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쌓이고 쌓인 울분과 누적된 원한으로 2‧28 감행”

[발굴특종] 2‧28 민주운동 4일간의 기록 최초 발굴

  • reporterImage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입력2025-02-28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28 주역’ 고 이대우 교수 육필 수기 발견

    • 1960년 경북고 부위원장으로 시위 주도

    • 고3이던 그해 작성…“준비 과정 상세히 담은 사료”

    • 야당 후보 유세 참석 막으려 “일요등교” 지시로 촉발

    • 이대우 ‘냉돌방’에 모인 학생들, 2‧28 사전 모의

    • “데모하다 총 맞으면 우얄라카노”…친구들의 우려

    • 의거 3일 전 ‘조국 구할 길 없을까’…잠 못 드는 밤

    • 28일 새벽 “천당에서 만나자” 마지막 악수

    •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외치며 행진

    • 등교 막던 선생님도 “정의라고 생각되거든 싸워라”

    • 경찰 총 겨누자 학생들 “쏘려면 쏴라”

    • 죽어서 만나자던 동지들, 형사실에서 만나다

    • “남편은 일평생 2‧28 정신 지키려 힘쓴 사람”

    1960년 2‧28 민주운동 당일에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이던 고 이대우 교수(왼쪽)가 단상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최진렬 기자]

    1960년 2‧28 민주운동 당일에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이던 고 이대우 교수(왼쪽)가 단상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최진렬 기자]

    대구 2‧28 민주운동의 주역인 고(故) 이대우 부산대 교수(1942~2009)가 2‧28 민주운동 직후 작성한 회고록이 처음 발견됐다. 이 교수는 1960년 당시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으로서 시위를 계획하고, 2월 28일 당일 교내 단상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하는 등 2‧28 민주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1960년 작성된 이 육필 수기는 2‧28 민주운동 준비 과정부터 당일 상황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2‧28 민주운동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같은 해 마산 3·15 의거와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1960년 당시 이승만 정권은 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8개 고교(경북고‧경북사대부고‧경북여고‧대구고‧대구공고‧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대구여고‧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에 ‘일요 등교’ 지시를 내렸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구 시내를 행진했다. 당시 이대우 교수의 집에서는 고교 학생 대표들이 모여 시위를 계획했다.

    고 이대우 부산대 교수가 경북고 3학년 시절 쓴 2‧28 민주운동 회고록. [최진렬 기자]

    고 이대우 부산대 교수가 경북고 3학년 시절 쓴 2‧28 민주운동 회고록. [최진렬 기자]

    ‌‘신동아’가 입수한 이 교수의 회고록은 원고지 74매 분량으로, 2‧28 민주운동의 동기와 1960년 2월 25~28일 나흘간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됐다. 회고록 제목은 2‧28 민주운동의 구호였던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이며 2‧28 대구학생데모 진상’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2·28 민주운동은 이 교수가 고등학교 2학년 막바지에 발생했는데, 해당 원고는 그해 경북고 3학년 시절 작성됐다.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원고지는 풍화돼 작은 충격에도 바스러지는 상태였다.

    그간 경북고 출신 학생들은 책과 교지 등을 통해 2‧28 민주운동 관련 자료를 발표해왔다. 1960년 발행된 경북고 교지 ‘경맥’과 2‧28 민주운동 60주년을 기념해 2021년 발간된 ‘2‧28의 참모습’ 등이 대표적 예다. 해당 자료들은 2‧28 민주운동에 대한 당사자들의 시각이 두루 담겼으나 분량이 짧거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기록됐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회고록은 이 교수의 당대 기록물과 비교해도 분량이 2배 가까이 길고, 당시 상황이 상세히 담겨 사료로서 의의가 클 것으로 보인다. 2‧28 민주운동의 주역이 당해 직접 쓴 기록물인 만큼 시위 준비과정 등이 상세히 담겼다는 사실 역시 의미가 있다.

    최병덕 2‧28 연구원 원장은 회고록에 대해 “2‧28 민주운동의 준비 과정 등 당시 상황을 상세히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당시 학생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잘 드러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최 원장은 “회고록에는 이 교수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 등이 가감 없이 담겨있는데, 기존 기록물에는 2‧28 민주운동 당시 상황에 대해 이 정도로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인마들아 그날 민주당 연설하는 날이다”

    이대우 교수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우리 고등학생들은 부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바라보고 통곡과 울음 섞인 생활에서 반항할 수 있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자유당 정권) 12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과 누적된 원한이 원인이 돼 마침내 2‧28이라는 역사적인 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며 2‧28 민주운동의 배경을 밝혔다.

