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도자기 외길 인생으로 빚어낸 ‘명품기업’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4-11-16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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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빚이 없는 회사,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사원들을 해고하지 않는 회사, 그러면서 세계적 제품을 만들어내고 이익도 남기는 회사가 있다. 본차이나로 유명한 한국도자기가 그 주인공. 질그릇을 굽던 회사가 최고급 본차이나를 만드는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한국도자기의 성공 배경에는 김동수 회장의 투명하고 건실한 경영철학이 숨어 있다.
    성장 과정에 있는 사람과 기업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성공여부를 가장 정확하게 판단 내릴 수 있는 때는 판을 접을 때인데, 사람의 경우는 가능하지만 몇 백년의 맥을 잇는 기업의 경우에는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사람이나 기업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성공이다, 실패다’는 흑백논리로 단정짓기보다 지금의 위치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여지를 남겨놓고 평가를 하는 게 옳을 듯싶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도자기는 방향을 잘 잡아 성장해 왔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먼저 역사적으로 반백년 이상을 잘 견뎌왔고, 창립 당시 업계의 끄트머리에서 지금은 선두주자로 부상, 영국의 웨지우드, 로열 덜튼, 일본의 노리다께, 독일의 빌레로이 앤 보흐와 함께 세계 5대 메이커 중 하나로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어음을 발행하지 않고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결제하고 있다. 빚이 없고 현금거래를 하다보니 경영도 투명할 수밖에 없어 납세의 의무도 성실히 이행해 세 차례씩이나 모범납세자 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도자기는 창업주의 2대 3대가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모체인 한국도자기를 비롯, 수안보 파크호텔, 로제화장품과 여기에 판매회사들까지 합해 모두 8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 기업 대부분에서 오너 일가들이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그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창업주 고 김종호 회장은 아들 4형제를 두었다. 동수, 은수, 번웅, 성수씨 등이다. 이중 동국대 행정학과 교수인 3남 번웅씨만 빼고 모두 경영일선에서 일하고 있다. 장남인 김동수(金東洙·65) 회장이 모체인 한국도자기 회장으로, 차남 은수씨가 부회장으로(로제화장품 회장 겸임), 넷째 성수씨가 사장으로 각각 포진하고 있다. 김동수 회장의 2남 1녀도 모두 한국도자기와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다. 장남인 영신씨는 한국도자기 부사장으로, 차남 영목씨는 한국도자기 상무이사로, 딸 영은씨는 세인트 제임스 판매회사의 이사로 각각 일하고 있으며, 김회장의 부인 이의숙 여사도 딸이 일하는 세인트 제임스 대표로 있으며 직접 제품판매에 나서고 있다. 이외에도 김성수 사장의 부인인 이현자 여사는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나와 디자인센터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히 가족중심으로 기업운영을 하고 있지만 한국도자기는 아직까지 가족간의 재산싸움이나 경영권 다툼이 없었다.

    어음결제 없는 회사

    “다행히 가족들이 일을 감당할 그릇들이 되었어요. 동생들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도 다들 맡은 일들을 잘 해내고 있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하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 마쳤을 때 세 가지 안을 제시하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어요. 먼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라, 그러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둘째 취직하기 싫으면 건물을 사 줄테니 세를 받아 편히 살아라.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해라. 그러나 셋 중 마지막 길이 가장 어렵고 힘든 길이다. 이렇게 말하고 선택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들 모두가 마지막 안을 선택했어요.”

    김동수 회장은 “대물림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목이 안되는 자식들에게 욕심으로 기업을 물려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회의가 곧 경영전략회의

    한국도자기가 순항을 할 수 있게 된 데는 선장인 김회장의 역할이 컸다. 주위로부터 김회장은 집안의 맏형으로서 웃어른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의논할 안건이 생기면 먼저 가족회의에 부치고 각자의 의견을 들어요. 그런데 이때 의견이 분분해서 결정이 쉽게 나지 않으면 내가 생각한 바대로 결정을 내려요. 그러면 모두들 군소리 않고 내 결정에 따라요.”

    인터뷰를 하던 날, 동석한 김성수 사장은 김회장에게 거리감 없이 편하게 대하면서도 윗사람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했다. 그건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몸에 밴 태도였다. 김무성 홍보이사는 “이런 태도는 비단 김사장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라고 귀띔했다. 형제들의 김회장에 대한 깍듯한 예우는 CEO 자리를 그만두고 물러나겠다는 형을 붙드는 태도에서도 알 수가 있다.

