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르는 것은 힘 있는 자의 전유물이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중국땅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지 92년째 되는 2001년 10월26일 오전 9시쯤, 해군사관학교 4학년생(56기) 160명을 태운 한국 해군 순항분대는 도도하게 흐르는 황푸강(黃浦江)의 탁류를 거스르며 중국 상하이(上海)의 심장부인 와이탄(外灘)으로 올라갔다. 해군 순항분대는 한국형 구축함 제2번함인 을지문덕함(DDH 972)을 최선봉으로 하고, 한국형 군수지원함 제3번함인 화천함(AOE 59)을 중군(中軍), 그리고 한국형 호위함(FF 959) 제8번함인 부산함을 후군(後軍)으로 하고 있었다.
한국 군함이 중국 영해와 내해(內海, 영해보다 더 안쪽에 있는 강이나 호수 같은 수역)에 들어간 것은 이 순항분대가 처음이다. 이날 오전 8시30분쯤 황푸강 입구에서 기함(旗艦, 사령관이 탄 배)인 화천함에 타고 있던 순항분대 사령관 안기석(安基石·해사 29기) 준장과 기자는 중국 해군의 고속정을 이용해 을지문덕함으로 옮겨 탔다. 안사령관이 배에 오르자 을지문덕함의 마스트에는 파란색 바탕에 흰 별 하나가 그려진 ‘제독기(提督旗)’가 게양되었다. 이제부터는 을지문덕함이 순항분대를 지휘하는 기함이다.
함정을 조함(操艦, 조종)하는 함교(艦橋, bridge)는 전투함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조함중인 사관들은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황푸강은 벌크선(광석이나 농산물 등을 싣는 배)과 피더선(작은 컨테이너선) 등 수많은 배들로 붐볐다. 수심은 8m 내외로 매우 얕은데,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배들은 왼쪽으로 운항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두 배 사이의 거리는 30∼50m에 불과해 여차하면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수로 밖으로 나가면 배가 강바닥에 닿아 좌초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도 작은 통선들은 곡예운전을 하는 오토바이처럼 큰 배 사이를 쏜살같이 뚫고 다녔다. 이런 상황이니 사관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군함을 선도(先導)하는 중국 항만국의 함정이 연달아 사이렌을 울리며 길을 터주었다.
칼날 같은 기세로 황푸강을 올라가다
함교 지붕은 레이더의 안테나 등이 복잡하게 설치돼 있어, ‘신호(信號)갑판’으로 불린다. 신호갑판은 군함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사다리를 붙잡고 이곳에 올라간 기자는 나도 모르게 “야-!” 하는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을지문덕함의 함수(艦首)는 잘 벼린 칼날처럼 뾰족하다. 함수 바로 뒤에 구경 5인치(127㎜)인 함포가 활시위에 재워진 살처럼 전방을 향해 힘있게 뻗어 있다. ‘을지문덕이 누구냐. 중국 수(隋) 양제(煬帝)가 끌고 온 100만 대군을 살수(薩水, 청천강)에 수장시킨 고구려의 장수가 아닌가. 한국 함대가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을 앞세워 중국 내해로 거슬러 올라가는구나!’
을지문덕함의 신호갑판에서 느낀 감흥을 기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국 해군 고속정 편대가 있는 부두를 통과하던 오전 9시20분쯤, 뒤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중군 격인 화천함에서 21발의 예포(禮砲)를 쏜 것이다. 갖고 있던 쌍안경으로 바라보자 흰 예복을 차려 입은 사관과 수병들이 화천함 전 갑판에 ‘차렷’ 자세로 서있다. 정말 폼 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후군인 부산함은 다른 선박에 가려 볼 수 없었다. 화천함의 예포 발사가 끝나자, 중국 해군의 고속정 부두에서도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탄약 장전 속도가 늦어서인지, 중국 해군은 포 두 문을 이용해 예포를 쏘았다. 이때부터 지나가던 선박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승조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마스트에는 중국의 오성홍기(五星紅旗), 함미에는 태극기(太極旗)를 달고 상하이에 입항하는 한국 순항분대를 알아본 것이다.