    회고록에 따르면, 2·28 민주운동은 사흘 전인 25일 교무실을 다녀온 한 학생이 “2월 28일 일요일 하오(下午) 1시에 우리 학교 와서 공부한다”고 전하며 촉발됐다. 수군거림 속에 한 학생이 “인마(이 녀석)들아, 그날 민주당 연설하는 날이다”고 말했고, 상황을 이해한 학생들의 분노는 커져갔다. 이승만 정권은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상대 진영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2월 28일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 8개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고 이대우 부산대 교수. [동아DB]

    고 이대우 부산대 교수. [동아DB]

    ‌결국 이 교수는 2월 26일 학교에 ‘학생위원회 소집 허가’를 요청했다. 해당 안건은 지도교사와 학생과장을 거쳐 교감에 이르렀다. 당시 경북고 교감은 “경북중학교 시험 문제로 학년말 시험 일정이 조정됐다”며 등교 이유를 설명했으나 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학생위원회가 열렸고, 학생들은 6시간 동안 장기간 회의를 갖는다. 당시 학생들은 일요 등교 지시에 맞서 “등교 정지” 등을 주장했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다음날 이대우 교수는 친구들에게 ‘데모’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시위에 대한 여론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데모하다 인마 총 맞아 죽으면 우얄라카노(어쩌려고 하니)”라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늦은 저녁 이대우 교수의 방에 2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때까지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데모는 중지하고, 교내에서 성토대회나 하자”고 했다고 한다.

    이대우 교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장기간의 토론 끝에 학생들은 시위 결행을 다짐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났지만 7명이 이대우 교수의 방에 남아 시위에 대한 단안(斷案)을 작성했다. 단안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됐다. 첫째, 2월 28일 하오 1시를 기해 일제히 총궐기하기로 한다. 둘째, 데모대의 학생을 구속하거나 선생님에 대해 행정적 인사 조치를 할 경우에 계속 데모를 할 것이며, 그래도 사태가 악화될 시에는 100만 학도에게 호소하기로 한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정부의 일요 등교 지시를 규탄하고 있다.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인스타그램 갈무리]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정부의 일요 등교 지시를 규탄하고 있다.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인스타그램 갈무리]

    ‌2월 28일 오후 1시, 경북고 학생들은 계획대로 시위를 결행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학생들이 강단 주변으로 모이자, 이대우 교수가 단상에 뛰어 올라가 결의문을 낭독한 것이다. “나가자 반월당으로”라는 외침과 함께 경북고 학생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에 자유를 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구매일신문사, 경상북도청, 한국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지사 관사 등으로 행진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제지하는 경찰에게 흙을 던지기도 했으나 이내 멈추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이어갔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운동과 고 이대우 교수의 활약상을 보도한 1963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7면. [동아DB]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운동과 고 이대우 교수의 활약상을 보도한 1963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7면. [동아DB]

    ‌회고록에 의하면, 오임근 당시 경북도지사를 비롯해 경찰들은 경북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당시 학생들을 때리던 오 지사의 손에서 피까지 흘렀다고 한다. 경북고 학생들은 체포됐고, 이대우 교수 역시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연행됐다. 이날 이대우 교수는 생애 처음 형사실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꼭 죽으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경찰은 이 교수에게 “보안법에 저촉돼 징역 5~6년은 선고될 것”이라고 위협하며 배후 세력 등을 취조했다. 이 교수는 “내가 데모의 주동자이니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해 달라”고 맞섰다. 이 교수는 풀려났지만 이후로도 형사들이 집에 찾아와 감시를 이어갔다고 한다.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이 회고록은 이대우 교수의 미망인 김향선 여사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해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김 여사는 “남편은 일평생 2‧28 민주운동의 정신을 지키려 힘썼고, 이러한 정신이 다음 세대에 전승되길 바랐다”고 기억했다. 이대우 교수는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는 등 전 생애를 2·28 정신 계승을 위해 헌신했다. 김 여사는 “남편이 남긴 회고록을 통해 2‧28 민주운동의 역사가 후대에 바르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 이대우 교수의 미망인 김향선 여사가 2월 11일 부산 자택에서 2‧28 민주운동 당일 사진을 들고 있다.[최진렬 기자]

    고 이대우 교수의 미망인 김향선 여사가 2월 11일 부산 자택에서 2‧28 민주운동 당일 사진을 들고 있다.[최진렬 기자]

    ‌‘신동아’는 2‧28 민주운동 65주년을 맞아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록한 이대우 교수 회고록 전문을 공개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윤문을 거쳤으며, 훼손된 부분과 불명확한 내용은 ‘훼손’ ‘○’ 표시를 했다. 다음은 회고록 전문.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2‧28 대구학생데모 진상
    경북고교 3학년 이대우