    올해부터 지하철을 공짜로 타게 됐다는 김회장은 이제는 동생들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고 쉬려고 해도, 둘째 동생은 “화장품 쪽에 할 일이 많아 할 수 없다”며 맡으려하지 않고, 넷째 김성수 사장은 “형이 더 하셔야지 무슨 소리냐”며 거절을 한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김회장이 “내년에 둘째에게 한번 더 물어보고 못하겠다고 하면 김성수 사장에게 (한국도자기를) 맡기겠다”고 하자, 김사장은 “무슨 그런 소릴 하세요. 더 하셔야지”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릇 도매상으로 시작해 2000여 명의 직원을 둔 국내 최고의 도자기 기업으로 성장한 한국도자기는 올해 창립 58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번 가까이 바뀌는 세월 동안 한국도자기는 투박한 질그릇 회사에서 왕가의 명품인 본차이나 생산업체로 변신을 했다. 이처럼 화려한 변신으로 세계 속의 도자기회사로 자리잡으면서 한국도자기는 본차이나의 본고장인 영국의 ‘로열 덜튼’에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미국의 백악관 식기를 제조하는 레녹스, 독일의 빌레로이 앤 보흐, 이탈리아의 시슬라기 등 세계 유명 도자기업체에도 제품을 수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청와대를 비롯, 호텔 신라, 조선호텔, 인터컨티넨탈 호텔 등 대부분의 특급호텔에 납품하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세계 50여 개국에 자사브랜드와 OEM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세인트 제임스’라는 브랜드로 미국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 수출하고 있는데 전체 수출물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김회장은 앞으로 “자사브랜드 수출물량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Made in Italy’ 하면 이름도 없는 회사가 옷을 만들어도 국가 신뢰도가 있기 때문에 라벨만 보고도 비싼 값에 팔리는데 우리나라 제품은 품질이 좋아도 제값을 받지 못해요. 그럴 때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한국도자기의 자랑 ‘본차이나’

    이런 국가 신인도 때문에 자사브랜드로 나가는 세인트 제임스는 OEM방식으로 나가는 수출품보다 낮은 단가에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한국도자기가 생산하고 있는 제품은 생활도자기 전품목으로 커피세트에서 주발, 찬기, 접시까지 그 종류만도 수백 가지다. 이러한 다양한 제품 중에서 한국도자기가 최고로 꼽는 제품은 본차이나. ‘본차이나’는 영국 왕가에서 사용하던 도자기로서 젖소의 정강이뼈를 태워 가루를 낸 다음 그 속에서 삼인산칼슘을 추출, 재료에 50%를 함유시켜 만든 것. 제품의 특성은 일반 제품보다 가볍고 강하며 보온성이 뛰어나고 빛깔도 맑고 부드럽다.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난다. 이런 장점 때문에 본차이나는 일반 제품보다 2∼3배 비싸다.

    본차이나와 더불어 한국도자기가 자랑하는 제품은 ‘슈퍼스트롱’, 이 역시 젖소의 본애쉬를 추출(5%)해 만든 제품으로 일반 도자기에 비해 강도가 2∼3배 강하고, 수분 흡수율이 0.001% 이하이며 가격도 본차이나보다 20∼30% 저렴해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전사지 공장을 포함, 청주에 7개 생산공장과 인도네시아에 3개의 공장을 보유, 월 350만개의 제품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청주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내수와 수출을, 인도네시아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전량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도자기는 750억원의 매출을 올려 77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올해는 미국 테러사태로 인한 미국경기의 침체와 국내의 불경기로 5% 정도 매출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김회장은 이런 매출 부진을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지난 IMF 때보다 경기상황이 더 나빠졌음에도 그때보다 오히려 매출이 10%나 늘어난 상태이고, 세계적으로 제품력을 인정받았고 좋은 제품을 생산해낼 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폐허 속에서의 재건, 그속에서 기업을 성장시켜온 그로서는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지금의 불평이 한낱 엄살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김동수 회장이 한국도자기에 몸을 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59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던 그에게 부친 고 김종호 회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내용은 “공장이 빚도 많고 도자기 품질도 좋지 않으니 내려와 회사를 제대로 발전시켜 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고향 청주로 내려온 동수씨 앞에 펼쳐진 회사의 모습은 한마디로 참담했다.

    회사는 빚덩어리였다. 이렇게 된 것은 1943년 창업 때부터 함께 일해오던 동업자가 그만두고 나가자 아버지가 그 지분을 인수하면서 사채를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30여 명 되는 공장직원들의 월급도 3개월째 밀려 있었다. 허름한 판자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고, 생산시설이라고 가마 하나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여직원 한 명 있는 사무실에 그는 총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출근을 했다. 그러나 명색이 사장 아들인데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직원들은 일을 시켜도 듣는 척도 안했다. 3개월째 월급을 안 줬으니 말발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이때 동수씨는 직원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동안 밀린 월급은 여유가 생기는 대로 조금씩 갚아주고 나와 함께 일한 지금부터의 월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날짜에 챙겨주겠다.”

