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길 교수 사건은 1973년에 일어났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 그 진상에 접근하기까지 이 사건에 관해 사회적으로 합치된 결론은 없었다. 1973년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공식발표와 1988년 검찰의 공식발표도 ‘최종결론’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수사발표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입장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자살에 의한 단순사망 사건부터 고문치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시각의 차이가 존재해왔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의혹에 대해 그간 우리 사회가 성실하고 책임있는 답변을 못한 탓이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의혹을 그대로 방치한 결과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은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성질의 기억을 지니고 살아왔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에서 조직의 보호를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내던지는 간첩의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떠올린다. 또 어떤 이들은 중정의 살인적인 고문에 몸서리를 친다.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냉혹한 간첩들과 맞서 싸우는 중정의 대폭적인 권한강화를 주장하기도 하고, 수사상 필요를 앞세워 고문을 자행하는 행위는 반인간적 범죄이므로 고문을 근절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교수의 사망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공인된 답변을 찾지 못한다면, 사회적 갈등과 불신은 필연적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필자가 상임위원으로 재직해온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0년 10월15일 발족했다. 위원회는 의문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간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을 함으로써 갈등과 불신을 최소화하고 진정한 국민화합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현재 위원회에서 조사하고 있는 의문사 사건들은 대부분 군사정권 시절에 발생했다. 따라서 상당한 시일이 지나 증거가 남아 있지 않거나, 인력과 권한의 부족, 기간의 제약 그리고 일부 조사대상 기관의 비협조 등으로 진상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건의 경?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어낸 것 또한 사실이며, 이 지면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려는 최종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중간보고서를 쓰는 이유
그간 신문 방송 잡지에서는 고문, 간첩 자백 여부, 타살의 정황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꽤 다양한 시각으로 최종길 사건을 다뤄왔다. 하지만 매체의 기본적인 속성과 이 사건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깊이 있는 분석에 이르지 못한 보도가 상당수였다. 그 중에는 이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 사실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사건의 진상과 무관한 방향으로 비약하는 보도도 있었다.
필자가 이 글을 기고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국민들이 이 사건의 진상과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언론보도보다 좀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조사관’의 관점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자임하고자 한다.
사실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필자는 꽤 고심했다.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고, 향후 조사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 우선 걸렸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사건을 방치하다가는 국민들이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잘못된 기억’을 지니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시점에 ‘월간조선’ 1월호에 실린 ‘정보부 조사요원 반격 /崔鍾吉 교수를 떼민 사람은 없다’라는 기사가 필자로 하여금 투고를 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월간조선’ 기사에서 전직 중정요원 P씨는 이미 작성 시간대나 장소 그리고 참여자 등 모든 내용이 허위로 드러난 현장검증조서에 기초해서, ‘반격’을 운운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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