    자유당 정치 12년간에 온갖 악정은 드디어 보안법이라는 세기에 보기 드문 악법을 만들어 국민의 귀와 입을 틀어막아 놓았으니, 자유를 박탈당한 국민들의 울부짖음과 무언의 반항은 그 절정에 다다랐던 것이다. 3․15 정부통령 선거 가까워오면…(훼손)…폭력과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르러서는 부정선거 지령이 나오고 급기야는 살인선거를 감행하기에 이르러 국민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휘몰아 넣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이러한 부자유스러운 선거가 우리 국민들을 위하여 관심사가 못 된다는 듯이 “케 쎄라 쎄라(que sera sera: 될 대로 되라)”를 맥없이 부르짖으며 자포자기에 빠졌던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러한 독재의 시달림 속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잘 살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어서 바삐 자유당이 종언을 고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청에서 일하는 우리 형님, 아버지들은 모가지와 밥통이 겁이 나서 자유당이 하는 짓이 불의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불의를 추종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서 회전의자를 돌리고 있는 고급공무(원)들은 이러한 국민의 원성을 들은 체 만 체 아랑곳없다는 듯이 그 무시무시한 부정선거를 즐겨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제 2세들에게 진리와 정의를 가르치는 진정한 학원에의 선생님들은 교육자로서 불의에 대한 반항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던 것이며 불의와의 타협을 가장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를 위해 투쟁하려는 성스러운 생각도 휘몰아치는 폭풍에는 그들의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그들이 비굴한 행복보다 정당한 불행을 몰랐으랴만. 이러한 부정과 불의의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이 나라의 제 2세 학도들은 기성세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시하면 할수록 시원한 구석은 보이지 않고 나날이 암담해가고만 있었다.

    이러는 동안 우리 고등학생들은 10대의 젊은이들로서 반항의 의식이 더욱이 컸던 것이며 기성정객들의 거취 및 그날그날의 정치단상에 어느 누구보다도 관심이 컸으며 또한 우리의 사회환경은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등학생들은 무언의 의사통일이 되어 있었고 불의에 반항하는 저항의식은 기성세대들의 썩어 나자빠진 무리들 속에 끼어 고이고이 불꽃을 튀기듯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고등학생들은 이러한 차마 두 눈으로서는 볼 수 없는 부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바라보고 통곡과 울음 섞인 생활에서 그 어떤 반항할 수 있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12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과 누적된 원한이 원인이 되어 마침내 2․28이라는 역사적인 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O근인으로서는 2월 28일 일요일 하오 한시에 민주당 부통령 입후보자 장면 씨의 선거 연설이 있었는데 자유당이 이를 분해하기 위한 야비한 수법으로 하오 한시 일요 등교라는 부O한 OO를 연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어떻게 그렇게 묘하게도 연설시간과 학교에 등교하라는 시간이 꼭 맞아들어갔던가! 학생들의 잠재해있던 반항심은 표면화되어서 활활 부정에 대한 정의의 불꽃은 일제히 요원의 불꽃처럼 타올랐던 것이다.
    이제 그 2․28 데모의 진상을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4293년(1960년) 2월 25일

    경북고 학생들은 하루 8시간이라는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이제 담임 선생님의 종례 소리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종일 학업에 시달린 학생들의 얼굴엔 한결 피로의 빛이 역력했다. 학생들은 모두 이반 저반에서 흐트러진 책보를 챙기며 서로가 웃어가며 와글거리고 있었다.

    교무실을 다녀온 한 학생이 입을 열더니 의아스런 표정으로 “저 이번 2월 28일 일요일 하오(下午) 한시에 우리 학교 와서 공부한다” “지금 선생님들 직원회의에서 아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는 말이 학생의 입에서 떨어지자 온반 동료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인마 이거 돌았나, 와 카노 정말이가”하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온 반 학생들은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고 있더니 그중에 한 사람이 “야 인마들아 그날 민주당 연설하는 날이다”라고 소리 높여 야단법석들이었다.

    나는 이러한 급우들의 움직임을 보고 복도로 나갔더니 다른 반 학생들도 야단이었다. 아니 전교 학생들이 물 끓듯 뒤끓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들 별 ×× 다 한다” 등 심히 불평에 찬 음성으로 부정을 규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디어 담임 선생님이 나타나자 교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담임 선생님의 입에서 “에 이번 일요일엔 학교에 온다. 그날은 여하한 사정이 있더라도 등교해야 한다”라고 전달했을 때 학생들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교실은 소란해지고 전교는 일시에 분노의 음성으로 뒤끓었고 더욱이 1학년 1반 학생들은 유달리 노했던 것이다.