서울에서 한강 남쪽인 강남(江南)이 신개발지로 번창했다면, 상하이에서는 황푸강 동쪽인 푸둥(浦東)지역이 새로 발전했다. 푸둥지구에는 높이 160m를 자랑하는 명물 동방명주(東方明珠)탑과 88층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는 금무(錦茂)타워 등의 마천루가 즐비했다. 오전 11시40분쯤 푸둥지구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을지문덕함은 ‘삼성’과 ‘LG전자’ 등의 입간판을 이고 있는 건물이 줄지어선 외홍교(外紅橋)의 중국 해군 부두에 접안해 홋줄을 던졌다. 중국 수병들이 홋줄을 부두에 있는 후크(hook)에 묶자, 중국 해군 군악대가 힘차게 중국 군가를 연주했다. 이어 한국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등 환영객들이 부두로 밀려나와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을지문덕함에서 사다리를 내렸을 때 1착으로 하함(下艦)해 중국땅을 밟은 것은, 기자를 비롯한 취재진이다. 잠시후 안기석 사령관이,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한국 함정에서 내려 중국땅을 밟았다. 을지문덕함에서 내린 안사령관이 중국군 장교와 포옹하는 순간 기자를 포함해 베이징(北京)에서 취재를 위해 달려온 한국 특파원, 그리고 중국 언론사 보도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숨가쁘게 터졌다. 이날 오후 중국 해군 동해함대 사령원인 자오궈쥔(趙國鈞) 중장(한국군 소장에 해당)을 만난 안사령관은 두 번이나 ‘천년’이란 단어를 사용해 이렇게 인사했다. “제주도에서 상하이까지는 하루 만에 올 수 있는 200해리(약 390㎞)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군함을 타고, 천년에 걸쳐서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군함을 타고, 천년에 걸쳐 중국에 왔습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조선과 고려시대 수군 함정이 중국에 갔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시대 때는 나당(羅唐)연합군이 백마강에서 백제를 공격했으므로, 신라 수군이 중국에 갔을 확률이 높다. 청해진을 운영한 신라의 장보고(張保皐) 대사 또한 함정을 중국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순항분대는 장보고의 함정 이후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한국 함정인 것이다. 5인치 함포를 꼿꼿이 치켜든 을지문덕함을 선두로 한 한국 함대가 황푸강의 누런 물살을 헤치며 와이탄(外灘)의 외홍교 부두에 정박한 데는, 천년 동안 끊어져 있었던 한중(韓中)간의 군함 외교를 복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날 기자는 지난 4일간의 항해 여독이 한순간에 씻겨나가는 듯한 ‘아주 상쾌한’ 쾌감을 느꼈다. 지난 여정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까-악 까악-.”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해에는 까마귀가 많다. 산에서 내려온 것이리라. 옥포만에 면한 해안도시지만, 진해는 산으로 둘러싸인 산속의 도시이기도 하다. 산이 많으면 비도 잦은 법. 10월22일 진해에는 전날 저녁부터 내린 가을비로 부슬거렸다. 그 비를 뚫고 까마귀들은 해군회관 마당에 내려앉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세상사는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까마귀는 길조(吉鳥)다. 저들은 내 출발을 전송하기 위해 저렇게 우는 것이리라.’
해군 작전사령부 부두는 이미 환송 인파로 붐볐다. 군악대와 의장대, 화천함과 을지문덕함·부산함의 승조원, 그리고 순항에 나설 해사 4학년 생도와 선배를 환송하기 위해 나온 해사 3학년 생도들이 찬비를 맞고 서있었다. 3학년 생도 중에는 여학생도 섞여 있었다. 해사에서 최초로 뽑은 여자 생도라고 한다. 열 지어 선 4학년 생도들은 우산을 들고 정렬 대형까지 찾아온 가족 혹은 애인과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편승자인 기자는 비를 피해 기함인 화천함에 먼저 올라, 화천함 함교에서 환송식을 내려다보았다. 가을비가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해군 참모총장 장정길(張正吉) 대장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환송식이 끝나자, 3개 함 승조원들이 배에 올랐다. 4학년 생도들은 다시 한번 가족, 애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예비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대학 4학년의 ‘햇병아리’ 청년들이다. 10개국을 84일 동안 돌아보는 순항훈련이 이들에게도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다. 긴 이별을 예정한 출항이건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인형을 건네주는 연인, 꽃다발을 건네주는 어머니를 뒤로 한 4학년 생도들이 승함해 화천함 승조원들과 함께 갑판에 줄지어 섰다.
