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사회의 주류(主流)가 보수주의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지식사회가 대학을 중심으로 언론과 문화계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수주의는 지난 1950년대 이후 한국 지식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이 가운데 보수주의의 영향력은 특히 언론으로 대표되는 공공영역에서 두드러진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지식사회에서 보수주의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 과정과 함께 서서히 약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는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제된 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의 풀뿌리 보수주의(grassroots conservatism)와 긴밀히 결합돼 있으며, 또한 시민사회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보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에 기인한다.
첫째,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분단체제의 성립과 한국전쟁의 생생한 체험은 우리 사회를 ‘우익 주도의 사회’로 재편시켰다. 단적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반공주의는 가장 중요한 이념 가운데 하나였으며, 좌파 내지 진보주의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를 사실상 불허함으로써 보수주의에 유리한 이념적 공간을 부여했다.
둘째, 전통적인 유교사상 또한 보수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일반적으로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사상은 철저하게 부정되기 마련인데 반해, 우리 사회의 경우 유교사상은 그것이 약화되는 과정 속에서도 경우에 따라서 적극 이용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서구 근대사에서 정치사상으로서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어원적으로 보수주의(conservatism)란 말은 ‘보존한다(conserve)’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서구 보수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분석에서 보수주의의 기본이념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고전적 보수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변동 속에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에 대응하여 이념적 변화를 모색해 왔다. 최근 1970년대 이후 서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한 신보수주의는 하이예크와 프리드만의 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보수주의의 새로운 갱신을 모색해 왔다. 영국의 대처 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이런 자유적 보수주의의 이념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보수주의를 검토할 때 이른바 수구(die-hard) 및 반동(reactionary)과 구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흔히 진보주의에서는 보수주의를 수구(守舊) 내지 반동(反動)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엄격히 볼 때 보수주의는 과거를 그대로 지키려고만 하는 수구나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변화를 부정하지 않고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는 이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을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보수주의가 분명 주류임에도 이념적으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경우 대다수 지식인들은 보수주의와 애초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사회과학의 경우 보수주의 이론에 가까운 지식인들은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에 적잖은 부담을 갖고 있는 듯했다.
▲ 송복·연세대 교수(사회학) : ‘통혁당 사건이 국가관을 바꾸다‘
이기획을 연재하면서 가장 쓰기 어려운 지식인을 꼽으라면 다름 아닌 송복 교수다. 왜냐하면 송교수는 필자의 지도교수이자 학문적 스승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적인 체험을 말해 보자. 1979년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사회학개론 시간에 송교수를 처음 보았다.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송교수는 강의노트가 필요없을 정도로 놀라운 암기력과 동서양 고전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이후 필자는 20여 년 동안 송교수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 왔는데, 그가 발표하는 날카로운 글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사에 대한 그의 너그러움에 감탄하곤 했다.
1937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난 송교수는 195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송교수는 “6·25 종전 3년 뒤인 당시 대학에서는 사회주의가 만연했다”고 회고하면서, 자신은 정치와 문학을 연구하던 보수주의에 가까운 ‘정문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정문회 멤버들로는 노재봉(전총리), 고건(서울시장), 손세일(전국회의원)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송교수와 지속적인 교유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치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답지 않게 송교수는 사적 모임에서 가끔 시를 외우곤 하는데,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학 시절에 연원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1960년대 송교수의 주무대는 언론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몸담았던 신문 및 잡지가 매우 다채롭다는 점이다. 졸업을 앞두고 입사한 ‘사상계’에서 1년 정도 기자 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온 뒤에는 3년 동안 ‘청맥’을 만들었으며, ‘청맥’이 문을 닫은 후 1967년부터는 ‘서울신문’ 외신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그는 1971년 하와이대로 유학을 떠나 사회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1974년 돌아와 연세대 사회학과에 자리를 잡은 후 현재까지 정치사회학, 사회조직, 한국사회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송교수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일간지에 왕성하게 칼럼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간결하면서도 주장이 뚜렷한 그의 칼럼은 언제나 크고작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산업화를 위해 집권화 불가피