    종례를 마치고 교문을 나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흐트러진 책가방을 들고 오가는 자동차의 소음도 들을 겨를 없이 나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정신없이 나의 방에 다다른 나는 책가방을 팽개치고 울분을 참지 못해 잠시 동안 책상에 엎드렸다. 나의 마음을 진정하려고 무한히 애를 썼지만 화산같이 폭발하는 나의 격동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울분과 분노에 휩싸인 나는 내 자신 몸돌 곳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흘러가 벌써 일몰이 짙어왔던 것이다.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창 넘어 보이는 한 조각 파란 하늘도 어쩐지 애달프게 보였을 뿐이다. 사방이 어두워 오더니 나의 차가운 방에도 밤은 어둡게 스며들어 전등은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조금 앉았으니 나의 몇몇 동료들이 찾아왔다. 그들도 나에게 울분을 털어놓으러 왔던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우얄라카노”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 피가 살아있는 한 일요 등교는 못할 거야”라고 말했다. “두고 보자”고 말하고 그들은 사라졌다. 나는 곧 내일(26일) 학교에 가면 학생위원회를 OO키 위해 ‘(단기)4293년 2월 28일 일요 등교에 관한 건’이라는 안건을 써놓고 조용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잠이 올 리 만무하다.

    나는 가만히 드러누워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지금 네 조국이 쓰러져 가고 있다’ ‘부정선거의 광풍이 온 천지를 휩쓸더니 마침내는 백합같이 ○○한 우리 학도들의 머리에까지 미쳐 이젠 우리 젊은이들의 혼마저 강제로 빼앗아가려 하고 있다. 썩을 대로 썩어 나자빠진 기성세대들의 더러운 부정의 장난은 학원(學園)의 자유까지 박탈하려 하고 있는가 하면 인간이 쉬어야 할 신성한 휴일마저 빼앗기려는 처참한 ○면에 처해있다. 이러한 시련이 닥쳐왔는데 너는 어찌 가만히 있느냐? 조국을 구할 길이 없을까’하고 내 마음속에 다짐을 하였다. ‘반항을? 반항을 하면 어떻게 하지? 등교정지? 데모? 성토대회?’ 이렇게 번갈아 생각해 보았다. ‘데모를 하면 물론 퇴학일 것이고, 징역 몇 년일까? 사형일까’하고 철없는 어린 마음에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혼자 몸부림치는 동안 잠 한숨 못 이룬 채 25일의 밤은 깊어만 갔던 것이다.

    2월 26일

    26일의 아침은 저 말리 밝은 태양이 비쳐오더니 조용히 밝아왔다. 벌떡 일어나 학교로 항하여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학교의 문을 들어서니 파릇파릇 돋아나는 수양버들은 자유스럽게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심정은 한없이 착잡해졌다. “참되이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자주독립하는 사람이 되자”는 교비의 글이 눈알에 선뜻 들어왔다.

    재빨리 교무실로 뛰어 들어가 학생위원회 소집 허가를 맡으러 학생위원회 지도 선생님에게 갔다. 그러나 지도 선생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학생과장 선생님에게로 OO을 넘어갔던 것이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또 교감선생님에게로 넘어갔다. 교감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휙 스쳐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왜 학교 오라는데 무슨 이의 있느냐”고 말씀을 하시더니 또 말을 이어 “저 경북중 시험 관계로 우리가 3월 3일부터 학년말시험을 치를 예정인데, 시간이 없어 그러는데”라고 말씀하시기에 “그러면 시간을 따져봅시다”고 말하고 반박했더니 시간을 따지기는커녕 언급을 회피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학생들의 여론이 등등하자 그만 학생위원회를 개최할 것을 허(許)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내가 교무실에서 나올 때 어떤 선생님이 황급히 뛰어나오시더니 “영웅도 시대를 아느니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나의 교실에 돌아오니 반 동료들은 “어떻게 되느냐 너만 믿는다”고 하면서 나에게 야단들이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에 역사적인 학생위원회는 막을 올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학생위원들의 발언은 한결 거세고 줄기찼다. 젊은이들이 토하는 정의에의 호소는 가슴을 파고들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거야? 근데 우리나라 역사상에 이런 포악하고 강압적인 처사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더란 말인가? 일요일은 세계 전 인류가 공휴일로 정해놓고 일주일 동안 시달린 피로를 회복하는 날이요. 공장도 연기를 그치고 노동을 그치고 피로를 회복하는 날인데 이들 노동자들은 피로에 지쳐 쓰러져 죽으란 말인가”라는 등 학생들의 발언 열열하게 되자 학생위원회에 참석하셨던 지도위원 선생님, 교감선생님, 학생과장 선생님. 교무과장 선생님, 체육선생님 등 모두는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감선생님은 “에, 너희들의 지금 심정 틴에이저(teenager)의 레지스탕스는 잘 이해하겠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하니 일체의 외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only study, 오직 공부만 해주기 바란다. 지금 더욱이 선거기간이 아니냐”는 말씀이 끝났으나 대의원들의 반항은 시종일관 줄기찼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를 ○○하는 나의 심정은 한없는 울분과 격분으로 끓어올랐다. 대의원들은 등교 정지를 하자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데모 결행의 꿈은 파랗게 싹이 트고 있었다. 오늘의 학생위원회는 6시간이라는 장시간의 회합이었지만 뚜렷한 결론을 맺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당장에 뚜렷한 결론이 내릴 리 만무하다. 이리하여 26일은 저물어갔던 것이다.

