 월남하다 잡혀 이른바 ‘38감옥’이란 것도 구경했고, 간신히 풀려나서 어선 고기통 속에 숨어 북측 경비대가 총을 쏴대는 바다를 지나 월남하긴 했으나 개성에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여정을 마친 지 불과 3, 4개월쯤 된 때였다.
나의 당돌한 질문에 대해 선생님은 너그럽게 이해하는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너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 우리보다 좋은 조건을 갖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더 행복하고 우리보다 못한 처지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나쁜 조건에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그러니 이 시처럼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우리가 복 받았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까닭들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당시는 선생님의 그런 말씀이 납득되지 않았으나, 그후 반세기 이상을 보내고 난 오늘에 이르러 회고해 보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복되게 여겨지는 까닭을 무척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해방 후 혼란기에 허송세월하지 않도록 사랑의 채찍으로 엄히 가르쳐주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 한국전쟁 당시 부산 송도 뒷산에 천막을 쳐놓고 학생들을 모아 열심히 가르치신 여러 선생님들, 서울수복 전 지역별로 훈육소를 마련해 가르치시고 영국군이 주둔해 있던 교사의 한 모퉁이를 얻어 포성이 들리는 교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신 선생님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철학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철학교수 생활을 하려던 게 아니라 내가 몸 받쳐 섬기고 싶은 종교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존경하던 목사님에게 “신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상담을 청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나의 가장 큰 약점은 내가 목사라는 사실”이라며 내게 철학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신학을 하고 싶으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충고였다.
신학 예비학문으로 철학 선택
나는 그분의 충고가 계기가 되어 철학과를 지망했고 그후 철학교수로서 한평생을 보내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그분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는 말처럼 내 젊은 시절의 고생은 참으로 소중한 밑천이 되었다. 동란 당시 나는 나이가 모자라 군대에 가진 못했으나 고달픈 ‘생활전선’에서 잠시나마 다양한 장사경험을 쌓았다. 수원-남양-사강을 맴도는 장돌뱅이, 온양-천안-성안-둔포를 거쳐 다시 온양으로 회귀하는 ‘양키물건’ 장수, 구포-삼량진-창원을 오가는 기차에 무임승차해 김해 배를 파는 장사, 부산 도떼기 시장에서 땅콩을 사와서 영주동 골목에서 파는 장사 등의 경력은 내게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때도 철학을 하면 배가 고프다고들 했지만 나는 아직 철학하다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나는 대학을 못 나와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왕이면 하고 싶은 공부나 마음껏 해보자는 심산으로 철학과를 지원했다. 내가 신학을 하기 위한 예비학문으로 철학과를 택했다가 신학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과학철학과 논리학, 특히 확률과 의사결정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장사경험에서 얻은 삶의 방식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후 3년 정도의 무급조교와 시간강사 생활을 끝내고 1965년에 운 좋게 서울교육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무급조교를 시작했을 때는 ‘칸트도 10여 년간 가정교사 생활을 했고 스피노자도 평생 안경알을 갈며 철학을 했으니 나도 장기간 가정교사 등 사교육으로 생계를 돌보며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빨리 시간강사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바라던 전임강사가 되고 보니 한편 기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철학으로 밥벌이를 하다니 소피스트가 따로 없구나. 나는 소피스트야, 그것도 애송이 말단 소피스트….
이런 자화상을 그리며 고민하다가 속죄하는 뜻으로 학생들과 철학책을 함께 읽기로 했다. 방학 때 철학책을 읽을 학생들을 찾는다고 게시판에 써붙이니 여러 학생들이 모였다. 당시 교육대학은 2년 과정이었므로 과제물이 많았고 학생들은 성적순으로 발령을 받게 되므로 학교 성적에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학점 따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철학공부를 하겠다는 학생이 있을까 의아해 했는데, 철학에 대한 학생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서울교육대학 철학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발족했고, 그후에는 ‘서울교육대학 철학동문회’도 만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꾸준히 공부해 오고 있다.
서울교대에서 ‘교육’을 배우다
나의 교단생활에서 보람이 컸던 일을 꼽으라고 하면 서울교대 철학연구회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가정교사 노릇도 10년 가까이 했는데, 그때 가르친 제자들은 돈을 주고 받는 것으로 ‘계산’이 깨끗하게 끝났다. 그런데 돈도 안 받고 학점도 안 주며 바쁜 시간을 빼앗은 철학연구회 제자들과는 30년이 넘도록 ‘관계정산’이 잘 안되어 요즘도 가끔씩 만나고 있다.
오늘날엔 교육을 장사에 비유해 ‘소비자 위주의 교육’이니 ‘잘 팔릴 수 있는 교육’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나는 바로 이 ‘교육장사’야말로 우리 사회와 교직자들이 숙고해야 할 중대사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장사라고 할 수 있어도 특수한 장사이며, 교육자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특수한 노동자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백화점 점원이라면 손님에게 물건을 주고 물건값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지식이나 인격이라는 상품을 사고팔 때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돈 외에도 무엇인가가 오가는 것이다. 바로 그 ‘무엇’ 때문에 존경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애를 태우기도 하는 것이다.
임금투쟁을 하는 가까운 제자 교사들에게 “나라면 임금투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은 손해보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임금투쟁은 이겨도 손해고 지면 더욱 큰 손해기 때문이다. 이기면 돈은 좀더 받는 대신 그 돈보다 더 큰 ‘그 무엇’을 잃기 때문이고, 지면 돈도 더 못 받고 그 큰 ‘무엇’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의 가치를 영(零)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기면 득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겠으나 나는 ‘그 무엇’에 큰 비중을 두므로 그렇게 믿는다.
이 기회에 학부모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학부모들은 교사보다 학식도 많고 가진 것도 많다보니 무심코 선생님들을 경멸하는 언사나 행동을 하기 쉽다. 교사라는 직업은 권위 없이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므로 교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는 양질의 교육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서 인사를 받듯이, 아직 명예교수직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거북하지만 “전국의 학부모들이여,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십시오”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교사들 중에는 믿을 수 없고 존경스럽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고 존경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모두 자신을 하늘같이 믿고 사랑하는 자녀를 맡겼으며 그들로부터 존경의 시선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어떤 교사도 아이들을 소홀히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에게는 의사들이 의료봉사를 하듯이 돈을 안 받고 가르치는 ‘교육봉사’를 꼭 해보기를 권한다. 나는 그것이 크게 득이 되는 장사라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길을 모색해 보고 싶다.
서울교대에서 보낸 12년의 교단생활은 경험이 부족해 서투른 것도 많고 실수도 많이 했으나 학생들이 철학에 목말라하며 열정적으로 학문을 수용했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할 흐뭇한 보람을 맛볼 수 있었다. 학생들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아! 교육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교대에서 교육을 배웠고 건국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이르러 비로소 연구생활의 참맛을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다.
20년에 걸친 나의 고려대학교 시절은 연구생활의 황금기였다. 내가 고려대로 간 1980년대 고려대에 학생시위가 그치지 않던 혼란기였는데 어째서 연구생활의 황금기라고 하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은 교수들의 연구생활을 여러 면에서 방해했으나 고려대 당국은 교수들을 보호하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울타리 노릇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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