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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유학생의 영국 일기 ②

하기스를 건넨 스코티시 청년의 자부심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하기스를 건넨 스코티시 청년의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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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연구실 동료에게서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을 선물로 받았다.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먹을 엄두를 못 내고 며칠째 냉동고에 넣어둔 게 마음에 걸린다. 내가 머물고 있는 글래스고는 영국이면서 영국이 아니고, 심정적으로 독립을 원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독립을 주저하는 스코틀랜드다. 이곳 사람들의 남다른 자의식과 영국에 대한 반감이 도처에서 확인된다.
하기스를 건넨 스코티시 청년의 자부심

글래스고 시내 전경.

지금 우리 집 냉동고에는 정체불명의 스코틀랜드 음식 하나가 한 달 가까이 꽁꽁 언 채로 방치돼 있다. 나는 웬만해서는 우리나라 남의 나라 음식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는 편이고, 남이 다 맛없다고 하는 영국 음식도 냠냠 맛있게 먹어치우곤 한다. 그렇지만 이런 나에게도 냉동고에 있는 꾸러미는 정말이지 처치곤란이다. 그러나 이걸 안 먹을 수도 없다. 영국 친구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음식꾸러미를 곱게 포장해서 건네준 영국 친구 앤디는 “끓는 물에 2~3분 데우기만 하면 된다”며 요리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대체 무슨 음식이기에 그러지? 거위 간이라도 받았나?’ 하고 궁금해 할 독자를 위해 이 꾸러미의 정체를 설명하자면, 스코틀랜드 전통요리인 ‘하기스(Haggis)’다. 소시지 껍질에 양의 내장과 각종 양고기 부산물, 양파 등을 꼭꼭 채워 넣은 요리다. 잿빛 소시지같이 생긴 게 언뜻 봐서는 순대와 비슷하다(가만 생각해보면 내용물도 순대와 비슷한 듯싶다). 보기만 해도 금세 양고기 누린내가 확 끼칠 것 같아서 도저히 손이 가질 않는다. 앤디가 그 많은 크리스마스 선물 중 하필이면 하기스를 선택한 데는 짧지 않은 사연이 있다.

1521년에 지어진 글래스고대학 본관에 있는 내 연구실에는 두 명의 동료가 있다. 박사과정 3년차인 아일랜드 아가씨 에이미, 그리고 나와 같은 해에 박사과정을 시작한 글래스고 토박이 앤디다. 둘 다 전공이 영화학이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남학생은 후드 티셔츠(여기서는 후디(Hoodie)라고 한다)에 청바지, 여학생은 후드 티셔츠에 미니 청치마’를 마치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글래스고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앤디와 에이미는 단연 눈에 띄는 멋쟁이다.

글래스고 지역신문에 영화비평을 쓰는 앤디는 내 전공인 문화정책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문화정책연구센터에서 열리는 세미나에도 가끔 나를 따라 참석하는데, 금발 구레나룻에 까만 비니(beanie)를 쓴 앤디가 세미나실에 등장하면 우리 과 여학생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휘둥그레진다. 아니, 저 아줌마가 어디서 저런 킹카를 물고 왔지? 이런 눈초리다. 아쉽게도 앤디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약혼녀가 있는 ‘품절남’이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이 아니다

내 연구실이 있는 글래스고대학 본관은 500년 된 건물이니만큼 ‘호그와트 마법학교’ 뺨치는 운치와 분위기로 가득하다. 문제는 오래된 건물이라 겨울이면 무척이나 춥다는 것이다.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에 있는 에이미는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느라 연구실에 잘 나타나지 않고, 대개 박사 1년차인 앤디와 나 둘이서 연구실을 지킬 때가 많다. 손이 곱아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추운 날이면 전기포트에 커피를 끓여 마시며 앤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앤디는 글래스고 토박이답게 억센 글래스고 사투리를 쓰지만 나와 이야기할 때는 표준 영어를 쓰려고 나름 신경을 쓴다. 사실 글래스고에 오기 전까지 나는 주변 영국 사람들로부터 ‘글래스고에 가면 사투리 때문에 엄청 고생할 걸…’ 하는 얘기를 적잖이 들었다. 그래서 대체 글래스고 말이 어떻기에 그러나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여기에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리나 상점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억양도 런던 영어와 판이하다. 글래스고 사람들은 ‘r’ 발음을 ‘르-’ 하고 길게 끄는데, 예를 들어 ‘girl’은 ‘갸-를’로, ‘smart’는 ‘스마르-트’로 발음한다. 설상가상으로 항구도시답게 이곳 사람들의 말하는 속도는 영국 평균보다 상당히 빠른 편이다. 상점 점원이나 은행 직원들, 또 지하철역 매표원들은 100% 글래스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말이 안 통해 낭패를 보는 일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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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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