    2월 27일

    28일을 24시간 앞둔 27일은 밝아왔다. 나는 또 학교에 갔었다. 학교에 이르자 학생들은 제각기 불꽃같은 눈초리를 던지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잠시 후에 들어오신 선생님 조회를 통한 선생님들은 “내일 오후 한시 등교는 불변이다. 어쨌든 내일은 전부 등교할○ 또 시험도 칠까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학생들의 반항의 불꽃은 다시 타올랐고 이반 저반에서 정의의 ○사들이 복도에 뛰어나와서 억울함을 참지 못해 펄펄 뛰고 있었다.

    아! 나의 가슴은 분노에 벅찼고 주먹은 부르르 떨렸던 것이다. 맥맥히 솟아오르는 정의와 ○○에 대한 핏줄 그건 진정 자유인의 피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교실을 뛰쳐나와 ○○ 대의원을 소집해 교장실로 돌입했다. 자비스러운 교장선생님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시면서 “다들 왜 들어왔어 이야기해봐”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또 우리 학생위원회 간부들은 “선생님 도대체 왜 등교하라고 캅니까”라며 등교 이유를 캐고 묻자 “그 이유는 자네들도 잘 알 테니 묻지 말아다오”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우시는 것이었다. “그럼 내일 시험 치지 말고 영화로 대체시켜볼까”라고 말씀하셨으나 우리 대의원들은 교장실을 뛰쳐나와 제각기 자기 반에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대의원들과 곧 데모 결행의 토의를 하려고 했으나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각 대의원들에게 각 반에 돌아가서 “어쨌든 내일 빠짐없이 나와주십시오. 영화 관람을 가든지 뭘 하든지 좌우간 꼭 등교해 주십시오”라고 말을 했더니 학생들은 “에이 더럽다” “치앗뿌라, 내일 안 오면 되지”라며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도 있었다.

    제각기 대의원들이 자기 반에 돌아갔을 땐 학생들은 모두 일어서서 야단들이었으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담임 선생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아이고 이 사람들아 제발 참아주게. 우리 식구가 열 식군데 밥통 떨어지면 곤란해”라는 분도 있었고, 또 어떤 선생님은 “오냐 너희들의 심정 잘 알겠다. 정의라고 생각되거든 싸워라 내 뭐 이 학교 나간다고 굶어 죽을 것도 아니고, 내 사표 내면 그만이지”라고 말하시는 눈물겨운 선생님도 있었다.

    어떤 반 학생은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다 말해놓고는 “이래도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느냐”고 묻자 “존재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선생님이 답했다. 이렇듯 학생들의 울렁거리는 동태를 바라보며 나는 눈물을 머금고 교문을 나섰던 것이다. 교문을 나서면서 믿을 수 있는 몇몇 동료들에게 데모 결행의 이야기를 했더니 “등교 정지나 하지 데모하다 인마 총 맞아 죽으면 우얄라카노”라며 의아스러운 표정을 던지면서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것 변할 리 없었다. 벌써 죽기를 각오한 나의 몸 최후의 일각까지 ○○하련다. 교문을 나서서 대의원들과 노상에서 비밀히 이야기하고 대의원들은 오후 5시까지 우리 집에 오게 하고 나는 연락에 착수했다.

    (26일 난 대구고의 학생위원장과 우리 집에서 만나 “너거 학교도 이번 일요일에 등교하라 카더나, 세상에 참 별 해괴한 일이 다 있어”라고 말했더니 “우리 학교는 그런 말 없던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쨌든 내일 만나서 자유당 연설이나 들으러 가자, 아마 우리가 내일은 중대한 결의를 해야 될 거야”라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몇몇 동료들에게 연락을 해놓고 대구고 학생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급히 집으로 뛰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대구고 학생위원장은 벌써 나의 집에 들렀다가 자유당 연설회장으로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또 허겁지겁 자유당 연설 장소로 뛰어가서 대구고 학생위원장을 찾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얄미운 인간 ○○○ 군의 음성만이 귓전을 두드렸다.