    그러나 아무도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장도 못 믿을 판에 책상물림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사장 아들의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수씨는 듣든 안 듣든 직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고 먼저 환경이 깨끗해야 좋은 제품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직원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밑바닥일부터 했다. 흙을 짓이기고 새끼를 꼬고 몸을 아끼지 않고 솔선수범하니까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수씨는 그릇을 만드는 대로 트럭에 싣고 직접 서울 거래처들을 다니며 물건을 납품했다. 새벽녘 그릇을 한 트럭 싣고 서울로 올라가 소매점들을 찾아가면 “이것도 그릇이라고 만들어왔느냐”며 그냥 가지고 가라고 밀어내기가 일쑤였다. 어렵게 물건을 맡기고 돌아와 뒤에 수금을 하러 가면 물건값을 깎으려고 받은 물량을 터무니없이 줄여서 말하는 등 오리발을 내밀었다. 물건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판매하고 수금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게 없었다. 동수씨의 노력에도 회사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고 매일 빚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그당시 빚이 얼마나 많았던지 전체 매출의 40%를 이자로 내고 있었어요. 매일 은행 마감시간인 오후 5시가 다가오면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쳤어요. 어머니는 사방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고 나는 전화통을 붙들고 하루만 연기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그런 심정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얼마나 시달렸던지 밤이면 헛소리를 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자질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 잠자리에 누울 때면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께도 이렇게 빚더미에 시달리게 하려면 차라리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어요. 얼마나 힘들었던지 입사 당시 56㎏이던 몸무게가 몇 달 지나지 않아 48㎏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이렇게 빚에 시달리면서 동수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빚부터 갚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회사 형편이 나아지질 않자 김종호 사장은 아들에게 아예 경영권을 넘겼다. 입사 5년이 채 안된 1963년,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동수씨는 새로운 각오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최고의 물건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하면서 회사명을 ‘충북제도회사’에서 ‘한국도자기’로 바꿨다. 그리고 한 선교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공장 시설도 현대식으로 바꾸고 마케팅 전략도 저가품 위주인 국내 도자기 시장을 탈피,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홈세트 시장에 진출하기로 했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제값을 받는다고 판단한 김동수 회장은 1968년 세계 최고의 명품을 만드는 영국의 로열덜튼 그룹 산하 존슨 매시사와 황실장미 전사지 공급계약을 맺고 국내 최초로 ‘황실장미 홈세트’를 내놓았다. 이렇게 획기적인 신상품을 내놓으면서 도자기업계 최초로 TV광고도 내보냈다. 대대적인 TV 광고와 함께 대리점 판촉사원을 통한 적극적인 판매활동을 펼치자 매출이 크게 늘어났다.

    제품이 인기를 끌자 김회장은 백화점 쪽 판매망을 뚫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출이 놀랍게 늘어났다. 이렇게 제품의 질이 좋아지면서 해외시장 개척에도 나서 1968년 30만달러의 수출고를 올렸다. 이때 영국의 ‘브라이스칼러’의 한국대리점권을 따오기도 했다

    도자기는 여러 번 구울수록 결이 매끄럽고 품질이 좋아진다. 김동수 회장은 당시 25시간 초벌구이에 그쳤던 제품을 다시 30시간의 본소성을 거친 후 그림을 입혀 한 차례 더 구워내는 세벌구이 과정을 거쳐 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냈다.

    매출이 늘면서 부채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3년 15년의 긴 부채 경영의 어두운 터널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김동수 회장은 당시 300개나 되던 사채카드를 완전히 정리하고 국민은행 상도동 지점에서 100만원이 예금된 보통예금 통장을 만들었다. 그 통장을 손에 들고 김사장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물건을 싣고 서울로 가던 트럭 안에서 새우잠을 자던 일이며, 동대문시장 상인들로부터 품질이 좋지 않다고 납품을 거절 당하던 일, 거절당한 재고품을 싣고 처참한 심정으로 되돌아오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김회장은 100만원이 든 통장을 들고 ‘이제부터 절대 빚지고는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때의 다짐은 현실이 되어 지금까지 20여 년동안 한국도자기는 한푼의 부채도 없이 운영해 왔다.

    육영수 여사와의 약속

    김회장의 무차입경영에 대해 주변에선 바보스럽다며 놀렸다. 그러나 김사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IMF 사태가 터지면서 한국도자기는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됐다. 한국도자기는 당시 사옥을 짓고 있었는데 경기가 나빠지고 자금운용이 어려워질 것 같자 사옥건축을 일시 중단했다. 그러다 1999년 경기가 회복되고 자금여유가 생기자 다시 사옥을 올려 지난해에 4년 만에 완공을 보았다. 이렇게 완공된 10층짜리 한국도자기 사옥은 청계천 8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무리하지 않고 한 발자국씩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김동수 회장의 ‘한 발자국’ 경영철학이 사옥 건축에도 적용되었다.