때마침 비가 그치고, 부두에서는 해군 장병과 3학년 생도, 그리고 환송인파들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마이크를 잡은 함교의 당직사관이 짧게 외쳤다. “함대 총원, 경례!” 갑판에 늘어선 정복 차림의 생도와 장병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그 순간 배는 긴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을 알리고, 부두의 군악대는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했다. 눈물의 이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항구의 이별은 언제나 애잔하다. 가족과 애인 그리고 3학년 여생도 몇이 서서히 움직이는 배를 따라오며 손을 흔들었다. 4학년 생도는 그들을 향해 꽃다발을 힘차게 던졌다. 그러나 꽃다발은 부두에 닿지 못하고 선명한 색깔로 가을 바다에 떨어져 물결에 떠다녔다. 군악대는 이럴 땐 행진곡보다는 유행가를 연주해 주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破虜湖의 역사를 안고 있는 화천함
기함인 화천함은 현대중공업에서 제작한 것으로 만재톤수 9180t, 길이 134m, 높이 37m며 최고속력은 20노트(시속 39㎞)다. 해군은 전통적으로 군수지원함에 저수지 이름을 붙인다. 최초로 건조한 제1번 군수지원함은 백두산 천지(天池)를 따서 ‘천지함’, 제2번함은 충남 대청호의 이름을 따 ‘대청함’이라고 한다. 제3번 군수지원함인 화천함은 강원도 화천군의 화천댐으로 인해 생겨난 화천호(華川湖)에서 따왔다. 그런데 화천호는 파로호(破虜湖)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6·25전쟁 때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연전연패하다, 1951년 5월28일 육군 6사단과 해병대 1연대가 이 호수 부근에서 중공군 10·25·27군을 대파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중공군을 파쇄(破碎)한 호수란 뜻으로 화천호를 파로호(破虜湖)로 고쳐 부르게 했다. 천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 함대의 기함이 ‘파로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은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국형 구축함 제2번함인 을지문덕함은 배수톤수 3885t, 길이 135m에 최고속력은 30노트(시속 약 56㎞)다. 한국형 구축함은 대우중공업에서 세 척이 건조됐는데, 광개토대왕함(제1번함)·양만춘함(제3번함) 식으로 모두 중국 민족과 싸워 이긴 고구려의 영웅 이름을 붙였다. 분당 45발을 발사하는 5인치 함포를 중심으로 근접방공체제인 30㎜ 골키퍼 시스템과 적함을 노리는 하푼 미사일과 적 항공기를 요격하는 시스패로 미사일, 그리고 대잠(對潛)작전용 슈퍼링스 헬기를 탑재하고 있다.
전투함은 그 배의 무게로 크기를 나타낸다(이를 排水톤수라 한다). 반면 군수지원함을 포함한 일반 상선은 실을 수 있는 물건의 무게로 크기를 표시한다(이를 滿載톤수라 한다). 전투함은 물건을 싣지 않기 때문에 배수톤수로 크기를 표시하는데, 대개 배수톤수에 ‘곱하기 3’을 한 상선과 그 크기가 비슷하다. 그러나 군수지원함은 군함인지라 상선과 달리 여러 무기를 달고 있다. 따라서 전투함을 군수지원함과 비교할 때는 전투함의 배수톤수에 ‘곱하기 2’를 해 비교한다. 톤수로만 따지면 화천함은 을지문덕함의 2.7배 정도다. 외견상으로 을지문덕함은 화천함보다 약간 작다.
한국형 호위함 8번함인 부산함의 배수톤수는 1800t에 불과하다. 하지만 3인치(76.2㎜) 함포와 39㎜ 쌍열기관포, 대함(對艦)용인 하푼과 대공(對空)용 미스트랄 미사일 등 수많은 무기를 장착하고 있어, 작지만 주먹이 매운 배로 유명하다. 화천함과 을지문덕함은 태풍만 불지 않는다면 순항분대가 지나갈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그리고 인도양의 거센 파도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부산함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황천(荒天, 파도가 높은 날) 항해에 익숙하지 않은 편승자(便乘者, 기자처럼 일시적으로 배에 탄 사람. 승조원의 반대 개념이다)라면 멀미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전사령부의 부두가 가물해지고 옥포만을 벗어나 남해로 나올 때쯤, 상하이 입항이 이틀 연기됐다는 소식이 순항분대로 날아들었다. 10월22일 상하이에서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미국의 부시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이 열리고 있었다. 9·11 미국 테러사건 직후 열린 대규모 국제행사인지라, 중국의 공안 당국은 이 행사의 경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순항분대는 APEC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24일 입항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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