    나는 거기서 경북고 학생 10여명을 만나 데모 결행의 이야기를 하고 바톤식 연락에 착수할 것을 부탁했다. 그길로 난 또 연락에 착수했다. 아스팔트 길 위엔 한결 복사열이 뜨겁게 내치고 오가는 행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또 땀을 빨빨 흘리면서 정신없이 날뛰었다. 나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데모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허둥지둥 어느 광인처럼 뛰어다니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의원과 만날 시간 5시가 다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한 사람의 대의원도 오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그만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땀을 닦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저녁 하늘의 붉은 노을이 타오르는 걸 보고 길거리로 튀어나왔을 땐 또다시 데모의 꿈은 열렬히 소생되었다. 용기백배해서 차근차근 연락을 계속했다. 어느덧 나의 옷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피로한 다리를 이끌고 동료들의 집을 찾아가는 나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으며 격분과 울분에 휩싸였던 것이다.

    “비밀을 지켜다오”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놓고 동료의 집을 빠져나오곤 했다. 벌써 시간은 밤 아홉시. 결의문을 쓸 시간조차 빼앗긴 채 허겁지겁 뛰어다녔던 것이다. 뛰어다니면 다닐수록 시간은 흘러갔던 것이다. 이렇듯 연락은 조금씩 조금씩 진전되어 겨우 50여 명의 동료들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결의문 작성을 의뢰하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나는 결의문을 하청일 군에게 맡겼다. 나는 하 군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생들의 동태와 일요 등교의 사실과 나는 하 군을 부둥켜안고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나 현실이 안타깝고 케케묵어 나자빠진 기성세대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고 한결 답답하기만 해서였다.

    “연설이 있는데 그 연설 못 듣도록 방해하는 모양인데 참 ○○한 방법이지. 오늘 자유당 연설하는 데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고, 또 오늘 수업도 단축수업을 하는 등 생 ××을 하면서”라며 불평 섞인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벌써 시간은 열한시. 경북대사대부고․경북고․대구고 세 학교 대표들이 모여 앉았다.

    나의 이 차가운 냉돌방에서 역사는 이뤄지기 시작했다. 동지는 모이고 모여 20여 명이 넘었다. 여기서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데모는 중지하고 교내에서 성토대회나 하자는 것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가 통금시간이 가까워왔다. 동지들은 통금시간이 가까워오자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거의 돌아갔다.

    최후에 남은 우리 동지는 모두 7명이었다. 우리 동지들은 둘러앉아 데모 결행의 진지한 토론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서 눈물을 흘려가며 쓰러져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한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며 ○○하게 ○○를 했던 것이다.

    죽어가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새싹이 싹트기 시작했다. 반항의 불꽃은 계속 타올랐고 마음은 ○석같이 굳어져갔다. 백두산 기슭 박달나무 밑에서 단군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3000만 민족이 눈물과 격분을 감싸고 민주주의의 ○생과 자유를 전취하기 위해 ○쟁의 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정말 눈을 감으니 내 형제들의 헐벗은 모습이 눈앞에 아롱지고 쓰러져가는 애처로운 모습들이 안막에 영상을 지고 살아진다.

    나와 나의 동지들은 차가운 나의 방에서 손을 마주잡고 이불 속에서 나라를 생각하고 배달겨레의 앞날을 눈물로 써 이야기하고 그 밤을 잠 한숨 못 잔 채로 밤을 새웠던 것이다. 막상 데모를 하려고 결정은 했으나 자유당 권력의 총검 앞에서 더구나 선거기간에 이러한 반정부 데모를 꿈꾼다는 것은 확실히 모험인 것이었다. 동지들은 다시 둘러앉아 “마지막 향연”이란 등 여러 가지 이야기에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둘러앉아 마지막 최후의 단안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말았다.


    1. 명일 2월 28일 하오 한시를 기하여 일제히 총궐기하기로 한다.
    2. 데모대의 학생을 구속하거나 선생님에 대해서 행정적 인사 조치를 할 경우에 계속 데모를 할 것이며 그래도 사태가 악화될 시에는 대한의 전 100만 학도에게 호소하기로 한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밤은 고요히 깊어가기만 했다. 저 멀리 먼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이웃집 수탉이 “꼬끼오”하고 새벽의 적막을 뚫고 흘러나갔다. 우린 이제 어서 새날이 밝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쌀쌀한 바람은 차가운 이불 속으로 스며들었다. 방안의 공기는 겨울 공기처럼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몸에선 무럭무럭 땀이 나고 있었다. 참으로 초조했고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문밖에서 무엇이 “뽀스락”하고 소리 나기에 경찰인가 싶어 문을 열어 보았으나 경찰은커녕 쥐새끼 두 마리가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또다시 동지들은 모여앉아 “우리가 내일 나가면 죽을는지 모른다. 천당에서 만나자. 우린 이미 우리들의 목숨을 각오한 이상 핏줄기가 터져 나와 죽을 때까지 피의 투쟁을 전개하자”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는 우정의 악수를 교환했으며 마지막 우리들이 부르는 애국가 소리는 밤의 적막을 뚫고 집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땐 어떻게 순경들이 그렇게 신경이 둔했을까.