    현재 2000명 가량의 한국도자기 사원 중에 150명 정도는 불필요한 인력이라는 진단을 받고 있다. 그러나 5년 정도 신규사원을 뽑지 않으면 정년퇴직 등 자연감소로 인원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억지로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았다. “인위적 구조조정은 안한다”는 게 김회장의 경영철학인데 “함께 여러움을 겪어온 사람들을 당장 사정이 좋지 않다고 내보낼 수는 없다”는게 그 이유다.

    지금은 본차이나가 한국도자기의 대표상품이 됐지만 김동수 회장이 본차이나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1971년 김동수 회장은 대한도자기공업협동조합 이사로 선임돼 해외연수단의 일원으로 해외 산업시찰을 가게 되었다. 이때 시드니 한 백화점에서 그는 처음으로 본차이나 커피세트를 본다. 투명하면서도 부드러운 유백색에 우아한 곡선, 묵직하면서도 만지면 날아갈 것 같은 신비한 질량감이 흡사 커피잔이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김사장은 제품에 매료되어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값이었다. 여느 도자기는 한 세트에 1달러인데 반해 본차이나는 무려 20배나 비싼 20달러나 되었다. 그는 라벨을 살펴보았다. 영국 왕실에 식기를 대는 2대 명가 중 하나인 ‘로열 덜튼’ 제품이었다. 순간 김회장은 ‘싼 제품을 만들 것이 아니라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극을 받고 돌아온 그는 이때부터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시드니에 가서 본차이나를 보고 돌아온 후 머릿속엔 항상 이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일본으로 가서 기술 전수를 의뢰했어요. 그랬더니 일본측 관계자 말이 ‘우리도 영국으로부터 90%의 기술을 이전받고 나머지 10%를 개발하는 데 30년이 걸렸는데 겨우 질그릇 수준을 벗어난 회사가 본차이나를 만들겠다는 거냐’며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영국으로 갔죠. 역시 그곳에서도 안된다고 거절을 당했어요. 그러고 있던 차에 1973년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가 불렀어요. 그래서 갔더니 육여사께서 ‘독일에 갔을 때 본차이나를 선물로 받아왔는데, 너무 좋아서 영국에 주문을 했더니 2년이나 걸린다 하고 값도 엄청나게 비싸 주문을 못했다’며 ‘김사장은 만들 수 없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못한다고는 못하고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왔어요.”

    육여사와 약속을 하고 나온 김회장은 황실장미 전사지 공급계약을 맺고 있는 영국의 ‘존슨 매시’사가 영국 왕실에 본차이나를 만들어 납품하는 ‘로열 덜튼’사의 계열사라는 걸 알고 영국으로 날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그곳의 총수인 라이언 회장으로부터 본차이나 대중품을 보급하는 방계회사인 ‘크레스콘’사 사장단을 소개받고 기술제휴를 맺고 돌아왔다.

    당시 연구실장이던 김성수씨는 연구원 몇 사람을 데리고 영국에서 기술을 전수받아 제품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연말에 마침내 한국산 본차이나를 만들어냈다.

    김동수 회장은 3000개의 제품 가운데서 디너세트와 커피세트 각각 3벌씩을 골라 청와대로 찾아가 육영수 여사 앞에 내놓았다. 그걸 본 육여사는 김회장을 칭찬하며 무엇이든지 도움이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했다.

    청와대 식기를 납품한 사연

    김회장은 “빚도 다 갚고 특별히 필요한 게 없다. 다만 검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전국 대통령기 쟁탈 검도대회’를 신설해서 나라의 검도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고 싶으니 대통령 휘호 한 장을 하사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한욕심 부렸을 만도 한데 그는 단지 휘호 한 장만을 원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청와대 식기납품을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이처럼 김동수 회장의 욕심없는 건실한 기업경영철학의 결과, 한국도자기는 부채 0%의 작지만 본차이나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동수 회장은 요즘도 매일 오후 5시면 롯데호텔 국선도 도장에 나가 회장이 아닌 ‘사범’으로 제자들에게 검도를 가르친다.

    그는 올봄 너무나 생생하게 빈털터리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나보니 너무 가진 것이 많아 감사했다”는 김회장은 “세 가지 이유에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첫째가 회사에 빚이 없는 것이고, 둘째가 건강한 것, 그리고 셋째는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김회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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