송교수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1968년 ‘청맥’과 연관된 이른바 통혁당 사건이다. ‘청맥’ 편집을 주도했던 송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보름 동안 조사를 받았지만, 통혁당과 관련이 없었기에 혐의 없이 곧 풀려났다. 송교수는 회고하기를, 이 보름 동안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며칠이 지나니 마음이 아주 평온해졌으며, 그런 상태에서 만일 내가 정권을 잡는다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정치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권력의 유형에 대해 ‘박정희식’ 말고 다른 어떤 방식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정부에 커다란 반감을 갖고 비판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할 것은 산업화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집권화(集權化)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분권화(分權化)를 민주주의라 하고 집권화를 권위주의 또는 독재라 한다면, 산업화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다소 손상된다 하더라도 집권화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이었다. 그 이후 송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정치사회학자로서 송교수의 일관된 주장은 정치와 통치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의 목적이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라면, 통치는 국가의 위기관리를 뜻한다. 훌륭한 정치가는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실패한 통치자가 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한 사회 발전에서 정치적 리더십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리더십에서 송교수가 강조하는 것이 이른바 형안(炯眼)과 총이(聰耳)다. 형안이 사람을 적재적소에 놓을 수 있는 능력이라면, 총이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귀담아 듣는 것을 말하는데, 정치가 내지 통치자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현명한 위임을 위해서는 형안과 총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와 한국사회
송교수가 발표한 책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조직과 권력’(1980), ‘한국사회의 갈등구조’(1990)가 대표적인 학술서라면, ‘열린 사회와 보수’(1995)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사회비평집이다.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1999)는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유교의 사회학에 관한 연구서다. 이 가운데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흥미로운 제목이라 할 수 있는 ‘열린 사회와 보수’다. 왜냐하면 이 책을 통해 송교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보수(保守)란 중심을 찾고 중심을 지킨다는 의미다. 그에게 진정한 보수란 보전과 수정(conservation and correction)을 동시에 내포하되, 그 무게중심을 보전에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송교수가 이렇게 보수주의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사회에 대한 그의 독특한 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치열한 경쟁과 이와 연관된 다양한 사회갈등의 폭발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 사회변동은 인구이동, 직업이동, 지역이동, 계급이동을 포함한 격렬한 사회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 사회를 ‘갈등사회’로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그 무게중심을 바로잡는 보수가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송교수는 우리사회에서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몇 안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담론을 주도해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이른바 ‘송복식 문체’라 할 만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그의 필치는 흔히 칼럼의 전범으로 꼽힌다. 그의 장점은 일반 지식인들이 직접 개입하기 꺼려하는 이슈를 정공법으로 다루는 데 있는데, 이런저런 비판이 없지도 않지만, 상당한 고정독자를 갖고 있다.
그리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나 동양사상은 송교수의 또 하나의 사상적 거처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며 우리사회 문제들에 대한 그의 처방전이기도 한 ‘유교의 사회학’에 관한 책이다. 그의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다. 이후 서양 학문을 익히게 되면서 잠시 손을 놓았다가 미국유학 시절에 우연히 소동파의 ‘적벽부’를 읽은 것을 계기로 다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송교수는 지속적으로 ‘논어’, ‘맹자’, ‘중용’을 공부해 왔으며, ‘논어’의 사회학을 다루는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는 그 첫번째 결실이다. 앞으로 그는 제2권으로 ‘맹자’의 세계를, 그리고 제3권으로 ‘중용’의 세계를 다룰 것을 계획하고 있다.
유교사상에 대한 송교수의 관심은 소박한 훈고학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적극 이끌어내는 데 있다. 고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며, 보편 철학으로서 유교가 갖는 사회학적 의미를 현대사회에 맞게 복원해 내는 것을 그는 자신의 마지막 학문적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 필자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송교수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四書) 못지않게 사마천의 ‘사기’를 자주 인용한다. 평소 그는 ‘논어’와 ‘사기’를 모르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사기’에서 ‘열전(列傳)’만은 사회학자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했다.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회학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인간형이 모두 등장하는 ‘열전’은 개인과 사회간의 복합적 양태들을 다루는 일종의 사회학적 대하드라마라 할 수 있다.
현재 학계에 있는 그의 제자들도 송교수 못지않게 적극적인 문필활동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 이색적일 정도로 그 제자들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교자본주의론을 제시하는 유석춘교수(연세대)와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주창하는 조희연교수(성공회대)는 송교수의 대표적인 제자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현재 각기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대변하는 논객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송교수는 같은 선생 문하에서 유가도 나오고 법가도 나오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교수의 원칙은 무엇보다 학문적 다원주의를 존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