    교문을 박차고 나가던 28일

    한숨 잠을 자고 일어나니 운명의 28일은 드디어 다가오고야 말았다. 동지들은 모두 모여앉아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주여! 부디 우리들의 하는 일에 많은 빛을”이라고. 아침 일찍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고픈 배를 움켜쥐고 급히 또 연락을 해야만 했다. 만나는 동료들 중에는 데모를 중지하자는 동료들도 있었다.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 소리를 들어가며 연락에 여념이 없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라는 구호를 정해갖고 교문 앞까지 왔을 땐 벌써 시간은 1시로 각박해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1시에 일제히 궐기하자고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구의 집엔가 들려서 몇몇 학생들의 의사를 타진했으나 포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말을 들을 때 마음은 자꾸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12시 50분 학교로 뛰어 들어가니 학생들은 전부 ○당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선생님들이 한 분 두 분 운동장으로 나오셨다. 체육선생님은 “1학년 2학년 따로 뛰어서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것, 명령에 따를 리 없었다. 이때 대구고의 학생위원장이 내교(來校)하자, 학생들은 “벌써 대구고는 교문을 나왔단다”하고 외치자마자 “와”하는 정의의 함성과 더불어 똘똘 뭉쳐졌다. 젊은 핏줄이 완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두 눈은 번개같이 빛났다.

    대의원들을 만나보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던졌더니 약간 주저하는 빛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엔 찬성의 소리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어떠한 교실에서는 데모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있는 반도 있었다.

    학생들은 교단을 중심으로 움쩍움쩍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다. 때는 왔다. 나는 비호같이 단상에 뛰어 올라가 안 포켓에 준비해 놓았던 결의문을 꺼내어 일사천리로 낭독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선생님들은 “아이고 이놈아 이러지 마라”라는 아우성과 함께 결의문을 탈취하려 했으나 기어이 낭독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가자 반월당으로”라고 외치자 드디어 분노를 폭발하고야 말았다. 흥분과 격분에 얽히고설킨 1000여 명의 경북고 데모대는 교문을 박차고 나갔던 것이다. 내 생각 같아서는 파출소에서 제지당할 줄만 알았더니 예상외로 방해물이 적었다. 경찰들은 모두 민주당 강연회에 간 것이다. 데모대가 삼덕우체국을 지날 때 장면 씨가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드디어 데모대는 반월당에 이르렀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라는 구호를 외치자 데모대는 일제히 울음 섞인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의 부정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의기충천했던 것이다.

    대구매일신문사 앞에 이르자 데모대는 잠시 멈춰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라는 구호에 뒤이어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구호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데모대의 학생들은 쏟아지는 땀방울에 옷마저 함빡 젖고 그들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전율을 느끼면서도 부정에 반항하는 줄기찬 태도 참으로 감격 깊었다. 어떤 신문기자가 학생들에게 “구호가 뭐냐”고 물었을 땐 학생들은 “이 ×× 니가 경찰인가 뭔가 알 게 뭐냐”며 팽개치고 줄기차게 달렸던 것이다.

    드디어 도청에 이르자 학생들은 땀을 쫙쫙 흘리면서 울부짖는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난 결의문을 낭독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의 제지로 결의문 낭독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중지당하고 말았다. 눈물과 울분에 쌓인 학생들의 심정은 격노에 뛰고 있었다. 한땐 울분을 참지 못해서 흙을 집어 던지기도 했지만 진리를 배운 학생들의 이성은 곧 흙 던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의문을 읽다가 제자당한 나는 학생들 속에 뛰어들어 시청을 향하여 뛰어나왔던 것이다. 벌써 도청 문 앞을 나올 땐 검은 제복의 민주 경찰들이 그 곱고 빤질빤질한 방망이로 어린 학생들의 팔을 다리를 등을 온몸을 마구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도청 문을 뛰쳐나와 한국은행까지 왔을 땐 O차가 달려와서 학생들을 물건처럼 마구 때려 실었고 쉴 새 없이 내리치는 방망이는 우박이 떨어지듯 했다.

    시청에 이르자 학생들은 실신상태에 빠져 그만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민주경찰들은 권총을 바로 학생들의 얼굴에 겨누기도 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광경이었다. 학생들은 “쏘려면 쏴라”하고 대항했던 것이다. 여기서 또 스크럼을 짜고 지사 관사를 향하여 학생들은 줄기차게 달렸던 것이다.

