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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⑨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목공예의 꽃은 바로 소반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죠”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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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 나주반 전수교육관 전시실에서
그의 뒤를 이을 아들 김영민 씨와 함께. 전시실 한 면을 마루와 방 두 칸으로 꾸몄다. 이 공간을 채운 집기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장롱을 비롯해 나주 지방의 명물 부채인 ‘남평선’까지 솜씨 있게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목을 매단 나주반의 전통, 아니 정통 나주반은 다른 지역 소반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나주반은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게 가장 큰 장점이지요. 해주반은 조각이 아름답지만, 사실 실생활에서 많은 조각은 위생에 좀 불리하지 않겠어요?”

그의 찬사 담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나주반은 현대인의 눈에 가장 편안해 보이는 외형을 지녔다. 상판의 테두리(변죽)를 따로 만들어 끼워서 판이 잘 휘지 않고 튼튼한데, 상판 아래 조각된 운각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가 돋보인다. 또한 경상도에서 주로 사용했던 통영반은 무거워도 무늬가 아름다운 느티나무 괴목을 선호한 데 반해 나주반은 가볍고 단단한 은행나무를 주로 사용해서 실용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어디 소반이든 괴목과 은행나무를 다 썼지만, 아무래도 나주반은 행자반(은행나무 소반)이 최고지요. 행자반은 괴목보다 반은 가볍습니다. 아낙네들이 자기나 놋그릇 같은 무거운 그릇을 상에 올리고 부엌에서 토방으로 올라가려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주반은 실용적이고 인간적이고 또 여성을 배려한 상이다. 괴목은 아랫사람들이 밥상을 날라다 줄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 실용성보다 멋진 무늬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애호했다. 통영반에 괴목이 많은 것은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김춘식 장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나주반의 옻칠이다. 지난해 새로 문을 연 나주반 전수교육관에 특별히 옻칠을 말리는 방을 마련했을 정도로 그는 옻칠에 신경을 쓴다.

“옻칠은 나무를 보호해서 소반의 수명을 늘여주죠. 행자반에 생옻칠을 여덟 번 정도 해주면, 다섯 달 뒤부터 옻빛이 살아나기 시작해 해가 갈수록 옻빛이 피어납니다. 나중에는 대춧빛으로 아주 예쁘게 변하지요.”

그는 옻칠한 밥상에서 밥 먹는 사람치고 간 나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다. 놋그릇 등 뜨거운 음식 그릇을 상에 놓으면 옻칠이 수증기와 함께 조금씩 피어올라오는데, 옻이 몸에 좋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다른 화학도료는 자칫 몸에 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빛깔을 내기 위해 공력과 재료를 아끼지 않는 그의 상은 칠 값만 생각해도 꽤 비싸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비싸게 받지는 않는다. 보통 상은 30만 원부터 15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요즘 상 값이 많이 싸진 편이란다. 25년 전에는 소반 하나에 15만 원씩 했다고 한다.

“연세대 법대 교수가 환갑을 맞아 제자들이 기념논문집을 그에게 바치는데, 보답으로 소반을 선물하고 싶다고 제게 문의해온 적이 있어요. 15만 원이라고 했더니 ‘우리 교수들은 돈이 많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백골 소반을 직접 들고 서울로 찾아갔습니다.”

수유리까지 물어물어 교수 집을 찾아간 그는 이 소반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일일이 설명했다. 칠하기 전의 백골은 작업한 손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일부러 백골을 가지고 간 것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교수는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그에게 숙박비로 쓰라며 봉투에 10만 원을 넣어주었다. 그는 대신 갖고 간 백골 소반을 선물했다.

“백골에 기름칠해 길을 들이면 그것도 멋진 소반이 되거든요. 그분이 정년퇴임하실 때 기념으로 소반을 스무 개 주문하셨어요.”

교사 자리 거절하고 사업하다 차압·경매당해

헌 상을 고치며 나주반의 원형을 하나둘씩 찾아나간 노력의 첫 결실은 1977년 나주반 재현 전시회로 나타났다. 나주반 70점을 충실히 재현해낸 이 전시회는 TV 뉴스에도 나올 만큼 화제가 되었다.

“학계에서는 나주반은 이제 죽은 걸로 보고 있을 때였으니, 그 전시회가 눈길을 끈 것 같습니다. 전시회 덕택에 조금 유명해져서 부산공예학교에서 교사로 초빙까지 받았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기술학교를 많이 세웠는데, 부산공예학교도 그런 전문 기술학교였다. 그는 일본에서 초등학교 다닌 것이 학벌의 전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가장 노릇하던 큰형을 따라 온 가족이 일본에서 살게 됐는데, 그때 학교를 다니다 돌아와서는 중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그 뒤로 먹고살기 힘든 세월이 이어지는 바람에 학교공부는 그걸로 끝이었고, 서당에만 다니고 말았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저를 정교사로 모시겠다고 하니 무척 고마운 일이었죠. 제가 직접 그 학교에 찾아가 보니 목공뿐 아니라 도자 등 몇몇 공예를 가르치고 있는데, 정말 정예교육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제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 공방을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난색을 표하더군요.”

어쩌면 공방은 핑계였는지 모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산은 통영반 전통에 속하는 지역이니 통영반을 가르치는 게 맞을 것 같았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통영반 장인이 대기업 수위가 되어 “이렇게 편한 일 놔두고 뭐 하러 다시 상 짜는 일을 하겠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만큼 옛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래도 박정희 정권 때는 경기가 좋아 형편이 나아진 사람들이 갖가지 목물을 잘 사들였고, 장따래기 상을 만드는 그의 공방에는 한때 종업원이 열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공방도 사업인지라 차압을 세 번 당하고 경매도 두 번이나 겪었다.

“종업원 월급과 자재 값은 늘 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데, 사업이 어려워지면 은행 빚에 쪼들리게 되죠. 그럴 때는 부산의 공예학교에 근무할걸, 하는 후회도 했지만 결국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일해 빚을 갚는 도리밖에 없더군요.”

이렇게 힘들게 빚을 겨우 다 갚았는데, 1989년 나주에 큰 홍수가 나서 작업공방과 전방, 살림집, 목재까지 다 떠내려가는 바람에 큰 고통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도 그는 천주교 신앙의 힘과 사내다움으로 고비를 넘겼다.

“고난이 닥쳤을 때 도망가면 망하지만 싸우면 해결책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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