    지사 관사 앞에 이르자 오 지사는 나와서 학생들을 대뜸 두들겨주웠다. 학생들을 때리던 오 지사의 손에선 한줄기 주르륵 피가 흘렀다. 심지어 오 지사는 데모 학생들을 향하여 “이놈들 전부 빨갱이다”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경북고 교장 어느 놈이고, 이 새끼 데리고 온나”며 ○○는 욕설을 선생님에게 퍼부었다. 여기선 모 선생님은 지사를 향하여 “학생들을 때리지 마시오”라고 하시는 분도 있었다.

    그길로 데모대는 구국립극장 쪽으로 향하다가 흩어졌다. 수많은 학생들이 도○으로 남대구서로 대구서로 연행되어 갔던 것이다. 순경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바라보던 여학생들이 보다가보다가 못 참아서인지 순경에게 달려들어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참으로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후 난 경찰에 연행되어 갔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남대구서 붙잡혀간 학생들은 모진 매를 맞았고, 어떤 순경이 “난 자유당이 좋다 넌 나쁘냐? 정치OO를 한번 따져볼까”라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 ”너가부지(너희 아버지) 공무원이지 여축없다 여축없어“ 하기도 했다. 갖은 위협을 다했던 것이다. 옆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이 자못 학생들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청에 붙잡혀간 120여 명의 학생들은 약간 침침한 사무실에 갇혔다.

    학생들은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반항했다. 어떤 학생은 “공기 탁해서 질식하겠구만, 문좀 열어주소”하고 여유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인데 참으로 태연자약 대장부라 해둘까. 또 학생들이 변소에 갈 때면 경찰들은 변소에까지 따라가 “이 ×× 빨리 나오너라, 뭐 똥을 그렇게 오래 누노”하기도 하였다.

    내가 연행되어 갔을 땐 어쩐지 기분이 나빴고 생전 처음 들어가는 형사실이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꼭 죽으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난 형사들이 안내하는 수사실에 들어왔다. 형사 아저씨님네들은 “인마, 보안법에 이적행위로 저촉되어 적어도 징역 5년 내지 6년 간다”고 위협을 하는가하면 갖은 수단 방법으로 수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난 어제 죽어서 만나자던 동지들을 모두 이곳에서 만났다. 참으로 기뻤다. 반가웠다. 동료를 만난 기쁨에 서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사찰계장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었다. 그와 나는 단둘이 마주 앉아 심문을 계속했다. 그는 한참 동안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그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나도 자네들과 같은 학생시절에 학생운동도 했다”고 전제하시고는 “모당의 조종을 받았는가” “안 받았습니다” “누구의 지령을 받았는가” “안 받았습니다” “누가 선동을 했는가” 등을 묻고 나서 “자네가 주동자인가”라고 묻더니 “학생들은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이 대통령의 나라를 사랑하는 조국애와 독립정신은 참으로 숭배합니다. 그러나 12년 동안의 장구한 집권 동안 너무나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 “내가 데모의 주동자이니 책임을 다지겠습니다. 빨리 구속된 학생을 훈방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더니 그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에 찬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왜냐 그들의 ○○가 옳지 못할 경우 전 대구 시내는 발칵 뒤집어질 것을 예상했기 때문. 이윽고 불안과 공포에 쌓인 심문이 2시간은 지나갔던 것이다. 형사들은 독수리와 같은 눈초리로 위협하면서 우리들에게 심문을 계속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를 때마다 마음은 독사같이 달아올랐다. 얼마가 지난 후 연행된 학생은 훈방 되었다는 것이다. 쫄쫄 굶은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던 것이다. 얼마인가 시간이 조금 지나서 마침내 “자네들 부○부주의로 하니 안심들 하게”라면서 우리들에게 안심시키려 했으나 도무지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동지들과 같이 피로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 12시가 다 되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무장경관이 나의 집 문 앞에 서있어 오가는 행인들의 신분을 조사하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의 팔에는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고, 군데군데는 방망이 스쳐간 자국이 퍼렇게 보였다. 그들은 상흔을 바라보며 “참으로…(훼손)…겁났어. 내 팔이 부러지려 할 때 난…(훼손)…아무 의식도 없었지 다만 반항했을 따름이다. 기적적으로 살아왔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뚜들겨 맞은 것 안 아파”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 후 반갑잖은 형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집에 찾아와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던졌다.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흥분했다. “빨갱이가 ○재해 있는지도 모른다”…(훼손)…짓궂게 배○○를 따지고 묻는…(훼손)….



    최진렬 기자

    최진렬 기자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주간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재미없지만 재미있는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1인분의 몫을 하는 사람이 되려 노력합니다.

    “갈등 지속되면 ‘빨갱이와 파시스트 전쟁’ 벌어질 수도”

    “광장 목소리만으로는 선거 못 이겨… 비명·반명 뭉쳐야”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